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교향악협회

고려교향악협회

다른 표기 언어 高麗交響樂協會

요약 해방직후 건립된 음악인 조직.

조선음악건설본부(1945. 8. 16 결성)를 탈퇴하고 '조선음악예술의 질적 향상과 이에 관한 사업의 발전을 추진함을 목적'으로 하는 강령을 내세우면서 현제명을 중심으로 1945년 9월 15일 결성되었고, 산하 악단으로 고려교향악단을 창단하였다.

고려교향악협회는 조선음악건설본부에서 동시에 나와 12월 13일에 재결성한 조선음악가동맹과 대별되는 조직이다. 당시 아놀드의 후임인 제2대 미군정 장관 러치를 명예회장으로 추대한 이사장 현제명은 1945년 이전에는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 조선음악협회 이사, 경성음악연구원 원장을 지낸 바 있고 당시 한민당 활동을 하였다. 또한 문교부 음악과 협동과장인 미 육군 중위 포크너를 객원 지휘자로 초빙하고 '미군장병 위문 연주회'(1945. 11. 4) 등을 개최하면서 미군정의 힘으로 그 시대 악단의 중심체로 굳혀갔다.

고려교향악단은 정기연주회에 주로 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슈트라우스·차이코프스키 등의 곡을 연주하면서 순수음악을 표방했으나 첫 무대가 한민당 결성식장(1945. 9. 16)인 점으로 미루어 오히려 순수음악의 표방 아래 일본잔재음악 청산이나 민족음악수립과 멀어진 점이 주목된다. 인원수는 17명 정도였으나 1947년초까지 거쳐간 회원은 60여 명 정도이다. 교향악협회의 주요회원은 현제명·계정식(지휘)·김생려(총무)·김관수(사무국장)·임원식·김성태·김원복·김학상·남궁요설·이인범 등이다. 이 조직은 제1기 동안은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나 제2, 3기에는 약화되었고, 조직운영이 무원칙해지면서 단원들이 탈퇴하여 서울관현악단을 조직하였다. 결국 고려교향악협회는 현제명이 8개월 동안 미국에 있다가 돌아오자 서울관현악단과 갈등을 보이다가 해체되었다.

고려교향악협회의 주요구성원인 현제명·김성태는 고려교향악협회를 건설한 후 조선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측의 신막·이범준·박영근 등과 조선음악건설본부측의 채동선·박태준 등과 함께 전국음악가단체대회를 열고 조선음악가협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이 통일적 조직체도 1946년 해체되어 전국음악문화협회로 흡수되었다. 전국음악문화협회는 중도적인 채동선을 중심으로 고려음악협회·전국취주악연맹·정악회 등과 함께 전국문화단체총연합에 가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