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명왕

문자명왕

분류 문학 > 국가 > 고구려

기본정보

고구려 제21대 왕.
생몰년 : ?-519
재위기간 : 491-519

일반정보

이름은 개운(个雲) 혹은 고운(高雲)이며 아버지는 고추대가(古鄒大加) 조다(助多)이고 할아버지는 제20대 장수왕이다.

전문정보

『삼국유사』왕력에서는 이름을 명리호(明理好) 또는 개운(个雲)․고운(高雲)이라고 하였으며『삼국사기』권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즉위년조에서는 이름을 나운(羅雲)이라 하고 장수왕의 손자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고추대가(古雛大加) 조다(助多)인데, 조다가 일찍 죽자 장수왕의 대손(大孫)이 되었고, 장수왕이 재위 79년만에 죽자 즉위했다고 하였다.

문자명왕 7년(498)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였다. 장수왕의 정책을 계승하여 남조의 제(齊), 양(梁), 북조의 북위(北魏)에 대한 양면외교를 전개하고 국제적으로 고구려의 지위를 확고하게 유지하였다.

문자명왕대의 대북위 관계에 대해서는 양국이 화평한 교류를 지속하였는데 이는 각자의 대외 정세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고구려는 신라나 백제 등과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위와의 관계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북위 역시 잦은 반란을 겪고 남조의 양(梁)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주변제국에 대한 영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이러한 서로의 필요가 맞아떨어져 양국은 표면상으로는 충돌없는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것은 고구려 양단외교의 한 모습이라고 하였다.(김진한, 2006)

문자명왕은 재위 27년(519)만에 죽었는데, 아들 흥안(興安)이 뒤를 이어 고구려 제22대 안장왕(安藏王)이 되었다.『삼국사기』권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28년조(519)에는 왕이 죽었는데 북위(北魏)의 영태후(靈太后)가 동당(東堂)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고, 왕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에 책봉했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김진한, 2006,「文咨王代의 對北魏外交 -北魏 孝文帝․宣武帝의 對外政策과 關聯하여」『韓國古代史硏究』44.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十一文咨明王 [名明<理>好 又个雲 又高雲 壬申立 理二十七年]
제21 문자명왕 [이름은 명치호로 또는 개운 혹은 고운이라고도 한다. 임신년에 즉위하여 27년간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