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악

아악

다른 표기 언어 雅樂

요약 고려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궁중에서 연주되었던 전통음악의 한 갈래.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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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래와 변천
    1. 고려시대
    2. 조선시대
    3. 지금의 아악
  2. 형식

중국에서 들여온 음악으로 향악·당악과 함께 궁중음악의 주류를 이루었다. 향악·당악은 우방악, 아악은 좌방악으로 구분하여 연주되었다. 조선 후기 이후 민속악에 대한 대칭개념인 정악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다.

유래와 변천

고려시대

아악이 처음 수입된 것은 고려시대인 12세기초이다.

1114년(예종 9) 고려의 사신 안직숭(安稷崇)이 송나라를 방문했을 때 송나라의 휘종은 공후(空候)·박판(拍板)·비파(琵琶)·쟁(箏) 등의 여러 신악기를 보내주었다. 고려의 예종은 하례사(賀禮使)로 왕자지(王字之)와 문공미(文公美)를 송나라에 파견했고 휘종은 이들이 귀국할 때 다시 아악기를 선물했다. 이때 들여온 아악기는 대성아악(大晟雅樂)의 연주를 위해 대성부(大晟府)에서 새로 제정한 아악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대성부에서 새로 만든 음악이라는 뜻으로 대성신악(大晟新樂)이라고도 한다.

송나라에서 보내준 대성아악의 아악기는 등가악기(登歌樂器)와 헌가악기(軒架樂器)로 나뉜다.

등가악기 중 편종(編鍾)은 정성(正聲) 16매(枚), 중성(中聲) 12매, 편경(編磬)은 정성 16매, 중성 12매, 일현금(一絃琴)·삼현금·오현금·칠현금·구현금 각 2매, 슬(瑟) 2매,지(篪)는 중성·정성 각 2매, 박부(搏附) 2매,축(祝), 어(敔), 휘번(麾幡:악기가 아님)이다. 헌가악기는 편종 9틀, 편경 9틀, 일현금 5매, 삼현금 13매, 오현금 13매, 칠현금 16매, 구현금 16매, 슬 42매, 지는 중성·정성 각 24매, 소생(巢笙)은 중성·정성 각 21매, 우생은 중성·정성 각 15매, 소(簫)는 중성·종성 각 24매, 훈(塤)은 중성·정성 각 14매, 진고(晋鼓),입고(立鼓), 비고, 응고(應鼓), 축, 어, 휘번이다.

이와 함께 아악에 따르는 일무(佾舞)에 쓰이는 약(籥), 적(笛)·간(干)·과(戈) 36벌, 의관(衣冠)·무의(舞衣)·악복(樂服)·의물(儀物) 등을 갖추어 보내왔다.

아악은 1116년 10월 태묘(太廟)에 사용된 후 원구(園丘)·사직(社稷)·문선왕묘(文宣王廟) 등에 사용되었고, 각종 궁중의식에서 연주되었다. 그러나 〈고려사〉 악지에 의하면 예종 때 아악기와 의물만이 수입되었는데, 고려의 악공들이 아악기의 연주에 서툴렀을 뿐만 아니라 멋대로 아악의 연주순서를 바꾸는 등 아악의 제도가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의종 때 아악의 절차가 제도화되면서 금·슬·훈과 같은 악기가 아악 연주 때 없어지는 등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고, 중국 왕조가 송나라에서 명나라로 바뀌면서 그 전통도 변했다. 1352년(공민왕 1)에 새롭게 아악의 전통을 바로잡기 위해 악학(樂學)을 설치하고 아악서(雅樂署)를 세웠으나 왕조의 멸망으로 중단되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 아악의 정비는 중요한 문화사업의 하나였다.

고려의 음악기관이었던 아악서와 전악서(典樂署)가 그대로 전승되었다. 조선 초기의 아악은 1406년(태종 6) 명(明)나라에서 일부 악기를 들여왔을 뿐 고려의 아악과 비슷한 실정이었다. 세종 때 본격적인 아악 정비가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올바른 율관(律管)을 제작하여 새로운 악기들을 제작하는 사업과 조회아악(朝會雅樂)·회례아악(會禮雅樂)·제향아악(祭享雅樂)의 제정으로 이어졌다. 1430년(세종 12) 9월 박연(朴堧)의 상소에 의해서 설치된 악기감조색(樂器監造色)에서 금 6매, 슬 6매, 축 1매, 어 1매, 훈 10매, 부(缶) 10매, 지 10매, 적 10매, 소 10매, 관 10매, 우 10매, 약 10매, 건고(建鼓) 등의 아악기가 제작되었다.

1427년 5월 12매짜리 석경(石磬) 1틀이 완성되었고 이어 여러 제향에 사용될 편경과 편종이 제작되었다.

조회아악과 회례아악은 임금이 문무백관(文武百官)을 정기적으로 소집하여 갖는 조회나 회례의식에서 절차에 따라 연주되던 아악의 총칭이고, 제향아악은 종묘(宗廟)·사직·문선왕묘 등의 제사의식에 따라 연주되던 아악의 총칭이다.

조회아악은 당악을 사용하다가 1430년 9월 세종이 아악을 사용하도록 지시했으나, 이러한 제도는 50년도 지속되지 못하고 폐지되었다. 회례아악은 1431년 정월 조회의식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었으며 세종의 뜻에 따라 향악과 당악도 함께 연주되었다. 회례에 연주된 아악곡은 융안지곡(隆安之曲)·서안지곡(舒安之曲)·휴안지곡(休安之曲) 등인데, 이것은 주희(朱喜)의 〈의례경전통해 儀禮經典通解〉에 실려 있는 시악(詩樂)의 선율을 빌려 만든 것이다.

회례아악도 세종 이후에는 연주되지 않고 향악과 당악이 다시 사용되었다. 제례아악은 국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으나 제도의 혼란으로 바른 연주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박연의 상소에 이러한 문제점이 지적되었고, 이는 곧 수정되었다. 이때 참고된 문헌은 〈의례경전통해〉와 임우(林宇)의 〈석전악보 釋奠樂譜〉였으며, 종묘제례악은 정비 이후 향악이 사라지고 새로운 제례아악만이 사용되었다.

제례아악은 큰 변동 없이 조선 후기까지 전승되었는데, 종묘제례악만이 세조 때 세종이 창제한 보태평(保太平)·정대업(定大業)으로 바뀌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아악은 조선 전기에 비해 크게 쇠퇴했다. 병자호란 이후 10년 동안 종묘·사직 등의 제례아악이 정지되는 등 어려움이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인 1610년(광해군 2)과 1655년(효종 6)에 〈악학궤범〉의 복간으로 아악의 명맥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또한 악기조성청(樂器造成廳)과 악기도감(樂器都監)이라는 임시관청을 두어 소규모로 아악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 재정의 어려움으로 아악을 연주했던 악생(樂生)들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로는 원구·사직 등의 제향이 폐지되고, 문묘제향만이 남아 지금은 문묘제례악만이 연주되고 있다.

지금의 아악

고려시대 이후 중국계 음악을 가리켰던 아악은 1911년 이후부터는 궁중음악과 민간음악인 정악(正樂)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즉 광의(廣義)의 아악은 1911년 이후의 아악을 말하는 것이고, 협의(狹義)의 아악은 문묘제례악만 해당된다.

형식

1425년(세종 7) 간행된 아악보는 12율과 7성으로 기보되었는데, 12율이란 한 옥타브 안에 12반음을 차례대로 배열한 것이고, 이것은 황종율관을 근거로 한 삼분손익법에 의해 나온 것이다.

12율은 황종·태주·고선·유빈·이칙·무역의 홀수 음을 양율이라 하고, 대려·협종·중려·임종·남려·응종 등의 짝수 음을 음려로 구분한다. 12율은 선법의 중심음과 선율의 음정관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7성이란 중국음악의 한 옥타브 안에 5성(聲)과 2변(變)으로 이루어진 음계를 뜻한다. 즉 궁(宮)·상(商)·각·치(致)·변치·우(羽)·변궁으로 이루어진 7음음계이다.

아악곡의 가사는 4언 1구의 한시로 되어 있으며, 가사 한 글자에 한 음씩 붙인 일자일음식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일자다음식으로 되어 있는 향악과 다른 점이다. 아악곡의 종지형은 시작음과 끝음이 서로 같은 궁으로 되어 있다. 이 점은 조선 후기 아악의 음악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종 때 편찬된 〈악학궤범〉에 그 내용이 체계적으로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