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방송국

경성방송국

다른 표기 언어 京城放送局

요약 일제강점기인 1927년 2월 16일 첫 전파를 발사한 경성방송국은 개국 당시 일본어와 조선어를 혼합방송했다. 혼합방송은 물가시세·일기예보·공지사항이 주류를 이루면서 창·민요 등 조선어 프로그램도 있었다. 이 같은 편성은 청취자들로부터 외면당해 초창기부터 심한 경영난에 빠졌다.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2개국어의 2중방송을 실시하고 방송망도 전국으로 확대했다. 조선총독부는 2중방송 실시와 더불어 방송을 통한 조선인 회유에 주력하면서 방송내용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방송을 본격적인 선전선동매체로 활용했으며, 조선인에 걸맞는 분위기를 담을 수 있는 프로그램 편성이 불가능해졌다. 경성방송국이 한국 방송사의 서막을 올린 것은 사실이나 우리의 방송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방송사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 첫 전파를 발사한 경성방송국(호출부호 JODK, 송신기 마르코니 6Q형으로 출력 1kW, 주파수 690kHz)은 개국 당시 일본어와 조선어를 혼합방송하는 기형적인 형태였다.

주요 방송내용은 일본어 방송인 경제시황 보도였다. 조선어·일본어 혼합방송은 물가시세·일기예보·공지사항이 주류를 이루면서 창·민요 등 조선어 프로그램도 있었다. 이 같은 편성은 청취자들로부터 외면당해 유일한 재원인 청취료 수입이 미진한 결과 초창기부터 심한 경영난에 빠졌다.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2개국어의 2중방송을 실시하고 방송망도 전국으로 확대했다. 조선어 제2방송을 실시하고 조선인 직원을 보강하는 한편 프로그램 개발에도 눈을 돌려 수신기 보급을 현저하게 늘려나갔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2중방송 실시와 더불어 방송을 통한 조선인 회유에 주력하면서 방송내용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총독부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방송을 본격적인 선전선동매체로 활용했다. 그동안 조선인 직원들에 의해 우리 민요와 동요, 국악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통제가 심했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에는 완전히 전쟁수행을 위한 선전선동도구로서만 기능했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방송의 사명을 오직 보도방송에만 두고 연예·오락 프로그램은 거의 폐지해버렸다. 조선인에 걸맞는 분위기를 담을 수 있는 프로그램 편성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경성방송국이 한국 방송사의 서막을 올린 것은 사실이나 우리의 방송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 기념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