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랑

시랑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의 관직.

일반정보

신라의 관직으로, 집사부(執事部)의 차관급이다.

전문정보

신라의 관직으로, 집사부(執事部)의 차관급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조에 의하면, 진덕여왕 때에 시랑(侍郞)이라는 칭호를 처음 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 권38 직관(職官) 상(上) 집사성(執事省)조에 의하면, 집사부(執事部)가 진덕왕 5년(651)에 성립된 사실과 중시(中侍)-전대등(典大等=시랑(侍郞))-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로 이어지는 관원 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집사부 시랑(侍郞)의 정원은 2명으로 규정되어 있고, 전대등(典大等)을 시랑(侍郞)으로 개명한 것은 경덕왕(景德王) 6년(747)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조상기(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造像記)」(719)및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조상기(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像造像記)」(719)에는 이를 만든 김지성(金志誠 또는 김지전(金志全))이 집사시랑(執事侍郞)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가 시랑직에 있던 성덕왕(聖德王) 18년(719)에는 이미 시랑(侍郞)이란 명칭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직관지(職官志)보다 이들 조상기(造像記)가 신용 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진덕왕(眞德王) 5년 중시(中侍)가 설치됨과 동시에 전대등(典大等)도 시랑(侍郞)으로 개명된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 그 방증으로 직관지(職官志)에는 대사(大舍)를 낭중(郞中)으로 개명한 연대에 대해서도 경덕왕(景德王) 18년설과 진덕왕(眞德王) 5년설이 있음을 지적하였다.(末松保和, 1954) 또한, 진덕왕(眞德王) 5년 이래 전대등(典大等)과 시랑(侍郞)의 두 명칭이 혼용되었을는지 모른다는 견해도 있다.(이기백, 1974)

집사부는 그 전신인 품주(稟主)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품주는 왕정(王政)의 가신적(家臣的) 전통을 이은 존재로서, 처음에는 국가의 창름(倉廩)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진평왕 6년(584) 조부(調府)가 생김으로써 품주가 담당하던 사무의 일부인 공부(貢賦)는 조부(調府)로 분리되었고, 진덕왕 5년에는 지출의 기능이 다시 창부(倉部)로 분리됨으로써 마침내 집사부로 성립하였다고 한다. 집사부의 성격은 위로는 왕명을 받들고 아래로는 여러 관부를 통제하는 임무를 가진 최고 관부로 보고, 장관인 중시를 수상(首相)이라 한 견해가 대표적이다.(이기백, 1974) 이밖에도 집사부를 오늘날의 총무처(總務處)에 비유하여 총무처 장관이라는 설(신형식, 1984), 고려의 중추원(中樞院)이나 조선의 승정원(承政院)에 비기어 기밀사무(機密事務), 왕명출납(王命出納), 서경(署經)을 담당했다는 설(이인철, 1993) 등이 있다. 대체로 집사부는 국왕의 측근에서 총무(總務), 비서기관(秘書機關), 외교(外交), 정책기획(政策企劃)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생각된다.(이영호, 1996)

집사부의 차관인 시랑(侍郞=전대등(典大等))의 관등은 『삼국사기』 직관지에 나마(奈麻)에서 아찬(阿湌)까지라 하였지만, 대부분 고위(高位)인 아찬(阿湌)이 임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신분은 대개 6두품으로 생각된다.(이기백, 1974)

한편, 병부(兵部)와 창부(倉部) 등의 차관도 시랑(侍郞)으로 불려졌다.

참고문헌

末松保和, 1954,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이기백, 197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
신형식, 1984,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일조각.
이인철, 1993, 『新羅政治制度史硏究』, 일지사.
이영호, 1996, 「新羅執事部의 設置와 中侍」『國史館論叢』69.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
眞德王
第二十八眞德女王 卽位自製太平歌 織錦爲紋 命使往唐獻之[一本 命春秋公爲使 往仍請兵 太宗嘉之 許蘇<定>方云云者 皆謬矣 <顯>慶前春秋已登位 <顯>慶庚申非太宗 乃高宗之世 定方之來在<顯>慶庚申 故知織錦爲紋 非請兵時也 在眞德之世 當矣 盖請放金欽純之時也] 唐帝嘉賞之 改封爲雞林國王 其詞曰 大唐開洪業 巍巍皇猷昌 止戈戎威定 修文契百王 統天崇雨施 理物體含章 深仁諧日月 撫軍邁虞唐 幡旗何赫赫 錚鼓何鍠鍠 外夷違命者 剪覆被天殃 淳風疑幽現 遐邇競呈祥 四時和玉燭 七曜巡方方 維嶽降輔宰 維帝任忠良 五三成一德 昭我唐家皇 王之代有閼川公林宗公述宗公<武>林公[慈藏之父]廉長公庾信公 會于南山于知巖議國事 時有大虎走入座間 諸公驚起 而閼川公略不移動 談笑自若 捉虎尾 撲於地而殺之 閼川公膂力如此 處於席首 然諸公皆服庾信之威 新羅有四靈地 將議大事 則大臣必會其地謀之 則其事必成 一<曰東>靑松山 二曰南于知山 三曰西皮田 四曰北金剛山 是王代 始行正旦禮 始行侍郞號
진덕왕(眞德王)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즉위하여 스스로 태평가를 짓고, 비단을 짜서 무늬를 놓아 사신을 시켜 당나라에 바쳤다.[어떤 책에 “춘추공을 사신으로 삼아, 가서 군사를 청하니 태종이 그것을 기뻐하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기로 허락했다”고 한 것은 모두 잘못이다. 현경(顯慶) 전에 춘추는 이미 왕위에 올랐고, 현경 경신년(660)은 태종이 아니라 고종 때이며, 소정방이 온 것은 현경 경신년이다. 그러므로 비단을 짜서 무늬를 수놓아 보낸 것은 청병 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진덕왕의 재위 때인 것이 마땅하니, 대개 김흠순을 놓아 돌려보내기를 청하던 때였다.] 당나라 황제는 이를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고 계림국왕(雞林國王)으로 고쳐 봉하였다. 그 가사는 이렇다. “대당(大唐)이 왕업을 개창하니, 어마어마한 황제의 계책이 창성하도다. 전쟁이 그치니 군사(戎衣)는 안정되고, 문치를 닦으니 모든 왕이 뒤를 이었네. 하늘을 통령하매 고귀한 비가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니 모든 체모 광채가 나네. 깊은 인덕은 해와 달과 같아, 운수를 다스림이 우당(虞唐)보다 앞서네. 번(幡)과 기(旗)는 어찌 그리 빛나며, 징소리와 북소리는 어찌 그리 웅장한가. 외이(外夷)로서 황제의 명을 어긴 자는, 뒤집히고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 순후한 풍속이 곳곳에 퍼지니,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祥瑞)를 바치네. 사시(四時)가 옥촉(玉燭)과 같고, 칠요(七曜)의 광명은 만방에 비치네. 산악의 정기는 재상을 내려, 황제는 충량(忠良)한 이에게 일을 맡겼네. 오제(五帝) 삼황(三皇)이 하나로 이룩되니, 우리 당나라 황제를 밝게 빛내리.” 왕의 시대에 알천공․임종공․술종공․무림공(자장(慈藏)의 아버지)․염장공․유신공이 있었는데, 이들은 남산 우지암에 모여서 국사(國事)를 의논했다. 이때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좌중에 뛰어들어 여러 공들이 놀라 일어났으나, 알천공은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를 하면서 호랑이의 꼬리를 붙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와 같았으므로 수석(首席)에 앉았으나 여러 공들은 모두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하였다. 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스런 땅이 있어서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대신들이 반드시 그곳에 모여서 의논하면 그 일이 꼭 이루어졌다.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 둘째는 남쪽의 우지산, 셋째는 서쪽의 피전이고,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이다. 이 왕 때 비로소 설날 아침의 조례를 행했고, 또 시랑(侍郞)이란 칭호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