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륜사

흥륜사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 최초의 절.

지정명: 경주흥륜사지
지정번호: 사적 제15호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사정동 281-1번지

일반정보

신라 최초의 절로써 『삼국유사』 기이 미추왕 죽엽군조에 따르면 미추왕릉의 서쪽에 위치한 절이라 전한다. 이외에도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阿道基羅)조에 따르면, 흥륜사는 아도(阿道)가 창건한 절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중간에 폐지되어 법흥왕 14년(527)에 이르러 창건되었고, 법흥왕 22년(535)에 크게 공사를 벌여 진흥왕 5년(544)에 완성되었다. 금당에는 신라 10성(聖)의 소상이 있었다고 전하며, 금당의 좌우에는 행랑이 있고 남문과 탑, 좌경루 등의 당탑이 있었으나 신라 말에 없어졌다. 절터에 남아있던 석조는 경주 최대의 규모이며, 발굴하여 수습된 얼굴무늬 기와 등은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 사적 제15호로 지적되어 있다.

전문정보

흥륜사는 신라 최초의 절로써 『삼국유사』 권1 기이1 미추왕 죽엽군(未鄒王 竹葉軍)조에 는 “제13대 미추니질금은 … 왕위에 오른 지 23년만에 죽었으며, 능은 흥륜사의 동쪽에 있다.”라 하여 흥륜사를 기준으로 미추왕릉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 흥륜사의 창건배경에 대해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阿道基羅)조에서는 「아도본비(我道本碑)」를 인용하여 아도에 의한 흥륜사 창건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 승려인 아도(我道)가 미추왕 3년(264) 성국공주(成國公主)의 병을 고쳐 주었는데, 그 보상으로 왕이 절의 건립을 허락하여 흥륜사가 세워졌다고 한다. 이때는 절의 규모가 매우 작았으며, 왕이 죽자 절은 폐허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외에도 『삼국유사』권3 흥법3 원종흥법 염촉멸신(原宗興法 厭髑滅身)조에 따르면 흥륜사는 폐허가 된 후 법흥왕 14년(527)에 다시 터를 잡고 22년(535)에 공사를 시작하여 진흥왕 5년(544)에 완성하여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 당시 흥륜사의 모습은 『삼국유사』 곳곳의 기록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도화녀 비형랑(桃花女 鼻荊郞)조에 의하면 흥륜사 남문의 이름은 길달문(吉達門)이라 불렸는데, 진평왕 때 비형랑의 무리 가운데 길달이라는 귀신이 만든 데서 유래된 명칭이라 한다. 또 『삼국유사』 권3 흥법3 동경흥륜사금당십성(東京興輪寺金堂十聖)조에는 흥륜사에 신라 당시의 유명한 스님인 신라 10성(聖)의 소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외에도 『삼국유사』 권3 탑상4 흥륜사벽화보현(興輪寺壁畵普賢)조에 의하면 경명왕 5년(921) 정화와 홍계라는 두 스님이 불에 탄 흥륜사를 다시 고치려 하였는데 제석(帝釋)이 절에 내려와 열흘을 머물었으며, 절에 향기가 가득하고 오색구름이 뒤덮자 사람들이 옥과 비단 등을 바치고, 기술자들이 스스로 와서 며칠만에 수리를 끝마쳤다고 한다. 이 때 수리하면서 정화와 홍계가 금당의 벽에 금색으로 보현보살상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또한 『삼국유사』 권5 신주6 밀본최사(密本摧邪)조에 의하면, 흥륜사 금당에는 선덕여왕 때 승상이었던 김양도(金良圖, ?-670)가 조성한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흥륜사 창건시기에 대해 『삼국유사』는 아도가 미추왕 3년(264)에 창건하였다고 그 시기를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아도가 흥륜사를 지은 것이 264년이라면, 그것은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372년보다 백 년 이상 앞서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이 되어 논리에 맞지 않는다. 이로 인해 신라의 불교전래는 372년 이후 눌지왕대(417-458)라고 보고, 흥륜사의 창건연대 역시 눌지왕 이후 5세기 중엽이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한국불교연구원, 1974)

한편 흥륜사의 완공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의 설을 따라 진흥왕 5년(544)에 완공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1976; 이기백, 1986) 이외에 『삼국유사』의 내용에 비중을 두어 법흥왕이 14년(527)에 사신(捨身)을 한 것이 신하들에게 문제가 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이차돈사건이 일어났고, 이차돈 사건은 흥륜사 창건과 관련하여 처벌을 받은 것이므로 시간적으로 창사(創寺) 뒤의 일에 속하기 때문에, 흥륜사는 법흥왕 22년(535)에 마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신종원, 1992)

흥륜사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그간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져 왔다. 그동안 흥륜사의 위치는 경주시 사정동 국당리 일원을 경주 사람들이 흥복원(興福員)․흥륜원(興輪員)․흥륜들로 부른 까닭에 별다른 의심 없이 흥륜들 내의 절터를 흥륜사지로 인식하였다.(한국불교연구원, 1974)

그런데 1977년 이곳에서 영묘사명 와당이 수습되면서 흥륜사 위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로 인해 흥륜사로 전해오던 곳이 선덕여왕 때 처음 건립한 영묘사(靈廟寺)의 터이며, 흥륜사는 현재 경주공업고등학교부지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미추왕 죽엽군조에 나오는 흥륜사 위치와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조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흥륜사의 서쪽에는 서천상의 교량인 금교가 있으며, 반대편인 흥륜사 동쪽에는 미추왕릉이 있다. 즉, 흥륜사는 서천의 금교와 미추왕릉 사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전 미추왕릉(傳 味鄒王陵)은 경주시 황남동의 대릉원 내에 전해오고 있으나, 금교 유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현재 경주공업고등학교는 미추왕릉의 서쪽에 위치해 있어 이를 흥륜사의 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주부 고적조에 흥륜사는 경주부 남쪽 2리에 있다는 기록을 통해 더욱더 뒷받침된다. 경주부와 경주 남쪽에서 확인되는 절터를 중심으로 직선거리를 확인해보면, 경주공업고등학교까지가 2리에 가장 가깝다. 또한 『호산록(湖山錄)』 권4 흥륜사대종명병서(興輪寺大鐘銘幷序)에 의하면 흥륜사는 1244년 이전에 오랑캐에 의해 불타버린 절터에 다시 불당을 세우고 범종을 주조하였다고 하는데, 경주공업고등학교부지 서남쪽 모서리를 발굴한 결과 통일신라시대 와당과 함께 고려시대 건물지가 노출됨으로서 가능성이 재확인되었다.(이근직, 2002)

이러한 흥륜사의 역사적 의의는 몇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흥륜사가 신라 최초의 사찰인만큼 전통의 무교가 불교적 요소들에 혼효(混淆)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삼국유사』 권1 기이1 도화녀 비형랑(桃花女 鼻荊郞)조의 흥륜사의 남문인 길달문의 존재에서 알 수 있다고 한다. 불교 공인 이후 화랑은 무․불이 함께 한 단체였는데, 이 사건은 무속이 점차 불교에 예속되어 간 사건이라고 본 것이다.(김복순, 2002)

둘째, 흥륜사는 신라 최초의 사찰로서 사격(寺格)이 국찰로서 전 시기동안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흥륜사에서 행해진 탑돌이 행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삼국유사』 권4 감통7 김현감호(金現感虎)조에 의하면 왕경의 신라인들은 2월 8일부터 15일까지 흥륜사의 전탑을 다투어 도는 것을 복회(福會)로 삼았다고 전한다. 신라의 연등행사가 흥륜사에서는 일주일동안 밤새도록 탑돌이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찰에 밤새도록 등을 밝혀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외에도 흥륜사는 아도화상 이래 진지왕대의 진자사(眞慈師), 선덕왕 대의 밀본법사(密本法師), 신문왕 대의 개사 점개(開士 漸開), 헌덕왕 대의 영수선사(永秀禪師) 등 유명한 승들이 주석(主席)함으로써 국찰(國刹)로서의 면모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다.(김복순, 2002)

참고문헌

한국불교연구원, 1974, 『新羅의 廢寺』Ⅰ, 일지사.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이기백, 1986, 『新羅思想史硏究』, 일조각.
신종원, 1992, 『新羅初期佛敎史硏究』, 민족사.
김복순, 2002, 「興輪寺와 七處 伽藍」『新羅文化』 20.
이근직, 2002, 「신라 흥륜사 위치관련 기사 검토」『新羅文化』 20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미추왕 죽엽군)
未鄒王 竹葉軍
第十三未鄒尼叱今[一作未祖 又未古] 金閼智七世孫 赫世紫纓 仍有聖德 受禪于理解 始登王位[今俗稱王之陵爲始祖堂 蓋以金<氏>始登王位故 後代金氏諸王 皆以未鄒爲始祖 宜矣] 在位二十三年而崩 陵在興輪寺東 第十四儒理王代 伊西國人 來攻金城 我大擧防禦 久不能抗 忽有異兵來助 皆珥竹葉 與我軍幷力 擊賊破之 軍退後不知所歸 但見竹葉積於未鄒陵前 乃知先王陰騭有功 因呼竹現陵 越三十七世惠恭王代 大曆十四年己未四月 忽有旋風 從庾信公塚起 中有一人乘駿馬 如將軍儀狀 亦有衣甲器仗者四十許人 隨從而來 入於竹現陵 俄而陵中似有振動哭泣聲 或如告訴之音 其言曰 臣平生 有輔時救難匡合之功 今爲魂魄 鎭護邦國 攘災救患之心 暫無渝改 往者庚戌年 臣之子孫 無罪被誅 君臣不念我之功烈 臣欲遠移他所 不復勞勤 願王允之 王答曰 惟我與公 不護此邦 其如民庶何 公復努力如前 三請三不許 旋風乃還 王聞之懼 乃遣<上>臣金敬信 就金公陵謝過焉 爲公立功德寶田三十結于鷲仙寺 以資冥福 寺乃金公討平壤後 植福所置故也 非未鄒之靈 無以遏金公之怒 王之護國 不爲不大矣 是以邦人懷德 與三山同祀而不墜 躋秩于五陵之上 稱大廟云
미추왕 죽엽군
제13대 미추니질금[또는 미조(未祖), 또는 미고(未古)라고도 한다.]은 김알지(金閼智)의 7대손이다. 누대에 높은 귀족으로서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이해니질금(理解尼叱今)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비로소 즉위하였다.[지금 세간에서 왕의 능을 시조당(始祖堂)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 김씨로서 처음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후대의 모든 김씨 왕들이 미추를 시조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 재위 23년만에 죽었는데, 능은 흥륜사(興輪寺) 동쪽에 있다. 제14대 유리왕 때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공격해왔다. 우리는 크게 군사를 동원하여 막았으나 오랫동안 저항할 수 없었다. 갑자기 이상한 군사가 와서 도와주었는데, 모두 대나무 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힘을 합쳐 적군을 격파했으나, 군사가 물러간 후에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대나무 잎이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선왕이 음덕의 공로인 것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그 능을 죽현릉(竹現陵)이라고 불렀다. 먼 뒷날 제37대 혜공왕(惠恭王) 대력(大曆) 14년 기미(779) 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유신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한 사람은 준마를 탔는데 그 모양이 장군과 같았고, 또한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40여명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와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능 속에서 마치 진동하며 우는 소리가 나는 듯하고, 혹은 호소하는 듯한 소리같기도 하였다. 그 말은 이러했다. “신은 평생 정치를 돕고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며 삼국을 통일한 공을 세웠습니다. 지금은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수호하며, 재앙을 물리치고 환란을 구제하려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고 임금과 신하들이 저의 공적을 생각해 주지 않으니, 신은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해 애쓰지 않겠사오니 원하건데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 왕이 대답했다. “오직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을 어떻게 하겠소. 공은 다시 이전처럼 힘써 주시오.” 김유신이 세 번을 청해도 왕은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바람은 이에 돌아갔다. 왕(혜공왕)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이내 상신(上臣) 김경신(金敬臣)을 보내 김공의 능에 가서 사과하고, 공을 위하여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結)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려 공의 명복을 빌게 했다. 이 절은 김공이 평양을 친 후에 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미추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이니, 왕이 나라를 수호함이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생각하여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지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서열을 오릉(五陵)의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