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음악

한국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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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국 민족의 음악.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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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특성
  2. 음계
  3. 장단
  4. 고대의 한국음악
  5. 삼국시대의 음악
  6. 통일신라시대의 음악
  7. 고려시대의 음악
  8. 조선시대의 음악
  9. 서양음악 수용 및 발전
    1. 개요
    2. 개화기
    3. 일제강점기
    4. 8·15해방 이후

애초에 국어나 국사와 같은 개념으로 우리의 전통음악만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어왔으나 현재는 2가지 의미로 일반화되었다. 하나는 전통사회의 음악적 전통을 잇는 전통음악을 뜻하며 다른 하나는 8·15해방 이후 변화된 음악환경에서 서양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이 추구해온 민족적 성격의 음악을 가리킨다. 오늘날 이러한 2가지 의미의 한국음악이라는 말은 민족을 염두에 두고 추구하는 음악활동 모두를 포함하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음악이라는 말은 우리 민족의 문화적 동질성을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한국인의 음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특성

한국음악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라고 한다면 장단과 결합된 여러 가지 연주기법을 들 수 있다. 같은 음계로 구성된 선율이라도 장단구성에 따라, 그리고 음을 흔들고 당기고 흘러내리며 꺾는 기법 등을 사용함에 따라 연주 표현상의 다양한 변화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연주기법(시김새)은 각 지방과 계층의 음악적 특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한국음악의 또 하나의 특징은 작곡자와 연주자가 분리되지 않은 연주전통에서 기인하는 새로운 음악창작방식이다. 새로운 음악은 연주자가 기존의 음악을 변주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한국의 전통음악에는 많은 파생곡과 변주곡이 있다. 이렇게 파생된 곡들은 정착되어 제자들에게 전해지고, 또 제자들은 스승의 곡을 변주하는 과정을 거쳐 새 음악을 생성시키기도 했다.

조선 후기 산조음악의 등장과 유파의 형성과정은 모두 이러한 연주전통의 음악적 특성과 관련된다.

음계

한국음악의 음계는 5음음계로 구성된다. 고악보의 기록으로 전하는 평조·계면조의 음계도 이 안에 포함된다. 이러한 5음음계는 도음계·레음계·미음계·솔음계·라음계로 불리며 모두 장2도 음정과 단3도 음정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도음계는 도·레·미·솔·라 5음으로 구성되며 〈서도놀량〉 등을 그 대표곡으로 꼽을 수 있다. 레음계는 레·미·솔·라·도 5음이며 2도-3도-2도-3도 음정간격으로 구성되었다. 서도민요의 〈수심가〉를 비롯해서 〈배따라기〉·〈자진배따라기〉·〈산염불〉·〈자진산염불〉 등의 민요, 〈초한가〉·〈공명가〉 등의 잡가, 영산회상(靈山會相)·가곡 등 상당수의 정악곡, 그리고 산조의 평조 등이 이 레음계로 구성된 음악이다.

미음계는 두갈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경상도와 강원도 지방의 음악적 특징인 메나리조의 음계로 미·솔·라·도·레 5음음계의 음악이고 다른 하나는 호남지방의 음악을 특징으로 하는 계면조의 떠는음과 꺾는음으로 구성된 미(떠는음)·솔·라·도-시(꺾는음)·레의 육자배기음계이다. 〈정선아리랑〉·〈강원도아리랑〉, 승려들의 독경 등이 메나리조음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판소리·산조 등의 가락은 육자배기음계로 구성되어 있다.

솔음계는 고악보 기록으로는 평조로 알려져 있고 솔음계로 구성된 음악은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중 보태평, 〈아리랑〉·〈창부타령〉·〈청춘가〉·〈태평가〉와 경기민요인 〈경기산타령〉 등이 이 음계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라음계는 고악보상의 많은 음악이 계면조로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실제 연주에서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현재 라음계로 구성된 음악은 종묘제례악 중 정대업(定大業)·수제천(壽齊天)이 있고 민요로는 〈한강수타령〉·〈경복궁타령〉·〈오봉산타령〉·〈몽금포타령〉 등이 이 라음계로 구성되어 있다.

장단

장단은 정악곡·가곡·가사·시조·판소리·무속음악 등의 한국음악의 박자·빠르기·리듬의 주기를 지정해주는 것으로 보통 장구나 북과 같은 타악기의 고법으로 나타난다. 다만 산조의 장단명은 악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쓰이기도 한다.

정악에 쓰이는 장단은 상영산·세영산·도드리·타령·취타·길군악·수제천 등이며 이들은 주로 궁중정재의 반주음악으로 쓰인다. 가곡에는 16박장단과 10박장단이 쓰였으며, 가사에는 도드리장단과 5박장단이 쓰였고, 시조에는 5박장단과 8박장단을 섞어친다. 판소리·산조에 사용되는 장단에는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엇모리·엇중모리가 쓰였다.

진양이나 중모리는 서술적 장면에 주로 쓰이고 휘모리는 매우 분주하게 움직이는 장면에 쓰인다. 선소리산타령·잡가·민요 등은 지역적 특성에 따라 약간씩 다른 장단이 쓰인다. 여기에는 세마치·중모리·볶는타령·굿거리가 주로 쓰이고 도드리·엇모리·진양 등도 가끔 쓰인다.

농악·무악은 음악적 특성이 같다고 해도 지역마다 장단명이 달라 매우 독특한데 대개 굿거리형·자진모리형·타령형·단모리형·당악장단형 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 농악). 경기농악에는 길군악칠채·굿거리·삼채덩덕궁이·자진가락·마당일채, 호남농악에는 오채질굿·좌질굿·외마치굿·풍류굿·삼채·세산조시·호호굿, 영남농악은 길군악·무정작궁·덧배기·다드래기·삼채·정적궁이 등이 쓰인다.

무악에는 평안도 굿에서는 푸념·비나수·덕담·영산·돈실러가는막, 황해도 굿에서는 긴만세·자진만세·산유장단·기상·쑹거·벅구·삼현·만·덕담·돈실러가는막, 경기북부 굿에서는 청배·만수받이·굿거리·노랫가락·허튼타령·당악, 경기남부 굿에서는 청배섭채·도살풀이·모리·푸살·가래조·덩덕궁이·긴염불·굿거리·허튼타령·당악·진쇠·올림채·반설움·겸마치·부정놀이, 충청도와 전라북도 굿에서는 안진반·외잡구·살풀이·덩덕궁이·신임·중모리·중중모리, 전라남도 굿에서는 흘림·안땅·무장구·진양·덩덕궁이·살풀이·대당놀이·중모리·중중모리, 경상도 서남부 굿에서는 불림·덩덕궁이·올림채·제석풀이·푸너리·대너리·조너리, 강원도와 경상도 동해안지방 굿에서는 청배·상애짖기장기·도속잡는장기·드러치는장기·전채질장기·예주끼장기·정적기·화청장기, 제주도 굿에서는 군웅연물·성주굿연물·도신연물·누진연물·장판·자진연물 등이 쓰인다.

고대의 한국음악

〈후한서 後漢書〉·〈삼국지〉·〈수서 隋書〉 등 고대 중국문헌에 따르면 부여·고구려·예(濊)의 연중행사로 일정한 때 노래와 춤으로써 하늘을 섬기는 풍습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남녀노소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래하고 춤추고 술을 마시며 즐겼다고 한다. 한편 마한은 항상 5월과 10월에 신을 섬겼는데 놀 때의 절주는 마치 고대의 탁무와 비슷하다고 〈삼국지〉·〈후한서〉 동이전 마한조에 전한다.

〈동국여지승람 東國與地勝覽〉에는 웅천 풍습에도 4월과 10월 웅산신당에서 신을 맞아 산 아래에 모셔놓고 종고잡희하며 제사를 받들었다고 한다. 종고란 치고 두드리는 악기로 연주한 음악인 듯한데 이것은 굿의 성격을 띠고 있어 동해안별신굿이나 각 지방의 도당굿 등에 내려오는 유풍인 듯하다.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특히 변한·진한에는 현악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진한에는 슬(瑟)이 있어 그 모양이 축(筑)과 비슷했다고 한다. 변한·진한의 현악기 기록은 한국 현악기의 역사가 우륵·왕산악 이전에 시작되었음을 말해주며, 이는 〈삼국사기〉에서 중국의 칠현금이나 쟁의 수용에서 현악기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삼국시대의 음악

삼국시대 이전의 음악이 주술적이고 종교의식적 측면이 강했던 것에 비해 삼국시대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의식이나 왕실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또 불교가 전래되어 불교음악이 소개되었고, 서역과의 교류로 서역악기가 수입되었으며 삼국의 음악이 중국·일본에 소개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거문고와 완함(玩咸)이 춤의 반주에 쓰였음을 볼 수 있고, 안악고분에서는 한대(漢代)의 고취(鼓吹)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팔청리 고분벽화에서는 고취악대(鼓吹樂隊)가 배치되어 있고 그뒤에 여러 잡희를 연출하는 모습이 보인다.

〈향약잡영 鄕樂雜詠〉 5수에서는 금공을 가지고 재주를 부리는 금환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중국 진나라의 칠현금을 개조한 거문고가 등장한 것과 왕산악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는데, 안악3호분 후실 벽화에 보이는 현악기가 사실은 거문고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거문고는 귀족들의 개인생활에 여기(餘技)로 수용되는 한편, 막목(幕目)·횡적(橫笛)과 함께 편성되어 공연을 담당하여 외래음악 수용 이전의 고구려 음악문화를 대표했다. 431년(장수왕 19) 이후 고구려는 후위(後魏)와의 수교로 중국에 전래된 서역음악문화도 받아들였다. 백제는 중국 남송(南宋)·북위 등과 교류했고 6세기 무렵에는 고구려·신라와 함께 일본에 백제의 음악을 전했다. 〈일본후기 日本後紀〉에 전하는 백제음악의 내용은 궁꼬[箜侯]·마꾸모[莫目]·횡적(橫笛) 등으로 편성되어 대개 고구려 음악과 비슷하다. 특히 7세기초에 백제인 미마지가 일본에 기가쿠[伎樂舞]를 전하여 절을 중심으로 연행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백제에 기악무가 있어 일본에 전한 듯하다. 그런데 기가쿠는 중국 남조의 음악으로 내용은 불교이야기를 담은 가면무용극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양주별산대놀이·봉산탈춤 등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가야음악을 대표하는 것은 가야금이다. 〈삼국사기〉 악지에 따르면 가야국 가실왕이 중국악기인 쟁을 본떠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가야의 악사 우륵은 가야금 곡으로 12곡을 만들었는데 이를 배운 신라의 제자들은 우륵의 음악을 가리켜 "가락이 복잡하고 아정(雅正)하지 못하다"고 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우륵이 지은 음악은 정악보다는 지방의 속악(俗樂)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는 가야국이 망한 뒤 가야금을 받아들여 대표적인 신라음악으로 발전시켰다. 가야금 외에 가(笳)와 춤이 신라음악에 있었는데 이 음악은 고구려·백제에 비해 소규모로 행해졌다.

통일신라시대의 음악

삼현삼죽으로 대표되는 통일신라의 음악은 백제·고구려 음악뿐만 아니라 당나라 음악과 서역음악을 받아들여 폭넓은 음악문화를 형성했다. 664년(문무왕 4)에는 웅진부성에 주둔하던 당의 군진에 구일과 성천 등 28명을 보내 당악을 배우게 했다.

693년(효소왕 2)까지 거문고는 만파식적과 함께 신기로 소중히 간직되었다가 헌강왕 이후에 이르러서 겨우 널리 퍼져 연주되었다. 특히 888년(진성여왕 2)에 편찬되었다고 전하는 〈삼대목 三代目〉에는 '사뇌'라는 향가가 있어 이미 통일신라 이전부터 이 노래가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귀족층인 옥보고는 거문고의 독특한 기풍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이밖에 9세기 무렵에는 진감선사가 중국에서 범패를 배워와서 옥천사에서 많은 제자들에게 어산을 가르쳤다고 한다. 어산 외에도 포교를 위한 불교음악인 무애와 거사소리가 있었다. 무애는 고려시대에 궁중정재로 채택되었고 거사소리는 〈회심곡〉 계통의 서사가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음악

통일신라 때부터 전해지던 당악은 고려 때는 더욱 풍성해져 광종 때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악공을 청하고 1076년(문종 30)에는 대악관현방(大樂管絃房)을 정했다. 이때 들어온 당악정재는 포구락(抛毬樂)·구장기별기(九張機別技)·왕모대가무(王母隊歌舞)·헌선도(獻仙挑)·수연장(壽延長)·오양선(五羊仙)·연화대(蓮花臺)·답사행가무 등이며, 향악정재와는 달리 죽간자(竹竿子) 2명이 무원을 인도하여 구호(口號)를 읊으며 입퇴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송나라의 새 음악을 받아들인 후 당나라 속악은 폐용되고 1114년(예종 9) 송나라의 등가(登歌)·헌가(軒架) 악기가 수입되고 1116년 대성아악이 수입되었다. 또 음악에 수반되는 일무(佾舞)와 무의·의관·의물이 함께 들어왔는데 이로써 고려의 음악은 크게 재편되었다. 이는 송나라 휘종에게 주청하여 받아들여진 것으로 아악을 청하러 간 사절단은 송나라에 머물면서 아악을 교습받고 대성부에서 펴낸 악보를 받아왔다. 그러나 음악과 일무가 우리나라에 잘 맞지 않아 형식만 따르는 폐단이 있기도 했다. 후에 이 음악은 원구(圓丘)·사직(社稷)·선농(先農)·선잠(先蠶)·공자묘(孔子廟) 등의 제향악에 채택되었다. 고려의 향악은 속악(俗樂)이라 불렸는데 〈고려사〉 악지에 통일신라의 전통을 계승하여 신라악·고구려악·백제악 각각 5곡이 이때까지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향악). 특히 사뇌의 전통이 계승되었고 중기에는 〈정과정 鄭瓜亭〉이라는 금곡(琴曲)이 나타난다. 〈정과정〉은 진작(眞勺)의 전반부와 같아서 그 음악내용도 비슷할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후기 향악의 가장 큰 특징은 별곡(別曲)이라는 독특한 형식의 음악이 생겨난 것인데 8장의 〈한림별곡〉이나 13장의 〈청산별곡〉에 이르기까지 여러 장으로 된 음악이 나타났다. 또 하나의 특징은 1장의 음악으로 반복되는 유절형식의 장가(長歌)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서경별곡〉·〈만전춘〉·〈이상곡〉·〈쌍화점〉 등의 속악은 조선 초기에 가사가 남녀상열지사라는 이유로 잡스럽게 여겨져 가사를 잃었고 다만 그 음절이 조선 초기 궁중음악으로 차용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음악

조선시대의 음악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까지를 조선 전기 음악, 고종 때까지를 조선 후기 음악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음악의 특징은 신악(新樂)의 창작, 경돌[磬石]에 의한 편경(編磬)·편종(編鐘)의 제작, 거서 생산에 의한 율관(律管)의 제작, 정간보(井間譜)의 창안, 〈악학궤범 樂學軌範〉의 찬정 등을 들 수 있다. 조선 왕조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의 하나로 연등회를 폐지하고, 아악을 재정비하여 아악 발전에 힘썼다. 또 세종 때 율관·편종·편경을 제작했는데, 그 이전에는 중국에서 이들 아악기를 들여 와서 사용했다.

1425년(세종 7) 해주에서 율관 제작에 필요한 거서가 생산되면서 중국의 황종음을 기준으로 한 율관의 제작이 이루어졌다. 1426년에는 남양에서 경돌이 발견됨으로써 편종·편경을 제작했다. 그러나 이때 만들어진 율관은 명나라의 황종음보다 높아 세종은 거서 대신 후기법(侯氣法)을 사용한 율관을 몇 차례 시험 제작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중국의 황종율관을 사용했다.

정도전은 납씨가(納氏歌)·정동방곡(靖東方曲)·문덕곡(文德曲)·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籙)·수명명(受明命)·하황은(賀皇恩) 등의 가사를 지었으나, 이때의 곡조는 고려 후기의 〈청산별곡〉·〈서경별곡〉 등의 향악과 중국계 아악을 그대로 빌어 쓰고 있었다.

세종은 이 곡들만으로는 조선의 건국대업을 칭송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기고 손수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를 지었고, 신악 여민락(與民樂)·치화평(致和平)·취풍형(醉豊亨)·보태평·정대업·창수곡(創守曲)·경근곡(敬勤曲) 등을 창작했다. 그후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많은 음악을 잃어버리고 지금은 여민락·보태평·정대업만이 전한다. 본래 이 세 음악은 모두 회례연(會禮宴)의 악무(樂舞)로 쓰였으나 여민락은 임금의 거둥 음악으로 채택되고, 보태평·정대업은 세조 때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어 오늘에 이른다.

세종 때 기보법인 정간보가 창안되었는데 〈세종실록〉 악보는 1행 32정간, 〈세조실록〉 악보는 1행 16정간으로 되어 있다.

정간보는 매 정간에 시간단위를 표기하는 유량악보(有量樂譜)인데 음길이는 음이 쓰인 정간 뒤에 빈 정간의 많고 적음으로 음길이의 길고 짧음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4음 1구로 된 아악의 기보에는 별 필요가 없었으며 실제 〈세종실록〉 아악보에는 정간보를 사용하지 않았다. 정간보는 불규칙한 시가를 가진 향악보의 기보에 아주 적합한 것이었으며 〈시용향악보 時用鄕樂譜〉·〈대악후보 大樂後譜〉에 쓰였고 〈금합자보 琴合字譜〉에서처럼 합자보를 병용하기도 했다.

1493년(성종 24) 성현(成俔)·박곤(朴)·유자광(柳子光)·신말평(申末平)·김복근(金福根) 등은 칙령에 의해 〈악학궤범〉을 편찬했다.

편찬 동기는 각종 의궤(儀軌)와 악보가 해가 지나면서 닳고 잘못 전하는 것이 많아 이를 교정하기 위함이라고 서문에 밝히고 있다. 〈악학궤범〉이 여러 악서와 다른 특징은 음악사 서술을 생략하고 실용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서술했다는 점이다. 12율의 결정법, 등가악·헌가악의 중심음, 악기진설, 정재의 진퇴, 악기제조법, 조현법 등을 구체적으로 다루어, 실제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으로 산실된 악제는 〈악학궤범〉을 기준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지면서 국가의식에 수반되던 음악의 규모가 축소되어, 정악이 완서(緩舒)를 강조하고 무박자화된 반면 가사·가곡·시조 등은 빨라졌으며, 당악과 향악의 구분이 없어지고 향당교주의 형식으로 바뀌었으며, 줄풍류·대풍류 등 사림·중인계층의 음악이 발달했고 음악전반에 있어서 변주곡·파생곡이 생성되었다.

음악규모가 축소된 흔적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아악의 경우 〈악학궤범〉에서 62명이었던 등가 악생의 수가 조선 후기에는 20명으로 줄었고, 헌가 악생의 수는 124명에서 22명으로 줄어들었다. 종묘제례악은 〈악학궤범〉에서 36명의 등가 악공의 수가 20명으로, 헌가 악공은 72명에서 22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밖에 전정헌가 악공은 59명에서 40명으로, 전정고취 악공은 50명에서 26명으로, 전부고취 악공은 50명에서 40명으로 줄어들었다.

정악 자체의 변화로는 음악의 속도가 완서함을 강조하는 경향이 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현금신증가령 玄琴新證假令〉(1680경)의 여민락은 10장의 음악을 완전하게 담고 있었는데 〈어은보 漁隱譜〉(1779) 이래로 우조 여민락은 7장이 기록되어 있으며, 〈삼죽금보 三竹琴譜〉에서는 1~4장은 20박 1장단이고 4장 이하는 10박으로 되어 있다. 〈송씨이수삼산재본금보 宋氏二水三山齋本琴譜〉의 보허사는 〈한금신보 韓琴新譜〉부터 장별 구분이 생겼고, 20박 1장단이었던 것이 〈유예지 遊藝志〉부터 5~8장은 10박 1장단으로 변화했다. 이같은 현상은 정악의 음악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완서함을 강조하는 경향을 고집한 것이다.

반면 영산회상과 같은 음악에는 많은 파생곡과 변주곡이 생겨났다. 영산회상은 〈어은보〉 이후 상영산의 파생곡인 영산회상갑탄·세영산·가락덜이 등이 파생되었다. 이러한 파생곡들은 음악을 더욱 풍성하게 했으며 그 이후로도 다양한 재창작을 이루어내는 바탕이 되었다.

본래 당악은 좌방에 속하던 것인데 성종 이후 중국계 아악이 좌방에 소속되면서 당악이 우방의 향악에 포함되었다.

이후로 당악은 점차 향악화되었다. 지금까지 전하는 향악화된 당악곡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보허자·낙양춘뿐이다. 이후 당악은 점차로 쇠퇴하여 겨우 형식만 유지되다가 1910년 이후로는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의 향악만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이밖에 당악의 향악화의 한 경향으로 당악기였던 당적·당비파·아쟁·퉁소 등은 향악기화되었으며 당피리만 〈악학궤범〉 시절 원형을 현재까지 지니고 있다.

가곡도 조선 후기로 갈수록 곡의 수가 줄어드는 대신 많은 변주곡이 생겨났다. 〈양금신보〉 때는 만대엽·북전·중대엽·감군은 등의 곡이 있었는데, 〈신증금보〉 이후 감군은, 〈어은보〉 이후 만대엽, 〈유예지〉 이후 북전이 없어졌다. 〈삼죽금보〉 이후에는 중대엽도 연주하기 어렵다고 하여 실제 연주에서 제외되었고, 〈양금신보〉에 처음 등장한 삭대엽만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가곡은 점차적으로 느린 만대엽은 사라지고 빠른 곡인 삭대엽만이 남게 되었다. 삭대엽에는 초수대엽·이수대엽·삼수대엽 등 많은 변주곡이 생겨났다. 현재 전창되는 가곡은 하규일의 법제로 평조·계면조에 남창 24곡, 여창 14곡이 전한다.

가사는 조선 중기 풍류방의 가객 등에 의해 발달하기 시작하여 조선 후기 〈삼죽금보〉에 이르러 일반금보에 실리기 시작했다. 가사는 음악보다 사설이 중심이 되는 음악으로 장구·대금의 반주로 노래되었다. 〈삼죽금보〉에 맨 처음 보이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전하는 12가사를 보면 백구사(白鷗詞)·황계사(黃溪詞)·어부사(漁父詞)·춘면곡(春眠曲)·죽지사(竹枝詞)·상사별곡(相思別曲)·길군악·권주가(勸酒歌)·처사가(處士歌)·양양가(襄陽歌)·수양산가(首陽山歌)·매화가(梅花歌) 등이 있다.

시조 시(詩)의 유래는 고려 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시조가 노래로 불린 것은 조선 영조 때부터로 추측된다. 최초의 시조 악보는 〈유예지〉·〈구라철사금자보 歐邏鐵絲琴字譜〉이다. 시조 역시 조선 말기로 갈수록 많은 파생곡과 변주곡이 생겼는데, 〈삼죽금보〉부터는 지름시조가 등장했으며, 그뒤 중허리시조·엇시조·엇엮음시조·사설시조 등 많은 파생곡이 생겼다.

조선 후기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민속음악의 생성 및 발전이다.

특히 판소리와 산조는 오늘날까지 한국전통음악의 대표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판소리는 광대 1명이 장구 반주에 맞추어 소리와 아니리로 노래하는 것이다. 19세기 중엽에는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끼타령〉·〈적벽가〉·〈배비장전〉·〈강릉매화타령〉·〈옹고집전〉·〈변강쇠타령〉·〈장끼타령〉·〈무숙이타령〉·〈가짜신선타령〉 등 12마당의 판소리 곡이 형성되었다. 그후 곡의 수가 줄어들어 오늘날의 전승 5마당이 정착되었다.

신재효는 〈판소리사설집〉을 정리하여 〈춘향전〉·〈토별가〉·〈심청가〉·〈박타령〉·〈적벽가〉·〈변강쇠가〉 등 6마당을 실었고 1933년 이선유는 〈춘향가〉·〈심청가〉·〈화용도〉·〈수궁가〉·〈박타령〉 등 5마당을 정리하여 〈오가전집〉으로 엮었다. 사설은 여러 광대들이 부르면서 새롭게 개작·첨가되어 지금과 같이 방대한 내용이 되었다. 산조는 기악독주곡으로, 주로 남도소리의 시나위·판소리의 가락을 장단이라는 틀에 넣어 연주하는 즉흥성을 띤 음악이다.

19세기말 김창조에 의해 가야금산조가 만들어진 이후로 거문고산조·대금산조·해금산조·아쟁산조·피리산조 등이 만들어졌다.

민요는 농경사회에서 민중들 사이에 자연발생적으로 불려지던 노래를 일컫는다. 그러므로 특정한 개인의 창작이라기보다는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온 민중들의 삶의 노래라고 하겠다. 그러기에 민요는 그 노래가 불려지던 시대의 민중들의 삶과 정서를 사회적으로 반영하는 예술음악이라고 여겨진다.

민요의 기본적 형태는 민중들의 생산적인 활동과 관련이 있다. 일하면서 부르는 노동요는 민요의 최초의 형태이며 동시에 모든 민요의 모체라고 할 수 있다. 일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노래를 부르면서 일을 하면 박자에 맞추어 힘을 모을 수 있고 흥겨움에 힘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일의 고통을 잊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노동요는 일의 종류에 따라 농업노동요·어업노동요로 구분할 수 있는 집단노동요와, 주로 여자들이 혼자 일하면서 부르는 개인노동요가 있다.

근래에는 민요를 토속민요와 통속민요로 구분하는데 토속민요는 한 지역에 국한해서 불리는 노동요를 가리키고 통속민요는 직업적인 소리꾼들에 의해 불리는 세련되고 대체로 널리 전파된 민요를 가리킨다. 민요는 음악적으로 지역마다의 특성을 갖는다. 각 지방의 방언과 민요가락은 서로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 지방의 독자적인 특징에 따라 경기지방에는 창부타령조, 호남지방에는 육자배기조, 강원도·경상도 지방에는 메나리조, 평안도지방에는 수심가조, 황해도지방에는 산염불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서양음악 수용 및 발전

개요

한국에 서양음악이 언제 수입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합의된 정설이 없지만 크게 3가지 설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가장 널리 알려진 설로서, 〈한국양악 80년사〉를 기초로 하여 볼 때 서양음악의 시작은 1885년 아펜젤러·언더우드와 같은 서양선교사에 의한 찬송가 수입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초의 오선보에 기록된 악보가 출간되는 시기는 오선보에 기록된 찬송가가 출판된 1893년이 된다. 둘째, 서양식 군악대의 편성을 한국 양악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이다. 대한제국의 군악대가 편성된 시기는 1900년이며 F. 에케르트가 군악대 지휘를 위해 내한한 것은 1901년으로 찬송가가 수입된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조선 최초의 신식군대 안에 곡호대라는 서양나팔수 부대를 둔 것은 1881년으로 한국양악 역사는 훨씬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 조선 후기의 연행자들과 실학자들에 의한 서악 소개가 양악 수입의 기점이 된다는 주장이다. 앞의 두 시각은 한국 양악의 수입이 수동적인 자세였다는 관점인 반면, 이 주장은 매우 능동적으로 양악을 수입했다는 주장이다. 천주교 전래에 따른 서양 가톨릭 성가의 수입, 베이징[北京] 연행사를 통한 서양음악의 수입은 1880년대를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1661년 정두원은 명나라에서 보고들은 문물 가운데 서양음악이론을 소개했고, 1712년 김창업은 베이징에 다녀온 뒤 〈연행록 嚥行錄〉에서 오르간을 소개했고, 1795년에는 이덕무가 〈청장관전서〉에서 서양음악 원리를 약설했다.

특히 19세기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구라철사금자보〉 등에서 서양음악의 조·음계·장단 등을 서술했으며 이후 실학자들은 양금(洋琴)을 소개하고 그 사용법과 악보를 소개했다.

개화기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서양음악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하더라도, 개화기 이후의 한국은 외세에 많은 영향을 받은 만큼 한국의 서양음악 역시 외세의 힘에 의해 주도되었다.

최초의 악보가 있는 찬송가집은 1905~08년에 제작된 〈합동찬송가집〉이다. 서양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근대학교는 한국의 서양음악 발전에 큰 힘이 되었는데 연희전문학교·숭실전문학교 등에는 창가 과목이 포함되어 양악의 보급에 도움이 되었다. 그밖에 학교의 합창 활동이나 밴드 활동, 교회의 찬송 등도 양악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근대 학교의 창가는 비록 찬송가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일본 창가의 음제도를 서양음악의 장단조 체계에 맞게 개조하여 만든 것으로써 일본 음악과 깊은 관련이 있다. 초기의 창가는 민족의식을 노래한 것도 있었고 계몽의식을 일깨우는 것도 있었으나 일제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금지되었다. 그러므로 1910년 구한국 학부에서 발간한 〈학부 창가집〉은 이미 일본 군악조의 창가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1896년 민영환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여하고 돌아와 군악대의 창설을 주장했는데 1901년 2월 F. 에케르트를 중심으로 경성양악대가 창설되었다.

그후 이 양악대는 정부의 각종 의식에서 음악을 담당했고 파고다 공원에서 시민을 위한 음악연주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16년 에케르트가 죽은 후 백우용이 양악대를 지휘했으며 1919년 이후로는 경성양악대로 계승되었다가 얼마 후 해산되었다. 양악대는 연주회 등을 통해서 일반인들이 양악을 접하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일제강점기

1910년 한일합병으로 일제는 한국의 지배를 위해 한국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폈다.

각종 국가의식의 규모가 축소되면서 음악도 대폭 축소되어 1911년 장악과를 아악대로 개칭하고 모든 악사를 용원으로 격하시켰다. 악공도 점차 해고시켜 1915년에는 겨우 57명만이 남았다. 1922년 아악대를 다시 아악부로 개칭하고 40명으로 정원을 축소했다. 일본은 스스로 서양음악을 수입한 바 있으므로 한국 음악이 양악에 동화되는 것은 일본으로서도 바람직한 일이라 여겼다.

조양구락부에서는 신악과 구악을, 그 후신인 조선정악전습소에서는 서양악과·조선악과를 두었다.

이곳에서는 이후 한국 음악계에서 큰 활약을 한 김인식·이상준·홍난파 등이 배출되었다. 김인식은 조선정악전습소·배재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쳤고 기독교청년연맹(YMCA)을 중심으로 합창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상준은 휘문학교·보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민요의 오선보 채보에 힘써 〈조선속곡집〉·〈신속곡집〉을 펴냈다.

또한 음악교재 〈중등창가집〉·〈악리부중학창가집〉·〈보통악곡대요〉 등을 펴냈다. 홍난파는 조선정악전습소를 마친 뒤 도쿄 음악학원, 도쿄[東京] 고등음악학교를 마치고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음악만필〉·〈조선가요작곡집〉 등을 펴냈다.

1920년대에는 창가보다 가곡이 널리 불렸는데 서양 예술가곡을 본받은 홍난파의 가곡이 유명하다.

최초의 가곡은 〈봉선화〉(1920)이며 그밖에 〈옛동산에 올라〉·〈봄처녀〉·〈사공의 노래〉·〈성불사의 밤〉 등이 있다. 이때 대중가요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이애리수의 〈황성 옛터〉가 나왔으며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등은 창가나 가곡과는 다른 흐름을 형성했다. 또 음악잡지 〈삼광〉(1919) 이후 1925년 본격적인 음악잡지인 〈음악계〉가 창간되었다.

1930년대에는 윤극영이 〈반달〉·〈고드름〉·〈따오기〉 등의 동요를 발표했으며 홍난파는 〈조선동요 100곡집〉을 발간했고, 박태준도 동요곡집을 발간해 〈오빠생각〉·〈맴맴〉 등을 발표했다.

일본을 비롯한 미국·독일·이탈리아 등의 유학생들은 단순한 음악애호가의 수준을 넘어서 전문가로서 활동했다. 대표적 인물로는 홍난파·계정식·안병소·채동선·김원복·채선엽·이유선 등이다. 1936년에는 경성방송국이 개국하여 지금의 KBS 교향악단의 전신인 경성방송관현악단이 조직되어 서양 고전음악을 소개했다.

한편 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 등으로 일제는 전시체제를 강화하면서 음악활동은 점차 순수성을 잃어갔다.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에는 궁성요배와 기미가요의 제창이 의무화되었다. 1937년에는 문인들과 협력하여 〈황민애국가요〉를 만들기도 했으며 전시체제를 찬양하는 〈내일〉·〈붉은 꽃송이〉·〈전송〉·〈장성의 파수〉·〈지원병장행가〉 등의 가요가 만들어졌다. 이 노래들은 조선문예회 신작가요 발표회나 '황군위문조성 조선문예회' 신작발표, '총후반도의 애국가요·시국가요 피로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부민관에서 발표되었다.

1941년에는 조선음악협회를 비롯한 친일 음악단체가 결성되기도 했다.

8·15해방 이후

해방이 되자 음악계는 새로운 민족음악의 건설이라는 큰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음악단체가 결성되었는데 해방 후 3일 뒤에 결성된 조선음악건설본부는 김순남·신만·이범준 등을 중심으로 출범했으나 이 단체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동조한 음악가도 포함되어 있어 그 성격이 명확하지 않았으며, 그 한계로 얼마 되지 않아 해체되었다. 이후 김순남·이건우를 중심으로 하는 좌파 음악가들은 조선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을, 현제명·김성태를 중심으로 한 우파세력은 고려교향악협회를 결성했다.

조선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은 후에 조선음악가동맹으로 흡수되었고 이들은 주로 해방가요를 작곡했다. 고려교향악협회는 주로 교향악단활동을 했으며 미군정의 도움을 받으며 주로 순수음악활동을 했다. 1946년에는 고려교향악단에서 김생려·계정식 등이 탈퇴하여 서울관현악단을 결성했다. 이후 대한민국 단독정부가 들어서자 좌파계열의 활동은 금지되었고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자 월북하고 말았다. 이로써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음악의 질적 향상만을 도모하는 활동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고 좌익활동이 금지되자 이후 음악인들은 악단활동에 주력했다.

특히 해군정훈음악대는 1957년까지 음악인의 주요활동무대였으며 서울교향악단은 후에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개편되었다. 육군에서도 1953년 관현악단을 조직했다가 1956년 해체되었는데 해방 후 대부분의 인원은 KBS 교향악단으로 흡수되었다. 1952년 서울예술고등학교가 임원식의 주도로 개교해 이후 인력 배출에 큰 힘이 되었다. 1963년 서울국제음악제가 개최되었다. 이후 서울음악제·대한민국음악제·서울국제음악제 등 여러 음악제가 개최되어 한국음악의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