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지

아비지

분류 문학 > 국가 > 백제

기본정보

신라의 황룡사 구층탑을 세운 백제의 공장(工匠)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아비지(阿非知)는 신라의 황룡사 구층탑을 세운 백제의 공장(工匠)이다. “지(知)”를 이름 뒤에 경칭(敬稱)으로 붙이는 신라의 이름 표기법으로 보고, 본이름을 “아비(阿非)”라고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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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원형백과

전문정보

아비지(阿非知)는 신라의 황룡사 구층탑을 세운 백제 공장(工匠)이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조에 의하면 신라 선덕왕(善德王)은 당나라에서 유학한 뒤 선덕왕 12년(643)에 귀국한 자장(慈藏)의 건의에 따라 황룡사(皇龍寺)에 목조 9층탑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이에 백제(百濟)에 공장(工匠)을 청하니 아비지(阿非知)가 발탁되어 신라로 왔다. 아비지는 소장(小匠) 200인을 거느리고 탑 건립 공사에 임하였는데, 아비지가 찰주(刹柱)를 세울 때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고 공사를 중단하려 하였으나, 갑자기 나타난 늙은 승려와 장사(壯士)가 절 기둥을 세우는 것을 보고 백제의 운이 다하였음을 깨달아 공사를 계속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에서도 “대장□제□비등(大匠□濟□非等)”이 소장(小匠) 200인을 거느리고 이 탑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결자(缺字)는 “백(百)”과 “아(阿)”로 파악되며(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84), 곧 대장(大匠) 백제(百濟) 아비(阿非) 등이 탑을 조성하였다는, 『삼국유사』와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장(大匠)”이라고 표현된 점으로 보아 아비지는 당시 백제에서 최고 수준의 기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노중국, 2000)

다만 『삼국유사』에서는 이름을 “아비지(阿非知)”,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에서는 “아비(阿非)”라고 전하는 점은 다른데, 여기서 “지(知)”는 신라의 이름 표기법으로 이름 뒤에 붙는 경칭(敬稱)이다. 따라서 백제에서 온 장인(匠人)의 본이름은 “아비(阿非)”였다고 볼 수 있다.(村上四男, 1994)

백제 출신의 아비지(阿非知)가 신라의 황룡사 구층탑 창건에 관여하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가 있어왔다. 첫째, 건탑(建塔) 기술자 파견 요청을 매개로 백제의 군사적 압박을 완충시켜 보려는 신라의 외교적 의도로 보는 견해가 있다. 구층탑이 건립되기 시작하는 643년을 전후한 이 시기 신라는 대야성(大耶城)과 당항성(黨項城)을 공격받는 등 군사적 압박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하였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백제에 사신을 보내 공장(工匠)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데, 이것은 백제의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서 신라가 문화적 교류라는 방편으로 백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는 신라의 이러한 접근을 수용하여 공장(工匠)을 보낸 것으로, 군사적 충돌과 정치적 긴장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하더라도 문화적 접촉은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노중국, 2000)

둘째, 신라의 건축기술과 관련하여 보는 연구도 있다. 먼저 황룡사 구층탑을 신라 최초의 목탑으로 파악하고, 신라가 고층목탑을 건립할 능력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백제에 조탑술(造塔術)을 요청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권종남, 1998)

그러나 황룡사 구층탑 창건 이전에 신라에 목탑이 없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황룡사 구층탑 창건 이전인 선덕왕(善德王) 3년(634)에 이미 창건된 분황사(芬皇寺) 금당의 기단축조방식은 황룡사 목탑과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라는, 이미 가지고 있는 자체의 기술로 기단을 축조하고 뒤이어 목탑 조영을 시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층목조건축을 조성할 수 있는 기술력 부족으로 기단축조 과정에서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하고, 아비지를 초빙해서야 구층 높이까지 올릴 수 있었다고 파악할 수 있다. 즉 아비지가 황룡사 구층탑 창건에서 누층(累層)으로 올라가는 탑신(塔身) 부분 공사를 담당했다고 보는 것인데, 이러한 정황은 『삼국유사』에서 아비지가 찰주(刹柱) 세울 때 갈등을 느끼다가 갑자기 나타난 늙은 승려와 장사(壯士)가 절 기둥을 세우는 것을 보고 비로소 탑을 완성하였다는 언급에서도 엿볼 수 있다고 하였다.(양정석, 2004)

참고문헌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84, 『皇龍寺 遺蹟發掘調査報告書』Ι,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村上四男, 1994, 『三國遺事考証』下之一, 塙書房.
권종남, 1998, 「皇龍寺 木塔의 建築制度」『皇龍寺의 綜合的 考察』(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 論文集 22).
노중국, 2000, 「新羅와 百濟의 交涉과 交流-6~7세기를 중심으로」『新羅文化』16·17合.
양정석, 2004, 「구층목탑의 조성과 중건가람」『皇龍寺의 造營과 王權』, 서경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
皇龍寺九層塔
新羅第二十七善德王卽位五年 貞觀十年丙申 慈藏法師西學 乃於五臺 感文殊授法[詳見本傳] 文殊又云 汝國王是天竺刹利種王 預受佛記 故別有因緣 不同東夷共工之族 然以山川崎嶮 故人性麤悖 多信邪見 而時或天神降禍 然有多聞比丘 在於國中 是以君臣安泰 萬庶和平矣 言已不現 藏知是大聖變化 泣血而退 經由中國太和池邊 忽有神人出問 胡爲至此 藏答曰 求菩提故 神人禮拜 又問 汝國有何留難 藏曰 我國北連靺鞨 南接倭人 麗濟二國 迭犯封陲 隣寇縱橫 是爲民梗 神人云 今汝國 以女爲王 有德而無威 故隣國謀之 宜速歸本國 藏問 歸鄕 將何爲利益乎 神曰 皇龍寺護法龍 是吾長子 受梵王之命 來護是寺 歸本國 成九層塔於寺中 隣國降伏 九韓來貢 王祚永安矣 建塔之後 設八關會 赦罪人 則外賊不能爲害 更爲我 於京畿南岸 置一精廬 共資予福 予亦報之德矣 言已 遂奉<玉>而獻之 忽隱不現[寺中記云 於終南山圓香禪師處 受建塔因由] 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 將唐帝所賜經像袈裟幣帛而還國 以建塔之事聞於上 善德王議於群臣 群臣曰 請工匠於百濟 然後方可 乃以寶帛 請於百濟 匠名阿非知 受命而來 經營木石 伊干龍春[一云龍樹]幹蠱率小匠二百人 初立刹柱之日 匠夢本國百濟滅亡之狀 匠乃心疑停手 忽大地震動 晦冥之中 有一老僧一壯士 自金殿門出 乃立其柱 僧與壯士 皆隱不現 匠於是改悔 畢成其塔 刹柱記云 鐵盤已上高四十二尺 已下一百八十三尺 慈藏以五臺所授舍利百粒 分安於柱中 幷通度寺戒壇 及太和寺塔 以副池龍之請[太和寺在阿曲縣南 今蔚州 亦藏師所創也] 樹塔之後 天地開泰 三韓爲一 豈非塔之靈蔭乎 後高麗王將謀伐羅 乃曰 新羅有三寶 不可犯也 何謂也 皇龍丈六 幷九層塔 與眞平王天賜玉帶 遂寢其謀 周有九鼎 楚人不敢北窺 此之類也 讚曰 鬼拱神扶壓帝京 輝煌金碧動飛甍 登臨何啻九韓伏 始覺乾坤特地平 又海東名賢安弘撰東都成立記云 新羅第二十七代 女王爲主 雖有道無威 九韓侵勞 若龍宮南皇龍寺 建九層塔 則隣國之災可鎭 第一層日本 第二層中華 第三層吳越 第四層托羅 第五層鷹遊 第六層靺鞨 第七層丹國 第八層女狄 第九層穢貊 又按國史及寺中古記 眞興王癸酉創寺後 善德王代貞觀十九年乙巳塔初成 三十二孝昭王卽位七年 聖曆元年戊戌六月 霹靂[寺中古記云 聖德王代 誤也 聖德王代 無戊戌] 第三十三聖德王代庚申歲重成 四十八景文王代戊子六月 第二霹靂 同代第三重修 至本朝光宗卽位五年癸丑十月 第三霹靂 <顯>宗十三年辛酉 第四重成 又靖宗二年乙亥 第四霹靂 又文宗甲辰年 第五重成 又<獻>宗末年乙亥 第五霹靂 肅宗丙子 第六重成 又高宗<二十五>年戊戌冬月 西山兵火 塔寺丈六殿宇皆災

황룡사구층탑
신라 제 27대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 즉위 5년인 정관(貞觀, 627-649) 10년 병신(636)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서쪽으로 유학하여 오대산(五臺山)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주는 법을 받아 감응하였다.[자세한 것은 「본전(本傳)」에 전한다.] 문수보살이 또 말하기를, “너희나라 왕은 천축(天竺) 찰리종족(刹利種族)의 왕인데 이미 부처님의 수기(授記)를 받았으므로 따로 인연이 있음이요, 동이(東夷) 공공(共工)의 종족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산천이 험준한 까닭에 사람의 성품이 거칠고 잘못된 견해를 많이 믿어 때로는 천신(天神)이 재앙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법문(法文)을 많이 들어 아는 승려가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君臣)이 편안하고 만민(萬民)이 화평한 것이다.”하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사라졌다. 자장(慈藏)은 이것이 바로 대성(大聖)이 변화한 것임을 알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다. (법사가) 중국의 태화지(太和池) 가를 지나는데 문득 신령스러운 사람이 나와서 묻기를,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는가?”라고 하니 자장(慈藏)이 대답하기를, “보리(깨달음)를 구하려고 합니다.”고 하였다. 신령스러운 사람이 절을 하고 또 묻기를, “그대 나라에 무슨 어려움이 있는가?”라고 하니 자장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靺鞨)과 이어졌고 남으로는 왜인(倭人)과 접해있으며, 또 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 두 나라가 번갈아 변경을 침범하는 등 이웃의 적들이 어지러우니 이것이 백성들의 걱정입니다.”고 하였다. 신령스러운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으니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다. 이 까닭에 이웃 나라가 침략을 도모하고자 하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자장(慈藏)이 묻기를, “고국에 돌아가면 장차 무엇을 하면 이익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신령스러운 사람이 말하기를, “황룡사(皇龍寺) 호법룡(護法龍)은 나의 맏아들이다. 범왕(梵王)의 명을 받고 이 절에 와서 호위하고 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서 절 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하고 9한(九韓)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편안해 질 것이다. 탑을 세운 후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사면하면 외적이 침해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나를 위하여 경기(京畿) 남쪽 가에 정사(精舍)를 지어 나의 복을 함께 빌어주면 나 역시 그 은덕을 갚겠다.”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마자 옥을 바치고는 홀연히 형체를 숨겨 나타나지 않았다.[절 기록에는 종남산(終南山) 원향(圓香) 선사의 처소에서 탑 세울 까닭을 받았다고 한다.] 정관 17년 계묘(643) 16일에 (자장은)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불상·가사·폐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 세울 일을 왕에게 아뢰니, 선덕왕(善德王)이 신하들과 의논하였다. 신하들이 말하기를, “백제로부터 공장(工匠)을 청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보물과 비단으로써 백제에 (공장을) 청하였다. 아비지(阿非知)라는 장인이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고, 이간(伊干) 용춘(龍春)[용수(龍樹)라고도 한다.]이 일을 주관하여 소장(小匠) 2백명을 인솔하였다. 처음 찰주(刹柱)를 세우는 날에 공장(工匠)은 꿈에서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형상을 보았다. 공장(工匠)은 마음 속으로 의심이 나서 일손을 멈추었더니, 홀연히 대지가 진동하고 컴컴해지는 가운데 늙은 승려 한 명과 장사(壯士) 한 명이 금당 문으로부터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승려와 장사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공장은 이에 뉘우치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찰주기(刹柱記)」에서는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는 42척이고, 그 이하는 1백 83척이다.”라고 하였다. 자장(慈藏)이 오대산(五臺山)에서 얻은 사리 백 낱을 그(황룡사구층탑) 기둥 속과 아울러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과 태화사(太和寺) 탑에 나누어 모셨으니, 이로써 못에 있는 용의 청에 부합하였다.[태화사는 아곡현(阿曲縣) 남쪽에 있는데 지금의 울주(蔚州)이니 역시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세운 것이다.] 탑을 세운 후 천지가 태평해지고 삼한(三韓)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이 후에 고려(고구려) 왕이 신라를 치려다가 말하기를, “신라에는 삼보가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황룡사의 장육존상과 9층탑과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의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이름이니, 드디어 그 모략을 중지하였다. 주(周)나라에 9정(九鼎)이 있어서 초(楚)나라 사람이 감히 북방을 엿보지 못하였다고 하니 이와 같은 것이다. 찬한다. “귀신이 부축한 듯 서울을 막아 지키니, 휘황한 금색과 푸른색의 대마루는 날아갈 듯, 올라서 굽어볼 제 9한(九韓)만 항복하랴, 천하라도 평정할 것을 이제야 알겠네.” 또 해동(海東)의 명현(名賢) 안홍(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신라 제 27대에는 여왕이 임금이 되었는데 비록 도리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9한(九韓)이 침노하였다. 만약 용궁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의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니 제1층은 일본(日本)이요, 제2층은 중화(中華)요, 제3층은 오월(吳越)이요, 제4층은 탁라(托羅)요, 제5층은 응유(鷹遊)요, 제6층은 말갈(靺鞨)이요, 제7층은 단국(丹國)이요, 제8층은 여적(女狄)이요, 제9층은 예맥(穢貊)이다.”라고 하였다. 또 『국사(國史)』와 절의 고기(古記)를 살펴보면,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계유(553)에 절을 세운 후 선덕왕(善德王) 대인 정관 19년 을사(645)에 탑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제 32대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2) 즉위 7년 성력(聖曆) 원년 무술(698) 6월에 벼락을 맞아[절의 고기에서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때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성덕왕 때는 무술년이 없다.] 제 33대 성덕왕 때의 경신년(720)에 다시 탑을 수축하였으며, 제 48대 경문왕(景文王, 재위 742-765) 때인 무자(868)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아 그 임금 때에 세 번째로 다시 수축하였다. 본조(本朝, 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 즉위 5년 계축(953) 10월에 세 번째 벼락을 맞아 현종(顯宗, 재위 1009-1031) 13년 신유(1021)에 네 번째로 다시 수축하였으며, 또 정종(靖宗, 재위 1034-1046) 2년 을해(1035)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아 문종(文宗, 재위 1046-1083) 갑진년(1064)에 다섯 번째로 다시 수축하였다. 또 헌종(獻宗, 재위 1094-1095) 말년 을해(1095)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아 숙종(肅宗, 재위 1095-1105) 병자(1096)에 여섯 번째로 다시 수축하였으며, 또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25년(1238) 무술 겨울에 서산(西山)의 병화(兵火, 몽고의 침입)로 탑과 장육존상과 절의 전각들이 모두 타버렸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