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

홍난파

다른 표기 언어 洪蘭坡
요약 테이블
출생 1898. 4. 10, 경기 화성
사망 1941. 8. 30, 서울
국적 한국

요약 1925년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으며 국내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를 창간했다. 홍성유·이영세 등과 난파 트리오라는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3중주단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1910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음악수업을 했다. 1918년 일본에 유학하여 우에노 음악학교에 입학했다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귀국했다. 귀국 후 매일신문사에서 기자생활도 했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1920년 4월 바이올린곡으로 작곡한 〈애수〉라는 곡의 악보를 그의 단편소설집 〈처녀혼〉의 끝에 실었는데, 1925년 김형준에게 노랫말을 부탁하여 지은 노래가 〈봉선화〉이다.

홍난파(洪蘭坡)
홍난파(洪蘭坡)

본명은 영후(永厚). 홍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마을 글방에서 한학을 배웠고 1910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음악수업을 했다. 15세 되던 해에는 한국 최초의 음악전문교육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입학하여 성악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다시 기악과에 입학하여 김인식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졸업 후 조선정악전습소의 보조교사로 있었다. 1918년 일본에 유학하여 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 입학했다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귀국했다.

3·1운동 후 일본으로 돌아가 복학을 신청했으나 받아주지 않자 좌절하고 다시 귀국했다. 그는 도쿄[東京] 유학시절 비록 일본에서 발간한 것이지만 〈삼광〉이라는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를 발간했다. 귀국 후 매일신문사에서 기자생활도 했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1920년 4월 바이올린곡으로 작곡한 〈애수〉라는 곡의 악보를 그의 단편소설집 〈처녀혼〉의 끝에 실었는데, 1925년 김형준에게 노랫말을 부탁하여 지은 노래가 〈봉선화〉이다.

1922년 경상악우회 주관으로 만들어진 연악회(硏樂會)에서 음악 보급에 힘썼다. 1925년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으며 국내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를 창간했다. 〈창조〉에 〈음악만필〉을 집필하기도 했다. 1926년 일본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편입하면서 도쿄 교향악단(지금의 NHK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입단했다. 1929년 졸업 후 귀국하여 창작동요 100곡을 수록한 〈조선동요 100곡집〉 상권을 연악회를 통해 간행했다.

1931년 2월 조선음악가협회를 결성하고 상무이사를 역임했으며, 빅타레코드사의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홍성유·이영세 등과 난파 트리오라는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3중주단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미국 시카고 셔우드 음악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33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있으면서 〈조선동요 100곡집〉 하권을 펴냈다.

1936년 경성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 취임하여 경성방송관현악단(지금의 KBS 관현악단)을 조직하고 지휘자로 활약했다. 1937년 한국 최초로 교향곡 연주를 지휘했는데, 곡은 모차르트 교향곡 제41번 C장조 〈주피터 교향곡〉이었다. 1938년 경성음악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했고 연악회를 통해서 〈음악만필〉을 간행했다. 조선음악협회의 평의원으로 있으면서 이광수 작사의 국민가요 〈희망의 아침〉을 작곡하기도 했다. 1941년 늑막염이 재발하여 경성요양원에서 죽었다.

1954년 난파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조선동요 100곡집〉을 재간행, 1968년 수원 팔달공원에 〈고향의 봄〉 노래비 건립, 1969년 난파음악상이 제정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바이올린 곡 〈애수의 조선〉·〈로만스〉·〈여름밤의 별들〉·〈라단조 가보테〉·〈동양풍 무곡〉, 가곡 〈성불사의 밤〉·〈사랑〉·〈금강에 살으리랐다〉, 동요 〈병아리〉·〈고향의 봄〉·〈개나리〉·〈할미꽃〉 등이 있다. 또한 〈음악일화〉·〈동서음악의 비교〉·〈조선문화 20년〉 등의 평론과 〈서울 계신 K형께〉·〈첫 무대의 기억〉·〈악단의 뒤에서〉 등의 수필, 〈최후의 악수〉·〈처녀혼〉 등의 소설도 썼다.

한때 홍난파가 흥사단가를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1996년 정부는 김세형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면서 그가 흥사단가를 작곡했다고 밝힘으로써 흥사단가의 작곡자는 홍난파가 아니라 김세형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홍난파의 대표곡인 〈봉선화〉를 비롯해 그가 작곡했다는 여러 곡들이 친일 행위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란을 빚고 있어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까지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