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천

웅천

분류 문학 > 국가 > 백제

기본정보

웅천(熊川)은 웅진(熊津)으로도 불리며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이다. 백제 제22대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한 후(475년) 한성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였다.

일반정보

백제 제22대 문주왕(文周王)은 475년 10월에 고구려의 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웅천(熊川) 곧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웅천은 백제 멸망후 신문왕대 웅천주가 되었으며 경덕왕 16년(757)에 이름을 웅주(熊州)로 고쳤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오늘날의 이름인 공주(公州)가 되었다.

전문정보

웅천(熊川)은 백제 제22대 문주왕 1년(475)에 고구려의 침입과 개로왕의 패사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피하기 위해 한성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건설한 백제의 도읍지이다. 웅천(熊川)이라는 지명은 시조인 온조왕대에 나타난다.『삼국사기』권23 백제본기1 시조 온조왕 13년(서기전 6) 조에 따르면 마한에 사신을 보내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강역을 구획하였는데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의 웅천이 지금의 공주 지역이 아닌 안성천 하류에 있는 평택 지역이라는 주장도 있으므로,(이병도, 1976) 온조왕대 웅천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 이후 웅천이라는 용어는 문주왕의 천도 이후에 나타난다.

『삼국유사』왕력편에는 문주왕이 웅천(熊川)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나오며,『삼국사기』권26 백제본기4 문주왕 즉위년조에는 “겨울 10월에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겼다(冬十月 移都於熊津) ”고 나온다. 또한 중국의『양서』권54 열전48 백제전에는 수도를 고마성(固麻城)이라고 했고,『일본서기』권14 웅략기 21년조에는 구마나리(久麻那利)라 했다. 즉, 웅천(熊川)-웅진(熊津)-고마성(固麻城)-구마나리(久麻那利)는 모두 문주왕이 천도한 같은 지역을 나타낸다. 『삼국사기』 권36 잡지5 지리 3 신라 웅주조를 보면 웅천(웅진)이 오늘날의 공주로 알려지게 되는 과정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웅주(熊州)는 본래 백제의 옛 도읍이었다. 당나라 고종이 소정방을 보내 평정하고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으며, 신라 문무왕이 그 땅을 빼앗아 차지하였다. 신문왕이 웅천주(熊川州)로 고치고 도독을 두었다. 경덕왕 16년(757)에 이름을 웅주(熊州)로 고쳤다. 지금 (고려)의 공주(公州)이다(熊州 本百濟舊都 唐高宗遣蘇定方平之 置熊津都督府 新羅文武王取其地有之 神文王改爲熊川州 置都督 景德王十六年 改名熊州 今公州).”

문주왕이 웅천으로 천도한 직접적인 계기는 고구려의 침략과 개로왕의 패사(敗死) 그리고 한성의 폐허에 있었지만, 도읍으로 웅천 곧 웅진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웅진은 북으로 금강이 자리하고 더 위로 차령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고구려 방어에 유리하여 도읍으로 선정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문주왕의 천도 이전에 웅진에는 도읍으로 삼을만한 유적이 보이지 않는다. 즉 당시 웅진에는 왕을 뒷받침할만한 큰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웅진의 주변 즉 동북쪽으로는 천안과 청주, 동남쪽으로는 논산, 서남쪽으로는 부여, 서쪽으로는 보령지역의 일원에 백제의 남천 이전의 유적이 적지 않게 있다. 즉, 문주왕의 웅진 천도는 자연지리적인 조건 이외에 주변 지방세력과의 관계도 고려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이남석, 2007)

참고문헌

이병도, 1976,『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이남석, 2007, 「百濟 熊津 王都와 熊津城」『馬韓․百濟文化』17.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十二 文周王 [一作文明 盖鹵子 乙卯立 移都熊川 理二年]
제22대 문주왕[또는 문명이라고도 하며 개로왕의 아들이다. 을묘년에 즉위하여 도읍을 웅천으로 옮겼다. 2년간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