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왕사

조선향토대백과 유물유적정보관 : 유적

석왕사

[ 釋王寺 ]

분류 유물유적정보관>유적>사찰 · 사당>절
유물유적시대 조선
행정구역 강원도>고산군
등급 국보급
지정번호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94호

강원도 고산군 설봉리에 있는 절. 고려 말인 1386년에 처음으로 웅진전이 세워지고 그 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50여 채나 넘는 크고 작은 건축물들이 건설되었다. 석왕사로 부르게 된 역사적 유래는 조선 시조왕 이성계가 이곳을 지나다가 유숙하던 어느 날 하룻밤 꿈에 석가래 3개를 가로지고 누운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이곳에 살던 중이 앞으로 왕이 될 꿈으로 해석해 주었다 하여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후에 이곳 절 이름을 왕이 될 꿈을 해석해 준 중이 있는 절이란 의미에서 해석 ‘석(釋)’, 임금 ‘왕(王)’, 절 ‘사(寺)’ 이 세 글자를 써서 석왕사로 이름을 부르게 하였고 그 절터까지 직접 잡아주었다고 한다.

석왕사는 동쪽으로 트인 깊은 골짜기에 남향한 두 개의 기본 구성축을 이루면서 건물들이 지형에 맞게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위쪽의 건축군은 웅진전을 기본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고 아래쪽의 것은 대웅전을 기본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석왕사로 들어가는 첫 문은 불이문이다. 불이문은 석왕사 앞으로 흐르는 개울에 건너놓은 무지개모양의 돌다리 위에 세운 아담한 다리집으로서 1751년에 세운 것이다.

조계문은 석왕사의 두 번째 문이다. 지금의 것은 1783년에 개축한 것이다. 불이문은 4각돌기둥을 좌우에 하나씩 놓고 그 위에 흘림식나무기둥을 세운 다음 커다란 합각지붕을 올린 것으로서 바깥 7포, 안 9포로 짜올린 두공은 일주문의 특색을 돋우어준다. 천장은 한칸짜리건물이나 소란반자와 빗반자를 댔으며 봉황, 용, 비천 등을 그려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조계문을 지나면 서쪽방향으로 합각지붕의 날씬한 2층다락인 설성동루가 있다. 석왕사의 중심구역에 이르러 아래중심축 북쪽 깊숙이에 대웅전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웅전은 1731년에 개축한 것으로서 석왕사의 중심건물이었다. 대웅전은 정면 5칸(18.6m), 측면 3칸(11.1m)에 바깥 9포, 안 11포의 겹처마합각지붕건물이었다. 제공 밑에는 연꽃봉오리를 조각하고 위에는 용대가리조각을 하였으며 대웅전 안의 포는 집안높이에 어울리게 장식적으로 두단을 덧붙여 마치 13포로 보이게 하였다. 이 건물에는 화려한 금단청을 입히고 문살들에 기하학적무늬를 섬세하게 새겨 건물전체가 화려한 조형예술품처럼 단장되어 있었다.

대웅전 안에는 부처를 그린 그림들이 걸려있었고 9개의 부처가 놓여 있었다. 대웅전 앞에는 호지문이 서있었고 그앞에 영월루가 남향하여 서 있었다. 그리고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만궁당, 서쪽에 심검당이 마주서고 만궁당쪽으로 무상당, 홍복당, 설성동루가 있었으며 심검당에 연이어 해장원, 팔상전, 명부전, 보명당, 문학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석왕사의 윗쪽 중심축 북쪽에 이 절간의 기본 건물의 하나였던 웅진전이 자리잡고 있었다. 고려 말기의 건물을 대표하는 웅진전은 비교적 높이 쌓은 기단 위에 정면 5칸(15.77m), 측면 2칸(6.4m)에 안팎 5포의 긴 박공집이었다. 두공의 제공은 비교적 짧게 하고 안에는 중보높이에 소란반자를 높이 댔으며 전반적으로 화려한 단청이 입혀져 있었다.

웅진전 안에는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500나한상이 놓여 있었다. 웅진전 앞에는 용비루와 인지료가 가지런히 서 있다. 석왕사는 고려 말기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우리 선조들의 우수한 건축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50여 채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던 큰 절이었는데, 지난 6 · 25전쟁시기 폭격으로 불이문, 조계문, 설성동루, 용비루, 인지료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석왕사건물들이 타버렸다.

마지막 수정일

  • 2010.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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