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자

백운자

분류 문학 > 국가 > 고려

기본정보

고려 무신정권 시기의 귀족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백운자(白雲子)는 호, 신준(神駿)은 법호(법명), 오정석(吳廷碩)은 이름으로 생각되며, 그는 고려 무신정권 시기에 활동한 귀족으로, 정중부의 난 초에 도피하여 중이 되어 명산을 두루 방랑하면서 환속하지 않고 일생을 마친 사람이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3 탑상4 오대산문수사석탑기(五臺山文殊寺石塔記)조에는 오대산 문수사의 뜰에 매우 영험이 있는 신라시대의 석탑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맨 마지막 부분에 정륭(正隆) 원년(1156) 병자 10월 일(日)에 백운자(白雲子)가 기록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에 대하여 오대산문수사석탑기의 본문 끝에 금(金)의 정륭(正隆) 원년인 고려 의종 10년(1156)에 백운자가 기록한 것으로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삼국유사』의 이 부분은 1289년에 일연이 입적한 이후 누군가에 의해 백운자의 글이 추가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이기백, 2004)

하지만 오대산문수사석탑기의 전체 내용이 백운자에 의해 모두 쓰여진 것이 아니라, 일연이 현지에서 들었던 고로(古老)의 이야기와 직접 살펴보았던 목격기, 그리고 정륭(正隆) 원년(1156)에 백운자가 쓴 현판 내용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에 의하면 오대산문수사석탑기의 전체 내용이 일연 이후 누군가에 의해 추가된 기록으로 보기 어려우며, 현판 내용의 찬자만 백운자이고, 오대산문수사석탑기 전체 내용은 일연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고 한다.(김상현, 2007)

한편, 이 오대산문수사석탑기에 등장하는 백운자에 대해서는, 『파한집(破閑集)』과 『보한집(補閑集)』에 등장하는 백운자와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가 있다.(강인구 외, 2002)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파한집(破閑集)』 권 상(上)에 의하면, “백운자(白雲子) 신준(神駿)은 갓을 벗어 신무문(神武門)에 걸고 공주 산장에 돌아가 숨어사는데, 그 고을 군수가 그 아들을 보내어 수업하게 한 지 몇 해가 되어 그 아들이 서울에 가서 응시하게 되었으므로, 시 일절로 그를 전송하였다”고 하였다. 『파한집』 권 하(下)에 의하면, “백운자는 유학을 떠나 불교를 배워 시축을 싸매고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도중에 꾀꼬리 소리를 듣고 느낀 바 있어 시 한 수를 지었다”고 하였다. 또 최자(崔滋, 1188-1260)의 『보한집(補閑集)』에는 직강(直講) 하천단(河千旦, ?-1259)이 백운자 오정석(吳廷碩)의 팔전산(八顚山)을 유람한 시를 외웠다는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신준(神駿)은 법호(법명)로 생각되고, 『파한집』에 “백운자(白雲子) 신준(神駿)”이라는 기록에 따라 그의 아호가 백운자였으며, 『보한집』에는 “백운자(白雲子) 오정석(吳廷碩)”이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백운자, 신준, 오정석이란 세 이름이 한 사람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 『동문선(東文選)』에는 『파한집』에 신준의 것으로 소개된 작품이 오정석의 시로 되어 있음으로 보아서도 이를 알 수 있다고 한다.(윤호진, 2003)

『고려사』 권110 열전23 이제현(李齊賢)조에는 신준(神駿)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서술이 있다. “의종(毅宗) 말년에 무인(武人)이 사변을 일으켜 옳고 그르고 간에 사람을 모조리 죽인 관계로 그 위험에서 빠져 난 자는 깊은 산골로 도망하여 관복을 벗고 스님의 옷을 갈아입어 남은 생명을 부지하였습니다. 신준(神駿), 오생(悟生)과 같은 사람들이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 후에 국가의 법과 질서가 점차 회복됨에 따라 공부하기를 지원하는 자들이 나타났으나 배울 곳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모두 그러한 자들을 찾아가 학습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역옹패설(櫟翁稗說)』에도 수록되어 있다.

신준(神駿)은 고려 무신정권 시기 정중부의 난 초에 도피하여 유관을 벗어던진 후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명산을 두루 방랑하거나 한곳에 정주하면서 세상이 다소 달라진 후에도 끝내 환속하지 않고 일생을 마친 사람이라고 한다. 신준의 호는 백운자로 공주에 있었던 것이 알려지고 있을 뿐이지만, 그의 명성은 당시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듯 하다고 한다. 신준은 무신정권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현실권 밖에서 자기의 주체성을 지키면서 청고한 일생을 살았던 인간인 동시에, 지방의 젊은 자제들을 모아 놓고 교육에 종사한 사실이 주목된다고 하였다. 신준의 출신에 대해서는 지방 향리층의 자제로 중앙에 진출하였다가 무신란을 피해 시골에 은거하며 군수의 자제들을 교육시킨 것이라고 하였다.(이우성, 1982)

한편, 신준의 출신에 대하여 중앙 귀족 관료 출신이었다가, 무신란을 피해 시골에 가서 향리층의 자제들을 교육시킴으로써 이들이 중앙무대에 진출하게 하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보기도 한다.(윤호진, 2003)

백운자 신준 오정석의 작품은 현재 모두 다섯 편이 전하고 있다. 『파한집』, 『역옹패설』, 『소문쇄록(謏聞鎖錄)』, 『동문선』등에 보이는「도중문앵(途中聞鶯)」과, 『파한집』에 보이는 과거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문생을 송별하는 시, 『보한집』에 보이는「유팔전산시(遊八顚山詩)」, 『동문선』에 실려 있는「산촌해당(山村海堂)」,「증대광사당두(贈大光寺堂頭)」이다.

참고문헌

이우성, 1982, 「高麗 武臣執權下의 文人知識層의 動向」 『韓國의 歷史像』, 창작과 비평사.
강인구, 김두진, 김상현, 장충식, 황패강, 2002,『(譯註) 三國遺事』3, 이회문화사.
윤호진, 2003, 「오정석(吳廷碩)의 삶과 작품세계」 『조선시대의 사상과 문화』, 집문당.
이기백, 2004, 「『삼국유사』의 편목 구성」『韓國古典硏究』, 일조각.
김상현, 2007, 「三國遺事의 編纂과 刊行에 대한 硏究 現況」『佛敎硏究』 26.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오대산문수사석탑기)
五臺山文殊寺石塔記
庭畔石塔 蓋新羅人所立也 制作雖淳朴不巧 然甚有靈響 不可勝記 就中一事 聞之諸古老云 昔連谷縣人 具舡沿海而漁 忽見一塔隨逐舟楫 凡水族見其影者 皆逆散四走 以故漁人一無所得 不堪憤恚 尋影而至 蓋此塔也 於是共揮斤斫之而去 今此塔四隅皆缺者以此也 予驚嘆無已 然怪其置塔 稍東而不中 於是仰見一懸板云 比丘處玄 曾住此院 輒移置庭心 則二十餘年間 寂無靈應 及日者求基抵此 乃嘆曰 是中庭地 非安塔之所 胡不移東乎 於是衆僧乃悟 復移舊處 今所立者是也 余非好怪者 然見其佛之威神 其急於現迹利物如此 爲佛子者 詎可黙而無言耶 時正<隆>元年丙子十月日 白雲子記

오대산 문수사석탑기
뜰 가의 석탑은 아마 신라 사람이 세운 것 같다. 제작은 비록 순박하여 정교하지는 못하나 매우 영험이 있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그중에서도 한 가지 일을 여러 옛 노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옛날 연곡현(連谷縣) 사람들이 배를 타고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탑 하나가 나타나서 배를 따라오는데 모든 물속의 동물들이 그 그림자를 보고 모두 흩어져 달아나니, 이 때문에 어부들은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어부들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그림자를 찾아가보니 이 탑이었다. 그래서 함께 도끼를 휘둘러 그 탑을 쳐부수고 가버렸는데, 지금 이 탑의 네 귀퉁이가 모두 떨어진 것은 이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 말에) 놀라고 감탄해 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탑의 위치가 조금 동쪽에 있고 중앙에 있지 않음을 괴이하게 여겨, 이에 현판 하나를 쳐다보니 거기에 이르길, “비구(比丘) 처현(處玄)이 일찍이 이 절에 있으면서 문득 탑을 뜰 한 가운데로 옮겼더니 (그 후) 20여년 동안 잠잠하여 아무런 영험이 없었다. 일자(日者)가 터를 구하여 이곳까지 와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뜰 가운데는 탑을 안치할 곳이 아닌데 어째서 동쪽으로 옮기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스님들이 깨닫고 다시 옛 자리로 옮겼으니 지금 서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나는 괴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나, 부처님의 신령한 위엄을 보건대 그 자취를 나타내어 만물을 이롭게 함이 이와 같이 빠르니, 불자(佛子)된 사람으로서 어찌 잠자코 말하지 않겠는가? 때는 정륭(正隆) 원년(1156) 병자 10월 일(日)에 백운자(白雲子)가 기록한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