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례

혈례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시대 경주에 있었던 산

일반정보

혈례(穴禮)는 나림(奈林, 나력), 골화(骨火)와 함께 신라 산천제사 중 대사(大祀)의 제장이었다. 『삼국유사』 기이편의 김유신조에 따르면 김유신이 국선(國仙)이었을 때, 나림(奈林), 혈례(穴禮), 골화(骨火) 등 세 곳의 호국신(護國神)이 그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고 한다. 혈례산은 경북 청도의 오리산, 경북 경주시 건천읍의 단석산, 경주시 안강읍 북부와 영일군 기계면 남부의 경계에 위치한 어래산 등에 비정된 바 있다.

전문정보

혈례(穴禮)는 나림(奈林, 또는 나력), 골화(骨火)와 함께 신라의 호국신(護國神)이 있던 산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유신조에 따르면 김유신이 국선이었을 때 고구려의 첩자인 백석(白石)의 꾐에 넘어가 고구려의 정세를 염탐하려고 백석과 함께 고구려로 향했는데, 도중에 나림(奈林), 혈례(穴禮), 골화(骨火) 등 세 곳의 호국신(護國神)을 만나 백석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혈례는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조의 대사(大祀) 기록에도 보이는데, 여기서는 혈례가 대성군(大城郡)에 있다고 하였다.

혈례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 이유는 혈례산이 있었다고 하는 대성군(大城郡)의 위치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일찍이 조선 후기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동사강목(東史綱目)』 제5상 선덕왕(宣德王) 4년(783)조에서 “혈례산은 대성군에 있는데 지금의 청도(淸道)이다(穴禮山 在大城郡 今淸道)”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는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신라 양주 대성군조에서 대성군은 본래 구도성(仇刀城) 경역 안의 솔이산성(率伊山城), 가산현(茄山縣), 오도산성(烏刀山城) 등 세 성이었으며,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는 청도군에 합쳐져 속했다는 내용에 근거한 것이다.

청도설은 근세에도 받아들여져서, 경남 밀양시 상동면의 유천역(楡川驛, 옛 청도지방) 동북쪽에 있는 부산(鳧山, 속칭 오리산)이 혈례산일 것이라고 추측된 바 있다. 이는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양주 밀성군(密城郡)조에 보이는 오야산현(烏也山縣),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6 청도군 건치연혁조에 보이는 오례산(烏禮山), 같은 책 청도군 고적조에 보이는 오혜산(烏惠山) 등을 모두 같은 곳으로 보고 혈례산→오례산→오혜산→오리산(鳧山)으로 그 음이 변했을 것으로 추정한 견해이다.(이병도, 1977)

한편 혈례산을 경주시 건천읍의 단석산(斷石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산천조에 전하는 단석산에 대한 속설에 근거한 것으로, 여기서는 김유신이 신검(神劍)을 구해 이곳에 들어와 검술을 연마했다고 하였다. 단석산에도 김유신과 관련된 설화가 전하고 있고, 혈례산 또한 김유신과 관련되어 『삼국유사』에 나타나고 있으므로 두 산을 연결시켜 보려고 했던 것이다. 또한 단석산은 신라 수도방위의 군사적 중요성을 가진 산이었고, 이곳에 있는 신선사 마애불상군은 신라 화랑과 미륵신앙과의 관계를 추측해볼 수 있는 근거가 되므로 혈례산을 단석산으로 비정해 볼 수 있다고 하였다.(김상기, 1969)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혈례산을 경북 경주시 안강읍 북부와 영일군 기계면 남부의 경계에 위치한 어래산(魚來山)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우선 혈례산은 신라 국도(國都) 주위의 3개 수호신산 중에 하나였으므로 그 위치는 지금의 경주 일대에서 찾아야 하는데, 이 일대에서 혈례산과 발음이 비슷한 곳으로 어래산을 주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래산은 얼레빗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속칭 “얼레산”이라고도 하므로, 혈례산→열례산→얼레산→어래산으로 명칭이 변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였다.(김윤우, 1987) 또 어래산에는 흥해로부터 안강으로 넘어가는 고대의 교통로가 있었고, 근처에 신광토성과 고분군이 있으며 「영일냉수리신라비」도 발견되었다고 하면서, 어래산설을 지지하는 견해도 있다.(최광식, 1994)

혈례(穴禮)는 나림(奈林, 나력), 골화(骨火)와 함께 신라 산천제사 중 대사(大祀)의 제장이었다. 이들 삼산은 경주와 경주를 둘러싼 지역에 위치하여 경주를 방호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신앙적 의미뿐 아니라 전략적인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고 이해되고 있다.(최광식, 1994)

참고문헌

김상기, 1969, 「花郞과 미륵 信仰에 대하여」『李弘稙博士回甲紀念韓國史學論叢』, 신구문화사.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김윤우, 1987, 「新羅時代 大城郡에 관한 고찰 -新羅王都 周圍의 所在郡縣에 대한 一考察-」『新羅文化』3․4合.최광식, 1994, 『고대 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유신)
金庾信
<武>力伊干之子 舒玄角干金氏之長子曰庾信 弟曰欽純 姊妹曰寶姬 小名阿海 妹曰文姬 小名阿之 庾信公以眞平王十七年乙卯生 禀精七曜 故背有<七>星文 又多神異 年至十八壬申 修<劍>得術爲國仙 時有白石者 不知其所自來 屬於徒中有年 郞以伐麗<濟>之事 日夜深謀 白石知其謀 告於郞曰 僕請與公密先探於彼 然後圖之何如 郞喜 親率白石夜出行 方憩於峴上 有二女隨郞而行 至骨火川留宿 又有一女忽然而至 公與三娘子喜話之時 娘等以美菓餽之 郞受而啖之 心諾相許 乃說其情 娘等告云 公之所言已聞命矣 願公謝白石 而共入林中 更陳情實 乃與俱入 娘等便現神形曰 我等奈林穴禮骨火等三所護國之神 今敵國之人誘郞引之 郞不知而進途 我欲留郞而至此矣 言訖而隱 公聞之驚仆 再拜而出 宿於骨火舘 謂白石曰 今歸他國忘其要文 請與爾還家取來 遂與還至家 拷縛白石 而問其情 曰 我本高麗人[古本云百濟 誤矣 楸南乃高麗之士 又逆行陰陽亦是寶藏王事] 我國群臣曰 新羅庾信是我國卜筮之士楸南也[古本作春南 誤矣] 國界有逆流之水[或云雄雌 尤反覆之事] 使其卜之 奏曰 大王夫人逆行陰陽之道 其瑞如此 大王驚怪 而王妃大怒 謂是妖狐之語 告於王 更以他事驗問之 失言則加重刑 乃以一鼠藏於合中 問是何物 其人奏曰 是必鼠 其命有八 乃以謂失言 將加斬罪 其人誓曰 吾死之後 願爲大將 必滅高麗矣 卽斬之 剖鼠腹而視之 其命有七 於是知前言有中 其日夜大王夢 楸南入于新羅舒玄公夫人之懷 以告於群臣 皆曰 楸南誓心而死 是其果然 故遣我至此謀之爾 公乃刑白石 備百味祀三神 皆現身受奠 金氏宗財買夫人死 葬於靑淵上谷 因名財買谷 每年春月 一宗士女會宴於其谷之南澗 于時百卉敷榮 松花滿洞府林 谷口架築爲庵 因名松花房 傳爲願刹 至五十四景明王 追封公爲興<武>大王 陵在西山毛只寺之北東向走峰
김유신(金庾信)
무력(武力) 이간(伊干)의 아들 서현(舒玄) 각간(角干) 김씨의 장자(長子)는 유신(庾信)이고, 그 동생은 흠순(欽純)이다. 누이동생은 보희(寶姬), 어릴 때 이름은 아해(阿海)이고 그 동생은 문희(文姬), 어릴 때 이름은 아지(阿之)이다. 유신공은 진평왕 17년(595) 을묘에 태어났는데,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 났으므로, 등에 칠성(七星)의 무늬가 있었고 또 신이한 일이 많았다. 나이가 18세 되던 임신년(612)에 검술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다. 이 때 백석(白石)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낭도의 무리에 여러 해 동안 속해 있었다. 유신랑은 고구려와 백제를 치는 일로 밤낮 깊이 모의하고 있었는데, 백석이 그 모의를 알고 낭에게 고해 이르기를, “제가 청컨대 공과 더불어 몰래 먼저 저쪽을 탐색하고, 그 이후에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낭은 기뻐하며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떠났다. 바야흐로 고개 위에서 쉬려고 할 때, 두 여자가 낭을 따라 갔다. 골화천(骨火川)에 이르러 유숙하는데, 또 한 여자가 홀연히 이르렀다. 공이 세 낭자와 더불어 기쁘게 이야기 할 때 낭자들이 맛있는 과일을 드리니 낭이 받아먹었고, 마음으로 서로 허락하고 그 실정을 이야기하였다. 낭자들이 고하기를, “공이 말씀하는 바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원컨대 공이 백석을 물리고 함께 숲 속으로 들어가면 다시 실정을 아뢰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함께 들어갔다. 낭자들이 곧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말하기를, “우리들은 나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火) 등 세 곳의 호국신(護國神)입니다. 지금 적국의 사람이 낭을 꾀어 유인하는데도 낭은 알지 못하고 길을 나아가니, 내가 낭을 만류하려고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고 사라졌다. 공이 듣고 놀라 쓰러지며 두 번 절하고 나왔다. 골화관(骨火舘)에 유숙할 때 백석에게 일러 말하길, “지금 타국에 가면서 긴요한 문서를 잊었으니, 청컨대 너와 함께 집에 돌아가서 가져와야하겠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함께 돌아와 집에 이르러서 백석을 결박하고 그 사정을 물었다. 이르기를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다[고본(古本)에는 백제라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추남(楸南)은 고려의 선비이고 음양(陰陽)을 역행(逆行)한 것도 보장왕(寶藏王)때의 일이다]. 우리나라 군신들이 이르길, ‘신라의 유신은 우리나라에서 점치던 선비 추남이다[고본에서는 춘남(春男)이라고 하였다]. 나라의 경계에 역류하는 물[혹은 웅자(雄雌)가 엎치락뒷치락 하는 일이라고 한다]이 있어서 그에게 점을 치게 했더니 아뢰기를 ‘대왕의 부인이 음양의 도를 역행했으니, 그 단서가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왕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왕비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는 요망한 여우의 말이다’라고 하고는 왕에게 고하여 다시 다른 일로써 시험하여 물어보게 하고 잘못 말하면 중형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에 쥐 한 마리를 함 속에 넣고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고 물었다. 그 사람이 아뢰기를 ‘이는 반드시 쥐입니다. 그 목숨은 여덟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잘못 말하였다고 하고는 장차 참죄(斬罪)를 가하려고 하였다. 그 사람이 맹세하여 말하길, ‘내가 죽은 후에 원컨대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려를 멸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베어 죽이고, 쥐의 배를 갈라 보니, 그 목숨이 일곱이었다. 이때 앞서 한 말이 맞은 것을 알았다. 그날 밤에 대왕이 꿈을 꾸었는데 추남이 신라 서현공 부인의 품으로 들어갔다. 이를 군신에게 말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추남이 마음으로 맹세하고 죽었으니 이것이 과연 그러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까닭에 나를 보내어 이러한 모의를 하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에 백석을 처형하고 온갖 음식을 갖추어 삼신(三神)에게 제사지내니, 모두 현신하여 제사를 받았다. 김씨 집안 재매부인(財買夫人)이 죽자 청연(靑淵) 상곡(上谷)에 장사지내고 인하여 재매곡이라 이름하였다. 매년 봄에 온 집안의 사녀(士女)가 그 계곡의 남쪽 시내에 모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때 온갖 꽃이 피고 송화(松花)가 마을 숲에 가득하였다. 계곡 입구에 암자를 짓고 인하여 송화방(松花房)이라 이름하였으며, 전하여 원찰로 삼았다. 제54대 경명왕대에 이르러 공을 추봉하여 흥무대왕(興武大王)이라 하였다.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의 북쪽 동으로 뻗은 봉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