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무왕릉

전무왕릉

분류 문학 > 국가 > 백제

기본정보

지정명 : 익산쌍릉(益山雙陵)
지정번호 : 사적 제87호
위치 :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 산55, 산56

일반정보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는 두 기의 고분으로 백제 말기 형식의 횡혈식석식분이다. 대왕묘(大王墓)·소왕묘(小王墓)로 불리는 두 고분은 백제의 제30대왕인 무왕(武王)과 무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전무왕릉 본문 이미지 1

전문정보

익산쌍릉이라는 이름은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두 기의 고분이 남북으로 위치하여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무덤의 봉분과 돌방의 크기가 큰 북쪽의 고분을 대왕묘(大王墓), 이 보다 작은 남쪽의 고분을 소왕묘(小王墓)라고 한다. 익산쌍릉에 대한 조사는 1917년 일본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구조적 측면에서 왕족의 능묘라고 추정되었다. 두 능은 백제의 웅진과 사비시대 지배층의 대표적인 묘제인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으로, 벽체 상단에 고임석을 올린 고임식이며 천정은 평천정(平天井)이다.

이러한 형식은 사비시대 백제 왕족의 고분들로 추정되는 부여의 능산리고분군에서도 확인되며, 6세기 중후반경에 나타나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비록 익산쌍릉과 동일한 형식의 고분이 멀리는 영산강 유역에서도 발견되기는 하지만 능산리고분군의 묘제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왕릉급으로 판단할 근거가 된다. 또한 크기도 왕릉급으로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익산쌍릉의 대왕묘는 봉토의 직경이 30m이며 묘실은 길이 380cm, 너비 178cm, 높이 227cm이다. 소왕묘는 봉토의 직경이 24m이며 묘실은 길이 320cm, 너비 130cm, 높이170cm이다. 이 같은 규모는 능산리 고분군 중에서 대형급에 속하는 6호분(동상총)이나 2호(중하총)보다도 큰 것으로 유구 자체로는 익산쌍릉이 왕릉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만 왜 왕릉이 도읍지인 사비가 아닌 익산에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지만, 백제의 제30대왕인 무왕(武王)이 익산과 깊은 관련이 있는 점을 고려하면 이 또한 이해할 여지가 있다.(이남석, 2001)

익산쌍릉이 고고학적으로 왕릉일 가능성이 크지만, 두 능이 왕릉이라는 주장은 이미『고려사(高麗史)』에 나타나 있다. 즉,『고려사』권57 지11 지리2 전라도조 금마군(金馬郡) 기사에는 “후조선(後朝鮮)의 무강왕(武康王)과 그의 비(妃)의 능이 있다(又有後朝鮮武康王及妃陵)”고 되어 있으며, 그 주석에는 “속칭 말통대왕릉으로 백제 무왕의 아명이 서동이었다고도 한다(俗號末通大王陵 一云百濟武王 小名著童)”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신증동국여지승람』권33 전라도 익산군 고적조에는 “쌍릉(雙陵)”을 제시하고 주석하기를 “오금사(五金寺) 봉우리의 서쪽 수백 보 되는 곳에 있다.『고려사』에는 후조선(後朝鮮) 무강왕(武康王) 및 비(妃)의 능이라 하였다. 속칭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라 한다. 일설에 백제 무왕(武王)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薯童)인데, 말통(末通)은 즉 서동(薯童)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고 하여 쌍릉이 무왕과 왕비의 능임을 시사하고 있다.

고고학이나 문헌학을 근거로 볼때 익산 쌍릉이 왕릉일 가능성이 높으며, 학자에 따라 “무왕릉”과 “무왕비릉”으로 부르기도 한다. 익산쌍릉은 1917년 발견때 이미 도굴된 상태이어서 부장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당시 대왕묘에서 출토된 유물은 목관(木棺)과 옥제장신구 그리고 치아(齒牙) 3점 등이었고, 소왕묘에서는 못과 도금관식금교구(鍍金棺飾金鉸具) 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목관은 복원이 가능할 정도로 양호하였는데 사용된 목재가 능산리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것으로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다. 또한 도금관식금교구의 문양 역시 일본 호류사(法隆寺)의 옥충주자(玉蟲廚子)에 사용된 것과 일치하여 당시 백제와 일본의 교류를 알려주는 자료로 이해된다. (최완규, 2001)

참고문헌

최완규, 2001, 「益山地域의 百濟古墳과 武王陵」『百濟硏究』15집.
이남석, 2001, 「百濟古墳과 益山 雙陵」『백제묘제의 연구』, 서경.

관련원문 및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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