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영

대조영

분류 문학 > 국가 > 발해

기본정보

발해 제1대 왕
생몰년: ?-719
재위기간: 698-719

일반정보

발해를 건국한 왕으로 걸걸중상(乞乞仲象)의 아들이다. 고구려 멸망 후 영주(營州, 지금의 조양)로 옮겼다가 696년 거란인 이진충의 반란을 틈타 동쪽으로 가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합해 동모산 아래에 성을 쌓고 진국왕으로 즉위하였다. 713년에 당으로부터 좌효위원외대장군(左驍衛員外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인정받았고, 719년 대조영이 죽자 시호를 고왕(高王)이라 정하였다. 그의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왕위에 올라 무왕(武王)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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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말갈발해조에 인용된 『통전』에는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추장 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단으로 불렀다(渤海本粟末靺鞨 至其酋祚榮立國 自號震旦)”라고 하였고,『신라고기』에 이르길,“고구려의 구장(舊將)조영은 성이 대씨인데 남은 병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다(高麗舊將祚榮姓大氏 聚殘兵 立國於太伯山南 國號渤海)”라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또한 『삼국유사』에서는『통전』을 인용하여 대조영을 속말말갈의 추장이라고 하였으나 정작 『통전』에서는 그와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대조영의 출자에 대해서는 『구당서』 권199 열전149 북적 발해말갈조와 『신당서』 권219 열전144 북적 발해조를 대표로 하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구당서』에는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려별종이다.(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라고 하였으나,『신당서』에서는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려에 붙어 있던 자이니, 성은 대씨이다.(渤海 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대조영의 출신에 대한 혼란은 『구당서』와 『신당서』의 서술이 서로 다른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구당서』의 고려별종을 고구려계로 해석하여 대조영을 고구려 유민으로 간주하는 견해는 주로 한국학자들이 지지하고 있으며, 『신당서』의 속말말갈로서 고려를 내세운 인물로써 대조영을 보는 견해는 대부분의 중국측 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다. 한편,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을 상호보완적으로 해석하는 중간적인 입장도 존재한다.

우선, 『구당서』를 따라 대조영을 고구려인으로 보는 견해는 발해의 건국은 고구려 유민이 말갈족을 이용하여 이전의 고구려를 부흥한 것이며, 그 중심인물인 대조영은 고구려인이라고 하였다.(白鳥庫吉, 1933; 박시형, 1979; 노태돈, 1985) 이에 따르면, 대조영은 고구려인에 가깝고 고구려 조정에 밀착된 모습을 보여주며, 그가 속말수 유역에 거주하던 변경의 고구려인 즉, 고려별종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였다.(노태돈, 1985)

이와 달리 『신당서』에 따라 대조영을 말갈족으로 규정하고, 구체적으로 백산부의 말갈(津田左右吉, 1915; 鳥山喜一, 1968) 또는 속말말갈(孫秀仁 외, 1982; 朱國忱 외, 1984)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 대조영을 백산말갈로 규정하는 입장은 대조영은 본래 순수한 고구려인이 아니고 그 본관이 백산말갈족 출신으로 그 아버지 때부터 고구려의 영역 안에서 고구려에 오래 복속하여 중국풍의 대씨를 자칭하는 가계에 속했던 자라고 하였다.(鳥山喜一, 1968) 대조영을 속말말갈로 규정하는 입장은 대조영을 속말말갈로 보고 그 일족인 대씨는 영주로 이주하여 말갈의 무리와 고구려의 유민을 규합하여 진국을 건국하였다고 하였다.(朱國忱외, 1984)

한편, 양 사서의 기록을 상호 보완적으로 접근한 견해는『구당서』의 고려별종은 대조영이 고구려계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신당서』의 속말말갈로서 고려에 붙어 있던 자라는 기록은 대조영의 출신지역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은 대조영이 고구려의 송화강 출신임을 의미한다고 하였다.(한규철, 1994) 또한 대조영은 혈통적으로 말갈출신이었지만 고구려인화였다고 하면서 대조영은 말갈인과 고구려인의 양면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하였다.(송기호, 1995)

대조영 집단은 고구려 멸망 후 영주(營州, 지금의 조양)로 옮겼다가 696년 거란인 이진충(李盡忠)이 영주도독 조문홰(趙文翽)를 죽이면서 일어난 난을 계기로 탈출했다. 추격해 오던 당(唐)의 이해고(李楷固)의 공격을 천문령(天門嶺, 지금의 하다링산맥)에서 물리친 후 동쪽으로 이동해서 동모산(東牟山, 지금의 길림성 돈화)에서 발해를 건국하였다. 대조영은 713년에 당으로부터 좌효위원외대장군(左驍衛員外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인정받았고, 719년 대조영이 죽자 시호를 고왕(高王)이라 정하였다.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왕위에 올라 무왕(武王)이 되었다.

참고문헌

津田左右吉, 1915,「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東京帝國大學文科大學.
白鳥庫吉, 1933,「渤海國に就いて」『史學雜誌』44-12.
鳥山喜一, 1968,『渤海史上の諸問題』, 風間書房.
박시형, 1979,『발해사』,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孫秀仁․干志耿, 1982,「論渤海族的形成與歸向」『學習與探索』4.
朱國忱․魏國忠, 1984,『渤海史稿』, 黑龍江省文物出版編輯室.
노태돈, 1985,「渤海國의 住民構成과 渤海人의 族源」『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일조각.
한규철, 1994, 『발해의 대외관계사』, 신서원.
송기호, 1995, 『발해정치사연구』, 일조각.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말갈발해)
靺鞨[一作勿吉]渤海
通典云 渤海本<粟><末>靺鞨 至其酋<祚>榮立國 自號震旦 先天中[玄宗<壬>子] 始去靺鞨號 專稱渤海 開元七年[己未] <祚>榮死 諡爲高王 世子襲<位> 明皇賜典冊襲王 私改年號 遂爲海東盛國 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後唐天成初 契丹攻破之 其後爲丹所制 [三國史云 儀鳳三年 高宗戊寅 高麗殘孽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渤海 開元二十年間 明皇遣將討之 又聖德王三十二年 玄宗甲戌 渤海靺鞨 越海侵唐之登州 玄宗討之 又新羅古記云 高麗舊將<祚>榮姓大氏 聚殘兵 立國於太伯山南 國號渤海 按上諸文 渤海乃靺鞨之別種 但開合不同而已 按指掌圖 渤海在長城東北角外] 賈耽郡國志云 渤海國之鴨淥南海扶餘橻城四府 並是高麗舊地也 自新羅泉井郡[地理志 朔州領縣 有泉井郡 今湧州] 至橻城府 三十九驛 又三國史云 百濟末年 渤海靺鞨新羅分百濟地 [據此 則鞨海又分爲二國也] 羅人云 北有靺鞨 南有倭人 西有百濟 是國之害也 又靺鞨地接阿瑟羅州 又東明記云 卒本城地連靺鞨[或云 今東眞] 羅第六祗麻王十四年[乙丑] 靺鞨兵大入北境 襲大嶺柵 過泥河 後魏書 靺鞨作勿吉 指掌圖云 挹屢與勿吉 皆肅愼也 黑水沃沮 按東坡指掌圖 辰韓之北 有南北黑水 按東明帝立十年 滅北沃沮 溫<祚>王四十二年 南沃沮二十餘家 來投新羅 又赫居世五十二年 東沃沮來獻良馬 則又有東沃沮矣 指掌圖 黑水在長城北 沃沮在長城南
말갈[또는 물길]발해
『통전』에 이르길,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추장 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단으로 불렀고, 선천(先天) 연간[현종 임자(壬子)]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직 발해로만 불렀다. 개원(開元) 7년[기미(己未)]에 조영이 죽으니 시호를 고왕이라고 하였고, 세자가 왕위를 이어 받자 명황은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는데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마침내 해동성국이 되었다. 그 땅에는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 후당의 천성(天成)초에 거란이 이를 공격하여 깨뜨리니 그 후에는 거란에 의해 지배되었다.[『삼국사』에 이르길, 의봉(儀鳳) 3년 고종 무인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고, 개원 20년에 명황이 장수를 보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甲戌)에 발해와 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략하니 현종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신라고기』에 이르길, 고구려의 구장(舊將) 조영은 성이 대씨인데 남은 병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다. 위의 여러 글을 살펴보면, 발해는 말갈의 별종으로 다만 시작과 끝이 다를 뿐이다. 『지장도』를 살펴보면, 발해는 장성의 동북쪽 모서리 밖에 있다] 가탐의 『군국지』에는 발해국의 압록․남해․부여․추성 4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며 신라의 천정군[「지리지」에는 삭주의 영현으로 천정군이 있었으니 지금의 용주다] 으로부터 추성부에 이르기까지 39개 역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에는 백제 말년에 발해․말갈․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었다고 하였다.[이에 의하면 말갈과 발해가 또 나뉘어 두 나라가 된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이르길,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이 있으며,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나라의 해다. 또 말갈 땅은 아슬라주에 접해있다고 하였다. 또 「동명기」에는 졸본성의 지계가 말갈[혹은 지금의 동진이라 함]에 접하였다하고, 신라 제6대 지마왕 14년[을축]에 말갈병이 크게 북경에 들어와 대령책을 엄습하고 니하를 지나갔다고 하였다. 『후위서』에는 말갈을 물길이라 하였고, 「지장도」에는 읍루․물길은 모두 숙신이라고 하였다. 흑수․옥저는 동파의 「지장도」를 보면 진한 북쪽에 남북의 흑수가 있다고 하였다. 생각하건대, 동명제 즉위 10년에 북옥저를 멸하고, 온조왕 42년에 남옥저의 20여가가 신라로 투항하였다고 하였고 또 혁거세 52년에 동옥저가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하니, 또한 동옥저도 있었던 것이다. 「지장도」에서 흑수는 장성 북쪽에 있고 옥저는 장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