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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자료

• 명 칭 : 말
• 시 대 : 조선 후기(19세기 말~20세기 초)
• 설 명 : 인간에게 중요한 가축의 하나로, 전세계에서 널리 사육되고 있다. 옛날에는 인간의 식량을 위한 사냥의 대상이었으나, 그후 군마(軍馬)나 밭갈이에 이용되었고, 최근에는 주로 승용(乘用)이나 스포츠용으로 이용된다.
한국에는 옛날부터 향마(鄕馬)와 호마(胡馬)라는 2종류의 말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다. 향마는 '과하마(果下馬)' 또는 '삼척마(三尺馬)'라고도 하였는데, 석기시대부터 신라에 이르는 동안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말로서, 과수나무 밑을 타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왜소한 나귀와 비슷한 품종이다. 이 품종은 BC 3세기경에 북한 지방에 문화적 영향을 끼친 스키타이 문화와 함께 들어온 고원형(高原型) 타르판말이 그 조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마는 과하마보다 조금 큰 중형의 말로서, 그후 몽골과의 교류는 물론 특히 여진(女眞)을 통해서 들어온 북방계 말의 호칭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존하는 한국의 재래마(在來馬)는 조랑말로 대표되는데, 이 품종은 타르판말에서 유래되는 향마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혈통, 특히 몽골말이나 아랍계의 대원마(大宛馬)에서 영향을 받은 품종일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에서의 말 사육은 선사시대부터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되나, 문헌상으로는 부여·옥저·고구려 등에서 이미 목장을 설치하여 소·돼지와 더불어 말의 목양(牧養)이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우경(牛耕)의 시작과 더불어 기마전(騎馬戰)의 보급으로 말의 수요가 늘어나 우마목장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우마를 중심으로 한 국영·민영 목장이 전국에 174개소에 이르게 되어 말에게 먹일 사료가 큰 문제가 되자 중국에서 목숙(개자리)을 수입해 이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고려에서는 초기부터 획기적인 축마제도를 갖추어 1025년(현종 16)에 목감양마법(牧監養馬法), 1159년(의종 13)에 축마요식(畜馬料式)을 제정하여 말을 사용 목적과 종류에 따라 전마(戰馬)·잡마(雜馬)·빈마(牝馬)·파부마(把父馬)·별립마(別立馬)·어마(御馬)·반마(伴馬)·상립마(常立馬) 등으로 구분하고, 이를 청초기(靑草期:4~9월)·황초기(黃草期:1~3월, 10~12월) 등 계절에 따라 사료의 품종과 양에 차이를 두어 사육하는 등 축마의 과학화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축마체제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도 '말의 생산은 나라를 부(富)하게 한다', '나라의 부(富)는 말의 수로써 결정된다'는 기치 아래 말의 증산에 힘써 전국에 53개소(세종 때)의 국영 목마장을 설치하고, 말의 수에 따라 목부(牧夫)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말의 증산정책에 크게 힘을 기울여도 목축류 가운데 말의 수요가 가장 많아 말의 공급 문제는 항상 위정자들의 고민거리로 대두되었다. 이 당시의 말의 용도는 군사상의 전마(戰馬)와 통신용의 역마(驛馬), 교통·운반·교역용 등으로 다양하였을 뿐 아니라 식용으로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궁중과 관아에서 말고기의 수요가 늘게 됨에 따라 말의 명산지인 제주에서 건마육(乾馬肉)을 공물(貢物)로 바치게 하기도 하였다. 말은 이 밖에도 가죽·털·힘줄[馬筋]은 가죽신·장신구 등에 사용되었고, 갈기[馬住]·꼬리는 갓 또는 관모(官帽:住帽·住笠 등)로 쓰였으며, 마분(馬糞)은 비료·약용·마분지(馬糞紙)의 원료나 연료로도 쓰이는 등 부산물의 용도도 다양하였다.

※ 자료참조 : 시스윌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