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성

평양성

분류 문학 > 국가 > 고구려

기본정보

고구려의 도성

일반정보

고구려 고국원왕 4년(334)에 증축한 고구려의 도성

평양성 본문 이미지 1

전문정보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4년(334)조에는 가을 8월에 평양성을 증축하였다고 하였다. 평양성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삼국사기』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1년(247)조에 보인다. 그에 따르면 “왕은 환도성이 난을 겪어서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 사직을 그 곳으로 옮겼다.(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고 한다. 그러나 동천왕대에는 낙랑군이 아직도 토성동 일대를 중심으로 한 평양 지방에 건재하고 있었으므로 지금의 평양으로 천도하였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 결국 현재의 평양시와 평양성의 위치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평양성을 지금의 강계읍(江界邑)으로 비정하였다. 당시에는 고구려의 도읍이 일시적인 피난도시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므로 국내성의 대안(對岸)에 위치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강계가 여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국원왕 때도 마찬가지로 강계가 평양성이었다고 보았다.(이병도, 1976)

334년에 증축한 평양성을 현재 평양의 청암동토성(淸岩洞土城)으로 비정하고 넓게는 청암동토성의 중심산성으로 추측되는 평양성의 북성까지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여기서는 청암동토성의 축조연대가 그 곳에서 출토된 수막새 등의 유물로 보아 5세기 초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보고, 평지토성인 청암동토성과 중심이 되는 산성인 평양성의 북성이 한 조를 이룬 것으로 추측하였다. 그리고 이는 당시 평양 지방의 중요도를 짐작케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민덕식, 1989)

미천왕 때 고구려에 의해 낙랑군이 패퇴한 이후 고구려가 평양 지역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인 점을 고려하여 고국원왕 때의 평양성을 지금의 평양시로 보기도 한다. 낙랑군을 몰아낸 것은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고려할 때 고구려가 낙랑의 중심지였던 평양에 성을 수축하고, 왕이 그 근처에 옮겨 머무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물론 낙랑이 패퇴한 이후에도 여전히 그 잔존세력이 있었을 것임을 인정할 수 있으나, 오히려 그러한 점이 이 지역에 대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토록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하였다.(신동하, 1988)

이와 비슷한 논지에서 334년에 증축한 평양성을 현재의 평양 지역으로 추정하면서, 313년에 낙랑군 지역을 장악한 후 지역 경영에 본격적으로 나선 고구려 정권의 의지를 보여주는 기사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적극적인 경영은 당시 대방군 지역으로 영역을 확장해 가는 백제의 동향과 관련이 있으며, 안악 3호분의 피장자인 동수(冬壽)의 존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가 과거 낙랑․대방군 지역에 대해 본격적인 지배에 나섰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고국원왕 13년(343)에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천도한 것도 전연(前燕)의 침입으로 국내성이 황폐화되었음을 고려할 때, 평양성은 지금의 평양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하였다.(임기환, 2007)

참고문헌

이병도, 1976,『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신동하, 1988,「高句麗의 寺院 造成과 意味」『韓國史論』19,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민덕식, 1989,「故國原王代 平壤城의 位置에 관한 試考」『龍巖車文燮敎授華甲紀念史學論叢』
임기환, 2007,「고구려 평양 도성의 정치적 성격」『韓國史硏究』137.

관련원문 및 해석

第十六 國原王 [名釗 又斯由 或云岡上(王) 辛卯立 理四十年 (甲午)增築平壤城 壬寅八月移都安市城 卽(丸)都(城)]
제16 국원왕 [이름은 쇠 또는 사유로 혹은 강상왕이라고도 한다. 신묘년에 즉위하여 40년간 다스렸다. 갑오년에 평양성을 증축하였다. 임인년 8월에 도읍을 안시성으로 옮기니, 즉 환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