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헌강왕, 용왕

처용-헌강왕, 용왕

분류 문학 > 초월적 인물형 > 이인(異人)형

• 갈래 : 전설
• 시대 : 삼국
• 신분 : 관료
• 지역 : 영남
• 출처 : 한국구비문학대계 (94)
• 내용 :
처용암(處容岩)은 울산시 황성동 세죽마을과 울주군 온산면 처용리 사이에 흐르는 내황강이 바다와 만나는 자리에 있는 돌섬 바위이다.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 때는 태평성대였는데, 어느 날 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동주지방(東州地方)에 바다 경치를 구경나왔다. 경치를 구경하는 도중에 학의 무리들이 산에 서식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학성(鶴城)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곳에서 조금 쉬고, 처용암에 있는 해변에 갔다가, 경주로 돌아가려 하는데 갑자기 짙은 운무(雲霧)가 끼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왕이 놀라서 “이게 무슨 조화냐”하고 일관(日官)에게 물으니, 일관이 용왕의 노여움으로 인한 조화라고 대답했다. 왕은 “동해 용왕의 노여움 때문이라면 용왕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절을 지어 주어라.”라고 명했다. 그러자 짙은 운무가 개였는데 이로 인해 그곳의 지명이 개운포(開雲浦)라 하였다. 운무가 개이자 동해 용왕이 아들 일곱을 데리고 왕 앞에 나타나 그 덕을 칭송하였다.

왕은 그 중에 한 아들을 데리고 경주로 갔는데 그가 처용이다. 왕은 그에게 춤과 노래를 관장하는 업무를 맡겼고 그의 마음을 잡아두기 위해 신라 장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와 결혼을 시켰다. 하루는 처용이 늦게까지 일을 하고 집의 침실에 들어와 보니 다리가 넷이었다. 처용은 “동경 달 밝은 밤에 밤들이 노닐다가, 돌아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네해로다. 둘은 내해였지만 둘은 뉘 해인고 본디는 내해였지만 잃었으니 어쩔꼬”라는 노래를 부르며 자리를 물러났는데, 그 다리는 바로 역신(疫神)의 것이었고, 역신이 인간으로 변해 아내를 범한 것이었다. 역신은 처용이 태연하게 물러나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처용 앞에 나와 절을 하고 사죄하면서 “공의 너그러운 관용에 제가 항복합니다. 앞으로 공의 형상만 그려진 곳이라 할지라도 제가 침범하지 않겠습니다.”라며 물러갔다고 한다.

이 일로 신라에서는 정초에 처용의 얼굴을 그려 문에 높이 거는 풍속이 생겼다. 그 뒤에 왕명에 의해서 울산의 문수산의 동쪽 기슭(영축산(靈鷲山) 혹은 영취산) 처용암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원찰(願剩)을 세웠다. 처음에는 용왕 부부끼리 소위 방사(房事)도 가능하게 해 준다는 의미로 신방사(新房寺)라 하였는데, 절 이름이 좋지 않다하여, 바다를 바라본다는 의미의 망해사로 바꾸었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고, 탑모양의 부도(浮屠) 두 기가 복원되어 보물로 남아 있다. 처용암은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으로 일컬어지던 장소로, 큰 난리가 난다거나 큰 자연재해가 생기면 의례히 누군가가 처용암에 암장(暗葬)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파보면 시체가 나오곤 했다.

연관목차

448/1461
처용-헌강왕, 용왕 지금 읽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