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유

간유

분류 문학 > 국가 > 고려

기본정보

고려 초기의 승려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 백엄사석탑사리(伯嚴寺石塔舍利)조에서 백엄사와 관련하여 개운(開運) 3년 병오(丙午, 946)의 강주계임도대감(康州界任道大監) 주첩(柱貼)을 인용하였다. 이에 따르면 당시 초팔현(草八縣)에 백엄선사(伯嚴禪寺)가 있는데 절의 스님 간유(偘遊)의 나이가 39세였다고 한다. 간유에 관해서는 이외 다른 기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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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원형백과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3 탑상4 백엄사석탑사리(伯嚴寺石塔舍利)조에서 개운(開運) 3년 병오(丙午, 946) 10월 29일 강주계임도대감(康州界任道大監) 주첩(柱貼)을 인용하였다. 이에 따르면 당시 초팔현(草八縣) 곧 『삼국유사』 편찬당시 초계(草溪)라 불렸던 곳에 백엄선사(伯嚴禪寺)가 있는데 절의 스님 간유(偘遊) 상좌(上座)의 나이가 39세였다고 한다.

이 외에 간유에 관한 전하는 바가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삼국유사』의 이 기록에 따르면 간유는 상좌(上座)라고 하는 승직을 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좌란 신라 시대 삼강(三綱)의 하나로 절 안의 승려들을 통솔하고 여러 사무를 총람하는 직명으로 대체로 덕이 높고 나이 많은 이가 임명되었다고 한다.(강인구 외, 2003)

참고문헌

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2002,『譯註 三國遺事』, 이회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백엄사석탑사리)
伯嚴寺石塔舍利
開運三年丙午十月二十九日 康州界任道大監柱貼云 伯嚴禪寺坐草八縣[今草溪] 寺僧偘遊上座 年三十九云 寺之經始則不知 但古傳云 前代新羅時 北宅廳基捨置玆寺 中間久廢 去丙寅年中 沙木谷陽孚和尙 改造住持 丁丑遷化 乙酉年 曦陽山兢讓和尙來住十年 又乙未年 却返曦陽 時有神卓和尙 自南原白嵓藪 來入當院 如法住持 又咸雍元年十一月 當院住持得奧微定大師釋秀立 定院中常規十條 新竪五層石塔 眞身佛舍利四十二粒安邀 以私財立寶 追年供養條<第>一 當寺護法敬僧嚴欣伯欣兩明神及近岳等三位前 立寶供養條[諺傳 嚴欣伯欣二人 捨家爲寺 因名曰伯嚴 仍爲護法神] 金堂藥師前木鉢 月朔遞米條等 已下不錄

백엄사(伯嚴寺) 석탑 사리
개운(開運) 3년 병오(丙午, 946) 10월 29일 강주계(康州界) 임도대감(任道大監) 주첩(柱貼)에 “백엄선사(伯嚴禪寺)는 초팔현(草八縣)[지금의 초계(草溪)]에 있는데, 절의 스님 간유(偘遊) 상좌(上座)는 나이가 39세이다.”라고 하였다. 절을 짓기 시작한 때는 알 수 없으나, 다만 고전(古傳)에 이르기를, “전대(前代)인 신라시대에 북택(北宅)에서 집터를 희사하여 이 절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중간에 오랫동안 폐사되었는데, 지난 병인년(丙寅年, 906)에 사목곡(沙木谷)의 양부(陽孚) 화상(和尙)이 고쳐 짓고 주지를 하다가 정축년(丁丑年, 917)에 세상을 떠났다. 을유년(乙酉年, 925)에 희양산(曦陽山) 긍양(兢讓) 화상이 와서 10년을 머물다가 다시 을미년(乙未年, 935)에 희양산으로 돌아갔다. 이때 신탁(神卓) 화상이 남원(南原) 백암수(白嵓藪)에서 와서 이 절에 들어가 법에 따라 주지를 하였다. 또한 함옹(咸雍) 원년(1065) 11월에 이 절의 주지 득오미정대사(得奧微定大師) 석수립(釋秀立)이 절에서 늘 지켜야할 규칙 10조를 정하고 새로 5층 석탑을 세워 진신 불사리 42낱을 가져다 봉안하였다. 사재(私財)로써 보(寶)를 만들어 해마다 공양할 것을 제일로 하고, 이 절에서 불법을 수호하던 존경받는 스님 엄흔(嚴欣)과 백흔(伯欣) 두 명신(明神)과 근악(近岳) 등 세분 앞으로 보를 세워 공양할 것[세간에 전하기를, 엄흔과 백흔 두 사람은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이름을 백엄(伯嚴)이라 하였고, 이에 호법신이 되었다고 한다], 금당의 약사여래 앞 나무 바리때에는 매월 초하루마다 쌀을 바꾸어 넣을 것 등이었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