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

사비

분류 문학 > 국가 > 백제

기본정보

사비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 성왕 16년(538)에 웅진에서 천도하였다. 소부리(所夫里)라고도 하며, 지금의 부여이다.

일반정보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泗沘)는 지금의 부여로『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는 소부리(所夫里)라는 별칭이 기록되어 있다. 동성왕대부터 사비천도 계획이 수립된 이후에 왕권과 국력 회복을 배경으로 성왕 16년(538)에 천도가 이루어졌다.

사비 본문 이미지 1

전문정보

사비(泗沘)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 지금의 부여(扶餘)이다.『삼국사기』권26 백제본기4 성왕 16년(538)조에는 도읍을 사비로 옮겼는데 다른 이름은 소부리(所夫里)라 하였다.『삼국유사』권2 기이2 남부여․전백제조에 인용된『고전기(古典記)』에도 도읍을 소부리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수서』권81 열전46 백제전과『북사』권94 열전82 백제전에는 백제의 도읍이 거발성(居拔城)이라고 되어 있는데 역시 사비성(泗沘城)의 다른 이름으로 이해된다.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려는 계획은 사료에는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미 동성왕 때부터 시도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삼국사기』권26 백제본기4 동성왕조에 따르면 왕이 재위12년(490)과 23년(501)에 사비로 사냥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때의 사냥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천도를 위한 탐색과정이었다.(노중국, 1988) 그런데 동성왕이 백가(苩加)에 의해 살해되자 사비천도 계획은 중단되었고, 성왕의 아버지인 무령왕은 왕권의 안정과 국력의 부흥에 힘썼다.

성왕이 사비천도를 다시 추진하여 뜻을 이루게 된 것은 백제가 동성왕․무령왕을 거치면서 웅진천도 이후의 불안한 사회상황을 극복하고 국력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왕권과 국력을 더욱 확충하기 위해 좁은 웅진을 벗어나 넓은 평야을 끼고 있는 사비로 천도하였던 것이다.(천관우, 1989) 성왕이 사비로 천도할 수 있었던 보다 더 직접적인 이유로는 웅진시대에 일어난 왕의 피살과 반란 등의 내분을 수습하고 세력개편을 통한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이때 사비 지역의 토착세력으로 보이는 사씨(沙氏) 세력의 긴밀한 협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분열, 성왕의 가야진출 성공도 천도를 추진하는 배경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김주성, 1995)

백제의 새 도읍지가 된 사비에는 궁궐과 관부가 마련되었다. 사비의 도성은 부소산성(扶蘇山城)과 연결되는 나성(羅城)으로 둘러싸였다. 왕궁은 부소산성 밑에 있었던 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주서』권49 열전41 백제전에 따르면 이 나성 안에는 1만 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상부․중부․하부․전부․후부의 5부(部)로 도성이 구획되었다. 5부에는 각각 500명의 군대가 있었고 5부는 다시 5항(巷)으로 나뉘어졌다. 백제가 멸망한 후 신라 문무왕은 재위11년(671)에 사비를 소부리주(所夫里州)라 하였고, 신문왕은 재위6년(686)에 주를 군(郡)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경덕왕이 재위16년(757)에 부여군으로 고치고 웅주(熊州)에 속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노중국, 1988,『百濟 政治史硏究』, 일조각.
천관우, 1989,『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양기석, 1995, 「백제의 변천-웅진천도와 중흥」『한국사』6, 국사편찬위원회.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十六 聖王 [名明穠 <武>寧子 癸<卯>立 理三十一年] 戊午 [移都泗<沘> 稱南扶余]
제26대 성왕[이름은 명농으로 무령왕의 아들이다. 계묘년에 즉위하여 31년간 다스렸다.] 무오년[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남부여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