다루왕

다루왕

분류 문학 > 국가 > 백제

기본정보

백제 제2대 왕
생몰년: ?-77
재위년: 28-77

일반정보

백제의 제2대 왕으로, 아버지는 시조 온조왕(溫祚王)이다. 온조왕 28년(10) 태자(太子)가 되었고, 온조왕이 죽자 왕위에 올라 28년부터 77년까지 재위하였다. 재위 49년만에 죽자 아들 기루왕(己婁王)이 즉위하였다.

전문정보

백제의 제2대 왕으로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아들이다. 『삼국유사』 왕력에는 온조왕의 둘째아들이라 하였으나,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28년(10)조와 같은 책 다루왕 즉위년(28)조에는 온조왕의 원자(元子) 즉 맏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다루왕 즉위년조에 따르면 “도량이 넓고 위엄과 덕망이 있었다. 온조왕이 재위 28년에 태자로 삼았고, 46년에 이르러 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器宇寬厚 有威望 溫祚王在位第二十八年 立爲太子 至四十六年 王薨 繼位)”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다루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인 온조왕 28년(10)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또 자신의 재위 6년(33)에는 아들 기루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너무 일찍부터 부자상속과 태자책립(太子冊立)의 기록이 나타나기 때문에 다루왕과 기루왕대 보이는 태자책봉은 역사적 사실로 믿을 수 없다고 보기도 한다.(이기백, 1996)

한편 백제초기에 보이는 왕계를 해씨(解氏)를 칭한 비류(沸流) 세력과 부여씨(扶餘氏)를 칭한 온조 세력으로 나누고, “婁”자의 왕명을 가지고 있는 다루왕, 기루왕, 개루왕을 해씨(解氏) 출신의 비류 세력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다. 북부여왕 해부루(解夫婁), 백제의 비류(沸流), 고구려의 유류(孺留), 대해주류(大解朱留) 등 “婁”나 “留”로 끝나는 왕명을 가진 왕들의 성씨가 모두 해씨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백제 초기와 왕계는 온조세력과 비류세력이 연맹장의 지위를 교대로 차지함으로써 이원적인 구성을 가졌으나, 후일 온조계가 왕위를 세습하게 되면서 온조계 중심으로 왕계가 일원화되었다고 한다.(노중국, 1988)

다루왕은 즉위 2년(29) 시조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고 남단(南壇)에서 천지(天地)에 제사지냈다. 이는 보통 즉위의례로 여겨지며, 특히 천지제사는 백제본기에서만 확인된다는 점이 주목된다.(최광식, 2006)

또한 다루왕대에는 말갈과 자주 교전하였는데, 주로 백제 북쪽 및 동북지역에서 전투를 벌인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재위 후반부에는 신라와 주로 전투를 벌였는데, 당시 백제와 신라의 전투에 대해서는 그 지명의 사실성을 의심하거나 연대를 조정하는 견해도 있다.(강종훈, 2000; 선석열, 2001) 그러나 온조왕대 아산만 유역 세력을 정벌하고 남하한 백제가 상주의 사벌국(沙伐國)이나 개령(開寧)의 감문국(甘文國)과 보은, 옥천 등에서 벌였던 전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박대재, 1999)

이외 다루왕은 재위 6년(33) 나라 남쪽의 주(州)·군(郡)에 영을 내려 처음으로 논을 만들게 하였으며, 11년에는 동부(東部)와 서부(西部)를 순행하였다.

다루왕은 재위 49년만인 77년에 죽었고 그 뒤를 이어 태자(太子)였던 아들 기루왕이 즉위하였다.

참고문헌

노중국, 1988, 『百濟政治史硏究』, 일조각.
이기백, 1996, 『韓國古代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
박대재, 1999, 「『三國史記』 初期記事에 보이는 新羅와 百濟의 戰爭」 『韓國史學報』7.
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 출판부.
선석열, 2001, 『新羅國家成立過程硏究』, 혜안.
최광식, 2006, 『백제의 신화와 제의』, 주류성.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 多婁王 [溫祚第二子 戊子立 理四十九年]
제2 다루왕 [온조의 둘째아들이다. 무자년에 즉위하여 49년간 다스렸다.]

第三 <己>婁王 [多婁子 丁丑立 理五十三年]
제3 기루왕 [다루의 아들이다. 정축년에 즉위하여 53년간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