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국

72국

분류 문학 > 국가 > 삼한

기본정보

삼한(三韓)에 존재했던 국(國)의 총칭

일반정보

삼한에 존재했던 국의 총칭으로,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마한에 54개 국, 진한에 12개 국, 변진(변한)에 12개 국 등 총 78개국이 있었다. 『삼국유사』의 조목에서는 “72국”이라 하였지만, 본문 내용에 따르면 『삼국유사』 역시 삼한을 78국으로 이해하고 있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72국조에서는, 『통전(通典)』과 『후한서(後漢書)』를 인용하여 삼한의 72국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즉 먼저 『통전』을 인용하여, 조선의 유민이 70여국으로 나뉘었는데 사방이 모두 100리라고 하고, 이어서 다시『후한서』를 인용하여 서한(西漢) 즉 전한(前漢)이 조선의 옛 땅에 처음 4군을 두었는데 법령이 번거로워지자 78국으로 나뉘었고 각각 1만호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앞서 인용한 『통전』의 기록은 현전하는 『통전』에서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이와 가장 유사한 기록은 『통전』 권185 변방1 마한조에 보이는 “무릇 78국이 있다. … 땅은 사방 4천 여리이다.(凡七十八國 … 地合方四千餘里)”라는 내용으로, 마한・진한・변한을 설명하는 부분에 들어 있다. 또한 뒤에 인용한 『후한서』의 기록도 마찬가지로 『후한서』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인용문 앞부분의 4군과 2부 설치내용 및 법령 관련 내용은 『후한서』 권85 동이열전75 예조의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이르러서 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낙랑・임둔・현도・진번의 4군을 두었다.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에는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도에 합하였다. … 뒤에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시 영(領)의 동쪽 7현을 떼어 낙랑군에 속한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었다. 복속된 후부터 풍속이 점점 나빠짐에 따라, 법령도 점차 늘어나 60여 조가 되었다.(至元封三年 滅朝鮮 分置樂浪臨屯玄菟眞番四郡 至昭帝始元五年 罷臨屯眞番 以幷樂浪玄菟 後以境土廣遠 復分領東七縣 置樂浪東部都尉 自內屬已後 風俗稍薄 法禁亦浸多 至有六十餘條)”라는 기록과 관계가 있고, 인용문 뒷부분은 『후한서』 권85 동이열전75 한조에 “한에는 3종이 있다.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라 한다. ...무릇 78국이 있다... 큰 것은 만여 호, 작은 것은 수천 가이다.(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 凡七十八國 … 大者萬餘戶 小者數千家)”라는 기록을 참조한 것인 듯하다.

일단 앞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 조의 제목인 “72국”은 “78국”의 잘못이라고 볼 수 있다. 삼한의 국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인 『삼국지(三國志)』에는 마한에 무릇 50여 국이 있다고만 하였으나, 『삼국유사』에 인용된 『통전』과 『후한서』에는 모두 삼한에 무릇 78국이 있었다고 했기 때문이다.『삼국유사』의 72국조 마지막 부분에도 “마한은 서쪽에 54개의 소읍(小邑)이 있으며 모두 국(國)이라 칭하였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개의 소읍이 있으며 국이라 칭하였다. 변한은 남쪽에 있는데 12개의 소읍이 있으며 각각 국이라 칭하였다.(馬韓在西 有五十四小邑 皆稱國 辰韓在東 有十二小邑 稱國 卞韓在南 有十二小邑 各稱國)”라는 세주를 덧붙였으므로, 72국은 78국의 잘못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이병도, 1956)

『삼국유사』의 『후한서』 인용 내용은 한 소제(少帝) 시원 5년(기원전 82)에 4군을 2군으로 통합하면서 2개의 도위를 설치한 것을 2부의 설치로 표현한 것이며, 법령이 점차 번잡하게 되어 78국이 된 것이 아니라, 예가 한에 내속한 이후 풍속이 나빠짐에 따라 법령이 점차 늘어나 60여조가 되었다는 사실을 잘못 표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이 위치한 곳은 한반도의 중부 이남이었으므로, 그 북쪽 지역에 설치되었던 낙랑군 등 4군이 2부가 되었다가 나중에 78국으로 나뉘었다는 기록은 『삼국유사』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三品彰英, 1975) 다만 72국조를 통해, 『삼국유사』에서는 한(韓)의 종족을 조선의 유민으로 설정하여 조선→4군→2부→삼한 78국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상정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新羅史硏究會, 1996)

한편 72국조의 마지막에 붙은 세주에는 마한・진한・변한에 각각 “소읍(小邑)”이 있는데 모두 “국(國)”이라 칭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따르면 『삼국유사』에서는 “소읍”과 “국”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삼한의 “국”에 대해서는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한조에 마한과 진한 및 변진(변한)의 국명이 기록되어 있다. 즉 마한에는 원양국(爰襄國) 등 50여국이 있는데 대국(大國)은 만여 가(家), 소국(小國)은 수천 가라고 하였고, 진한에는 이저국(已柢國) 등 12국, 변진(변한)에는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 등 12국이 각각 있었으며 대국은 4-5천 가, 소국은 6-7백가라고 하였다. 또 “국읍(國邑)”과 “읍락(邑落)”이라는 표현도 보이는데, “국읍”에는 “주수(主帥)”가 있었고 또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는 “천군(天君)”이 있었으며, “읍락”과 잡거(雜居)하여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고 하였다.

“읍락”은 본래 혈연적 유대를 바탕으로 한 부락공동체적인 성격을 갖는 취락 단위였으나 삼한시대에는 이미 정치적 세력단위로 성장하였으며, 이들 읍락간의 차등화현상 속에서 삼한의 “국읍”이 등장하였다고 한다.(문창로, 2000) 그리고 “국”은 상대적으로 세력이 강한 중심의 “대읍락”을 지칭하는 “국읍”을 중심으로 하여, 재분배와 잉여생산물의 보관 등을 위한 경제적 기능, 외부세력과의 전쟁과 방어를 위한 군사적 기능, 다수의 읍락을 결집시키는 천군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기능을 가지고 있던 삼한의 정치세력 단위였다고 보고 있다.(이현혜, 1984; 권오영, 1995)

이들 “국”은 대체로 평균 인구 1만여 명으로 추측된 바 있으며, 준 국가단계인 군장사회(君長社會, chiefdom)로 이해하거나(김정배, 1986), 혹은 성읍국가(城邑國家)로 부르기도 한다.(천관우, 1989) 그러나 이 중 목지국(目支國), 사로국(斯盧國), 백제국(伯濟國), 구야국(狗邪國)과 같은 대국의 경우에는 이미 국가 단계에 도달했다고 보기도 하며, 그 연장선에서 『삼국지』․『진서(晉書)』에 보이는 3세기 삼한의 왕들을 군사권과 대외교섭권까지 획득한 국가(state) 단계의 왕(king)으로 해석하기도 한다.(박대재, 2006)

참고문헌

이병도, 1956, 『(原文幷譯註)三國遺事』, 동국문화사.
三品彰英, 1975, 『三國遺事考證』上, 塙書房.
이현혜, 1984, 『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 일조각.
김정배, 1986, 『韓國 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고려대학교출판부.
천관우, 1989, 『古朝鮮史․三韓史 硏究』, 일조각.
권오영, 1995, 「三韓社會 ‘國’의 구성에 대한 고찰」『韓國古代史硏究』10.
新羅史硏究會, 1996, 「『三國遺事』 譯註(3)」『朝鮮文化硏究』3.
문창로, 2000, 『三韓時代의 邑落과 社會』, 신서원.
박대재, 2006, 『고대한국 초기국가의 왕과 전쟁』, 경인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72국)
七十二國
通典云 朝鮮之遺民 分爲七十餘國 皆地方百里 後漢書云 西漢以朝鮮舊地 初置爲四郡 後置二府 法令漸煩 分爲七十八國 各萬戶[馬韓在西 有五十四小邑 皆稱國 辰韓在東 有十二小邑 稱國 卞韓在南 有十二小邑 各稱國]
72국
『통전(通典)』에는 “조선의 유민이 나뉘어 70여국이 되었는데, 지역은 모두가 사방 백리이다.”라고 하였다. 『후한서』에는 “서한이 조선의 옛 지역에 처음에는 4군을 두었다가 후에는 2부를 두었더니 법령이 점차 번거로워지면서 갈라져 78국으로 되었으니 각각 만호씩이다.”라고 하였다.[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어 54개의 소읍(小邑)이 모두 나라로 일컬었으며,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어 12개의 소읍이 나라를 일컬었고, 변한(卞韓)은 남쪽에 있어 12개의 소읍으로 각각 나라를 일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