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사암

타사암

분류 문학 > 국가 > 백제

기본정보

타사암(墮死巖)은 낙화암(落花岩)이라고도 불리며,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위치한 부소산 서쪽에 있는 절벽의 바위를 말한다.

일반정보

타사암(墮死巖)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위치한 부소산 서쪽에 있는 절벽의 바위를 말한다.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의 궁녀들이 자살하였다고 전하는 곳으로 일반적으로 낙화암(落花岩)이라고도 불린다.

타사암 본문 이미지 1
타사암 본문 이미지 2

전문정보

타사암(墮死巖,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10호)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위치한 부소산 서쪽 절벽의 바위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낙화암(落花岩)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조에서는 “『백제고기(百濟古記)』에서는 ‘부여성(扶餘城)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아래로 강물에 닿아있는데, 전해오는 말로는 의자왕과 모든 후궁(後宮)이 함께 (화를) 면하지 못할 줄 알고 서로 말하기를, 차라리 자살할지라도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고, 서로 이끌고 와서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고 하여 세상에서는 타사암(墮死巖)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속설(俗說)이 잘못된 것이다. 다만 궁인(宮人)이 떨어져 죽었더라도, 의자왕이 당(唐)에서 죽었다는 것은 당사(唐史)에 명백히 써있다.(百濟古記云 扶餘城北角有大岩 下臨江水 相傳云 ‘義慈王與諸後宮 知其未免 相謂曰 寧自盡 不死於他人手 相率至此,投江而死 故俗云墮死岩 斯乃俚諺之訛也 但宮人之墮死 義慈卒於唐 唐史有明文)”라는 내용이 있다.

『백제고기(百濟古記)』를 인용하여 백제가 멸망하면서 의자왕과 후궁(後宮)들이 자살한 장소를 타사암(墮死巖)이라고 한다는 내용인데, 『삼국유사』의 찬자는 의자왕이 당(唐)에 끌려가서 그곳에서 죽었기 때문에 『백제고기』의 내용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후 조선 성종 9년(1478)에 편찬된 『동문선(東文選)』 권71 기(記) 주행기(舟行記)에서 고려후기의 문인인 이곡(李穀, 1298-1351)의 글이 나온다. 여기서는, “이튿날 부여성(扶餘城) 낙화암(落花岩) 아래에 이르렀다. 옛날에 당(唐) 나라에서 소장군(蘇將君)을 보내어 이전의 백제(百濟)를 쳤는데, 부여는 실상 백제의 고도(故都)이다. 그 때에 포위를 당하여 매우 급하게 되자 임금과 신하들이 궁녀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궁녀들은) 의리상 적군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다 하여 무리를 지어 이 바위에 이르러 물에 떨어져 죽었으므로 그것으로 이름 지은 것이다.(明日至扶餘城落花巖下 昔唐遣蘇將軍 伐前百濟 扶餘實其故都也 時被圍甚急 君臣棄宮娥而走 義不汚于兵 群至此巖 墮水而死 故以名之)”라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 중종 25년(1530)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18 충청도(忠淸道) 부여현(扶餘縣) 고적(古跡)조에는 “낙화암(落花巖). 현 북쪽 1리에 있다. 조룡대 서쪽에 큰 바위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의자왕(義慈王)이 당 나라 군사에게 패하게 되자 궁녀(宮女)들이 달아나 나와 이 바위 위에 올라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으므로 낙화암이라 이름하였다.(落花岩 在縣北一里 釣龍臺西有巨岩 諺傳義慈王爲唐兵所敗 宮女奔进登是岩 自墮于江故名)”라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고려후기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타사암(墮死巖)이 낙화암(落花巖)으로도 불리게 되었음을 알 수 있고, 타사암에서 의자왕이 자결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한편 조선시대에 사서(史書)가 아니라 각종 시가(詩歌)에서 타사암을 다루면서 삼천궁녀와 관련된 내용이 추가된다. 조선전기의 문인인 김흔(金訢, 1448-1487)이나 민제인(閔齊仁, 1493-1549)의 시(詩)에서 삼천궁녀라는 표현이 사용되는데, 이러한 표현은 중국의 시에서 자주 확인되는 ‘많다’ 혹은 ‘길다’의 문학적인 표현을 활용한 것이다. 즉, 조선시대의 문인들은 백제의 멸망이라는 슬픈 사실을 반영한 타사암을 주제로 삼으면서, 삼천이라는 문학적 표현수법을 동원하여 극적인 효과를 꾀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낙화암과 삼천궁녀를 떠올리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며, 삼천이라는 수치도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다.(오세운, 2000)

현재 낙화암은 백마강과 인접해 있지만 강수면에 이르러서는 한번 꺾인 단이 있어 바위 위에서 떨어진다 해도 직접 물속으로는 빠지기 어렵다. 한편 단을 이루고 있는 낙화암의 암벽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필체로 보이는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낙화암의 꼭대기에는 궁녀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9년에 세운 백화정(百花亭)이란 정자가 있다.(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89)

참고문헌

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89, 『忠南地域의 文化遺蹟』3-扶餘郡編-.
오세운, 2000, 『부여의 누정』, 부여문화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
新羅別記云 文<武>王卽位五年乙丑秋八月庚子 王親統大兵 幸熊津城 會假王扶餘隆 作壇 刑白馬而盟 先祀天神及山川之靈 然後歃血爲文而盟曰 往者百濟先王 迷於逆順 不<敦>隣好 不睦親姻 結托句麗 交通倭國 共爲殘暴 侵削新羅 破邑屠城 略無寧歲 天子憫一物之失所 憐百姓之被毒 頻命行人 諭其和好 負險恃遠 悔慢天經 皇赫斯怒 恭行弔伐 旌旗所指 一戎大定 固可瀦宮汚宅 作誡來裔 塞源拔本 垂訓後昆 懷柔伐叛 先王之令典 興亡繼絶 往哲之通規 事<必>師古 傳諸曩冊 故立前百濟王司(稼)正卿扶餘隆爲熊津都督 守其祭祀 保其桑梓 依倚新羅 長爲與國 各除宿憾 結好和親 恭承詔命 永爲藩服 仍遣使人右威衛將軍魯城縣公劉仁願 親臨勸諭 具宣成旨 約之以婚姻 申之以盟誓 刑牲歃血 共敦終始 分災恤患 恩若兄弟 祗奉綸言 不敢墜失 旣盟之後共保歲寒 若有乖背 二三其德 興兵動衆 侵犯邊陲 神明鑒之 百殃是降 子孫不育 社稷無宗 禋祀磨滅 罔有遺餘 故作金書鐵契 藏之宗廟 子孫萬代 無或敢犯 神之聽之 是享是福 歃訖 埋弊帛於壇之壬地 藏盟文於大廟 盟文乃帶方都督劉仁軌作 [按上唐史之文 定方以義慈王及太子隆等送京師 今云 會扶餘王隆 則知唐帝宥隆而遣之 立爲熊津都督也 故盟文明言 以此爲驗] 又古記云 總章元年戊辰 [若總章戊辰 則李勣之事 而下文蘇定方 誤矣 若定方則年號當龍朔二年壬戌 來圍平壤之時也] 國人之所請唐兵 屯于平壤郊 而通書曰 急輪軍資 王會群臣問曰 入於敵國 至唐兵屯所 其勢危矣 所請王師粮匱 而不輪其料 亦不宜也 如何 庾信奏曰 臣等能輸其軍資 請大王無慮 於是庾信仁問等 率數萬人 入句麗境 輸料二萬斛 乃還 王大喜 又欲興師會唐兵 庾信先遣然起兵川等<二>人 問其會期 唐帥蘇定方 紙畵鸞犢二物廻之 國人未解其意 使問於元曉法師 解之曰 速還其兵 謂畵犢畵鸞二切也 於是庾信廻軍 欲渡浿江<令><曰>後渡者斬之 軍士爭先半渡 句麗兵來掠 殺其未渡者 翌日信返追句麗兵 捕殺數萬級 百濟古記云 扶餘城北角有大岩 下臨江水 相傳云 義慈王與諸後宮 知其未免 相謂曰 寧自盡 不死於他人手 相率至此 投江而死 故俗云墮死岩 斯乃俚諺之訛也 但宮人之墮死 義慈卒於唐 唐史有明文 又新羅古傳云 定方旣討麗濟二國 又謀伐新羅而留連 於是庾信知其謀 饗唐兵鴆之 皆死坑之 今尙州界有唐橋 是其坑地[按唐史 不言其所以死 但書云卒何耶 爲復諱之耶 鄕諺之無據耶 若壬戌年高麗之役 羅人殺定方之師 則後總章戊辰 何有請兵滅高麗之事 以此知鄕傳無據 但戊辰滅麗之後 有不臣之事 擅有其地而已 非至殺蘇李二公也].
신라별기에서 말하길, “문무왕 즉위 5년 을축(665) 가을 8월 경자에 왕이 친히 대병을 거느리고 웅진성에 갔다. 가왕 부여융을 만나 단을 만들고 흰말을 잡아서 맹세할 때, 먼저 천신과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낸 뒤에 삽혈하고 글을 지어 맹세하기를, ‘지난번에 백제의 先王이 역리와 순리에 어두워, 이웃과의 우호를 두텁게 하지 않고, 인친과 화목하지 않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교통하여 함께 잔폭한 행동을 하여, 신라를 침해하여 성읍을 파괴하고 무찔러 죽임으로써 조금도 편안한 때가 없었다. 천자는 사물 하나라도 제 곳을 잃음을 민망히 여기고 백성이 해독 입는 것을 불쌍히 여기어 자주 사신을 보내어 화호하기를 달랬다. (그러나 백제는) 지리의 험함과 거리가 먼 것을 믿고 하늘의 법칙을 업신여기므로 황제가 이에 크게 노하여 죄를 묻는 정벌을 삼가 행하니, 깃발이 향하는 곳마다 한번 경계하여 크게 평정하였다. 진실로 그 궁택을 웅덩이로 만들어 자손을 경계하고 근원을 막고 뿌리를 빼어 후인에게 교훈을 보일 것이나, 복종하는 자를 품고 반란자를 정벌함은 선왕의 명령과 법이고, 망한 것을 흥하게 하고 끊어진 것을 잇게 함은 전대 현인의 통해온 법이며, 일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함은 모든 옛 서적에 전해온다. 그리하여 전 백제왕 사가정경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그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고향을 보전케 하니,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우방이 되어 각각 묵은 감정을 풀고 우호를 맺어 화친할 것이며, 삼가 조명을 받들어 길이 속방이 되라. 이에 사자 우위장군 노성현공 유인원을 보내어 친히 임하여 권유하고 달래어 내 뜻을 갖추어 선포하니, (그대들은) 혼인을 약속하고 맹서를 아뢰며 희생을 잡아 삽혈을 하고 함께 시종을 두터이 할 것이며, 재앙을 나누고 환란을 구원하여 형제와 같이 은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삼가 조칙을 받들어 감히 잃지 말고, 이미 맹서한 후에는 함께 변하지 않는 지조를 지켜야 할 것이다. 만일 여기에 위배하여 그 덕이 변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여서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있으면, 신명이 이를 살펴 많은 재앙을 내리어 자손을 기르지 못하게 하고 사직을 지키지 못하게 하며, 제사도 끊어져 남김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금서철계를 지어 종묘에 간직해두니 자손들은 만 대토록 혹 어기거나 범하지 말라. 신이여 이를 듣고 흠향하고 복을 주소서’라고 하였다. 삽혈이 끝난 후 폐백을 제단 북쪽에 묻고 맹서한 글을 대묘에 간직하니, 이 글은 대방도독 유인궤가 지은 것이다.”[위 당사의 글을 보면 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융 등을 당의 서울에 보냈다고 한다. 여기서는 부여왕 융을 만났다고 하니 당 황제가 융의 죄를 용서하고 놓아 보내어 웅진도독을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맹세문에 분명히 말하였으니 이것으로 증거가 된다] 또 고기에 이르기를, “총장 원년 무진(668)[총장 무진이면 이적의 사실이니, 아래 글에 소정방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만일 정방의 일이라면 연호는 용삭 2년 임술(662)에 해당하니 평양에 와서 포위 했을 때의 일이다]에 국인이 청한 당의 원병이 평양 교외에 와서 진을 치고 (신라에) 서신을 보내어, 급히 군사물자를 보내달라고 하였다. 왕이 군신을 모아놓고 묻기를, ‘적국에 들어가서 당군의 진영에 간다는 것은 매우 위태로운 일이다. (그렇다고) 당군이 군량을 청했는데 그 군량을 보내주지 않는 것도 또한 마땅치 못한 일이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하였다. 유신이 아뢰어 말하길, ‘신 등이 능히 그 군수물자를 수송할 것이니 왕은 근심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유신․인문 등이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고구려 경내에 들어가 2만 곡을 가져다주고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또 군사를 일으켜 당군과 연합하려고 유신이 먼저 연기․병천 등 두 사람을 보내어 그 만날 시기를 물으니 당장 소정방이 종이에 난새와 송아지 두 동물을 그려서 보내었다. 국인이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원효법사에게 물으니 법사가 해석하여 말하기를, ‘속히 군사를 돌이키라 하는 것이다. 송아지와 난새를 그린 것은 두 반절을 이른 것이다’라 하였다. 이에 유신이 군사를 돌이켜 패강을 건너려 할 때 명령을 내려, ‘뒤에 건너는 자는 목을 벤다’고 하였다. 군사가 서로 앞을 다투어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병이 쫓아와서 미쳐 건너지 못한 자를 죽였다. 이튿날 유신은 고구려병을 반격하여 수만 명을 잡아죽였다.” 백제고기에는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아래로 강물에 닿아있는데, 전해오는 말로는 의자왕과 모든 후궁이 함께 (화를) 면하지 못할 줄 알고 서로 말하기를, ‘차라리 자살할지라도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고, 서로 이끌고 와서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고 하여 세상에서는 타사암이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속설이 잘못된 것이다. 다만 궁인이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더라도, 의자왕이 당에서 죽었다는 것은 당사에 명백히 적혀 있다. 또 신라고전에는 “정방이 이미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치고 또 신라를 치려고 머물고 있었다. 이에 유신은 그 음모를 알고 당병을 초대하여 독약을 먹여 모두 죽이고 구덩이에 묻었다.”고 한다. 지금 상주의 경계에 당교가 있으니, 이것이 그 묻은 곳이라 한다.[당사를 보면 그 죽은 까닭은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 만 하였으니 무슨 까닭인가, 감추기 위한 것인지 혹은 향전이 근거가 없는 것인가. 만일 임술년(662) 고구려를 치는 싸움에 신라인이 정방의 군사를 죽였다고 하면, 후일 총장 무진(668)에 어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할 수 있었을까. 이로써 향전이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무진(662)에 고구려를 멸한 후 (신라가) 신하가 되지 않고, 마음대로 고구려의 땅을 소유한 일은 있으나, 소정방과 이적 두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