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사

동화사

분류 문학 > 건축 >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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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신라시대 사찰

일반정보

대구시 동구 도학동 산124번지 팔공산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사찰이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2 기이2 후백제 견훤조에는 기록되어 있는 왕건이 견훤에게 보내는 서신을 살펴보면, “동수(桐藪)[지금의 桐華寺(동화사)]에서는 (고려의)깃발만 바라보고 (견훤군이)허물어져 흩어졌다.(桐藪[今桐華寺] 望旗而潰散)”라고 하여 왕건이 그의 승전(勝戰)을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일어난 전투에서는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살해하자 왕건이 친히 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팔공산 동쪽 기슭 은해사 입구에서 견훤군과 일대 접접을 벌였으나 많은 군사를 잃고 후퇴하여 남쪽 기슭에 있는 동화사 입구 해언현 미리사(美里寺) 앞에서 다시 대패하였다는 기록 또한 전해진다. 현재 동화사(桐華寺)는 대구시 동구 도학동 산124번지 팔공산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유사』 권4 의해5 심지계조(心地繼祖)조에는 동화사의 창건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심지(心地)는 신라 제41대 헌덕대왕(憲德大王) 김씨(金氏)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깊고 천성이 맑고 지혜가 있었다. 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서 불도(佛道)에 부지런했다. 중악(中岳)에 가서 살고 있는데 마침 속리산(俗離山)의 심공(深公)이 진표율사(眞表律師)의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전해 받아서 법회를 연다는 말을 듣고, 뜻을 결정하여 찾아갔으나 이미 날짜가 지났기 때문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이에 땅에 앉아서 마당을 치면서 신도(信徒)들을 따라 예배하고 참회했다. 7일이 지나자 큰 눈이 내렸으나 심지(心地)가 서 있는 사방 10척 가량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그 신기하고 이상함을 보고 당(堂)에 들어오기를 허락했으나 심지는 사양하여 병을 핑계되고 방 안에 물러앉아 당을 향해 조용히 예배했다. 그의 팔꿈치와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려 마치 진표가 선계산(仙溪山)에서 피를 흘리던 일과 같았는데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매일 와서 위문했다. 법회가 끝나고 산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옷깃 사이에 간자(簡子) 두 개가 끼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가지고 돌아가서 영심에게 아뢰니 영심이 말하기를, ‘간자는 함 속에 들어 있는데 그럴 리가 있는가.’하고 조사해 보니 함은 봉해 둔 대로 있는데 열고 보니 간자는 없었다. 심공이 매우 이상히 여겨 다시 간자를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다. 심지가 또 길을 가는데 간자가 먼저와 같았다. 다시 돌아와서 아뢰니 영심이 말하기를, ‘부처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받들어 행하도록 하라’하고 간자를 그에게 주었다. 심지가 머리에 이고 중악으로 돌아오니 중악의 신이 선자(仙子) 둘을 데리고 산꼭대기에서 심지를 맞아 그를 인도하여 바위 위에 앉히고는 바위 밑으로 돌아가 엎드려서 공손히 정계(正戒)를 받았다. 이때 심지가 말했다. ‘이제 땅을 가려서 부처님과 간자를 모시려 하는데, 이것은 우리들만이 정할 일이 못되니 그대들 셋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서 간자를 던져 자리를 점치도록 하자.’ 이에 신들과 함께 산마루로 올라가서 서쪽을 향하여 간자를 던지니, 간자는 바람에 날아갔다. 간자를 숲속 샘에서 찾아 곧 그 자리에 당(堂)을 짓고 간자를 모셨으니, 지금 동화사(桐華寺) 첨당(籤堂)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 이것이다.”

또한 『삼국유사』의 같은 조에는 고려 예종(睿宗, 1105-1122)이 일찍이 유명한 부처의 간자를 봉심하고자 칙사를 보내 동화사로부터 간자를 대궐로 맞아들여 친견하고 예불을 드렸는데, 갑자기 아홉 번째 간자 하나를 잃어버려 상아로 대신하여 동화사로 돌려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점점 변해 옛것과 새것이 같은 빛이 되어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전하고 있어 국가적으로 불골 간자가 소중하게 다뤄진 것을 알 수 있다.(진성구·이인철, 2003)

동화사의 창건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을 살펴보면, 1931년 조성된 『桐華寺 寺蹟碑』에 의하면 신라 소지왕(炤知王) 15년(493)에 극달(極達)화상이 처음 절을 짓고 유가사(瑜伽寺)라 했는데, 흥덕왕(興德王) 7년(832) 심지(心地))가 중창할 때 주변에 오동나무 꽃이 유난히 상서롭게 피어나 동화사(桐華寺)로 불렀다고 전해온다. 하지만 유가종, 즉 법상종은 중국에서도 7세기 후반에 등장하므로,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기도 전인 5세기 말에 유가라 이름 붙인 절이 생겼다는 것은 논리상 타당하지 않다.(문경현, 1987)

동화사는 심지의 창건 이후 나말선초 영조(靈照, 870-947)선사에 이르러 사세를 떨친다. 영조선사는 당나라 말 항주로 가서 운봉(雲峰)선사에게 선법을 전해 받고, 오월왕(吳越王)의 부름을 받기도 했다. 신라로 돌아온 후 경순왕 4년인 934년에는 동화사를 중창하고 이곳에서 선사상을 펼쳤다. 이때의 중창은 고려 태조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고려 명종20년(1190)에는 보조(普照)국사가 호국불교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동화사를 크게 중창하였는데 현재 동화사에는 그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고려말 대표적인 유가종의 고승인 홍진(弘眞, 1228-1294))국사는 동화사의 대규모 중창을 이루었는데, 이 해에 세워진 홍진국존진응탑비(弘眞國尊眞應塔碑)와 홍진국사의 승탑으로 추정되는 보물601호 도학동석조부도가 현재 경내에 남아있다. 홍진국사와 더불어 고려말 유가종풍을 진작시킨 법주사의 자안(子安, 1240-1327) 역시 1324년 동화사의 주지로 있었다. 당시 유가 종단과 유교계를 이끌던 두 대덕이 모두 동화사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고려 말 동화사는 유가종의 중심사찰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시기에는 사명대사(1544-1610)가 동화사에 영남승군(嶺南僧軍) 사령부를 설치하고 팔공산성을 쌓고 승군을 지휘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사명대사는 선조39년(1606) 동화사의 중창불사를 이루었다. 조선 후기에는 인악(仁嶽, 1746-1796)대사가 주목된다. 정조로부터 인정받아 용주사를 창건할 때 큰 역할을 한 인악대사는 동화사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정조 20년(1796)에 입적하였는데 그를 기리는 비가 지금 동화사 경내에 세워져있다.

이와 같이 동화사 중창의 역사를 살펴보면 동화사는 유가 종찰로서의 면모와 더불어 선불교의 법맥을 잇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려 초의 영조선사, 중기의 보조국사, 조선중기의 사명대사, 조선 후기의 인악대사 등이 모두 선사였는데, 이들에 의해 선종도량으로서 동화사의 위상이 공고히 자리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강삼혜, 2007)

동화사의 가람배치는 세 영역으로 구분된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동화사 일곽과 극락전과 금당선원을 중심으로 한 금당암 일곽, 비로전이 있는 비로암 일곽으로 이 세 권역은 모두 통일신라 때의 가람으로 당시의 신앙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창건 당시 동화사의 중심 영역은 금당이라는 이름과 당간지주의 위치, 통일신라 양식을 보이는 극락전의 기단 등으로 보아 극락전이 있는 금당암 영역으로 추측된다.(성동환, 2000) 현재의 금당암에는 경문왕 3년(863) 건립된 동서삼층석탑(보물248호)과 수마제전(須摩提殿), 금당선원(金堂禪院) 등이 있다. 숙종 26년(1702) 건립된 수마제전은 전각의 이름도 독특하고 안에 봉안된 고려 혹은 조선 초로 추정되는 아미타불상 또한 초대형이며 허리가 길게 표현되어 있는 등 유례가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비로암을 살펴보면 비로전에 봉안된 불상과 탑이 통일신라 때 조성한 작품으로 현 가람터는 심지가 동화사의 주지로 있을 당시 조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비로암에는 경문왕 3년(863)에 민애왕(817-839)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리 7과를 봉안하여 세운 삼층석탑(보물247호)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244호)이 있다. 사리 항아리 주변에 새겨진 명문인 민애대왕석탑사리호기(敏哀大王石塔舍利壺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왕은 삼가 민애대왕을 위하여 복업을 추숭하고자 석탑을 조성하고 기(記)를 각석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릇 성교(聖敎)에서 설한 바는 이익이 많아 비록 팔만 사천의 법문이 있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 업장을 없애고 이물(利物)을 널리하는 것은 탑을 세우고 예배하고 도를 닦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민애대왕의 이름은 명(明)이며 선강대왕의 맏아들로 지금 임금의 어른이었다. 개성 기미의 해(839) 정월 23일 창생을 버리니 춘추 23세였다. … 함통 4년(863) 계미 9월 10일에 쓰다. 한림사간 이관(翰林沙干 伊觀) 전지대덕 심지(專知大德 心智), 동지대덕 융행(同知大德 融行), 유나승 순범(唯乃僧 純梵), 유나사 심덕(唯乃師 心德), 전지대사 창구(專知大舍昌具), 전 영충(典 永忠), 장 범각(匠 梵覺),” 이 발원문을 통해 심지는 동화사를 신라 왕실의 원당 사원으로 만들고 또 민애왕의 원당이 만들어질 때 이 절을 주지한 장본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헌덕왕의 아들인 심지는 민애왕과 종형제이기도 하였다. 민애왕의 아버지인 충공이 바로 헌덕왕의 아우였다.

민애왕은 신라 하대 치열한 왕위쟁탈전에 희생되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비운의 왕이다. 민애왕은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을 죽게 하고 자신이 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장보고의 원조를 얻은 김양에 의해 참살되었다. 이후 경문왕 3년(863)에 신라 왕실의 원찰이던 동화사에 민애왕 원당을 세우고 그 앞에 탑을 세운 것이다. 경문왕은 희강왕의 친손자였으나 왕위쟁탈전으로 분열되었던 진골 귀족간의 분파를 종식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민애왕의 원탑을 세웠던 것으로 생각된다.(황수영, 1969) 또한 동화사를 진표계 미륵신앙을 수행하는 도량으로 인식하고 주지인 심지를 통하여 지방사회에서 확산되어 가는 미륵신앙을 수용하면서 왕권의 안정화를 이루고자 한 것으로 보았다.(조범환, 1999)

동화사의 미륵신앙과 유가 종찰로서의 전통은 경내에 남아 있는 유물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동화사 동편 입구에 있는 마애불은 구름 위의 대좌 모습이나 한쪽 발을 내린 반가좌의 자세 등에서 도솔천에 있는 미륵을 부조로 새긴 것이다. 이것은 심지가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한편 대웅전을 비롯한 천내각, 영산전, 봉서루, 심검당 등 현존하는 당우들은 대부분 조선 영조 때 중창한 건물들이다.(강삼혜, 2007)

참고문헌

황수영, 1969, 「新羅 敏哀大王石塔記」『史學志』3.
문경현, 1987, 『八公山-八公山史蹟地表調査報告書』, 대구직할시·경북대학교.
조범환, 1999, 「新羅下代 景文王의 佛敎政策」『新羅文化』 16.
성동환, 2000, 「팔공산 동화사의 風水 및 伽藍의 특징」『팔공산 동화사의 역사와 사상』.
진성구·이인철, 2003, 『신라의 불교사원』, 백산자료원.
강삼혜, 2007, 「八公山 桐華寺·銀海寺의 歷史와 文化」『美術史學誌』4.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2 기이2 후백제 견훤)
… 致使王之至尊 枉稱子於足下 尊卑失序 上下同憂 以爲非有元輔之忠純 豈得再安社稷 以僕心無匿惡 志切尊王 將援置於朝廷 使扶危於邦國 足下見毫釐之小利 忘天地之厚恩 斬戮君主 焚燒宮闕 菹?卿佐 虔劉士民 姬<妾>則取以同車 珍寶則奪之相載 元惡浮於桀?紂 不仁甚於?梟 僕惡極崩天 誠深却日 約效鷹?之逐 以申犬馬之勤 再擧干戈 兩更槐柳 陸擊則雷馳電激 水攻則虎>龍騰 動必成功 擧無虛發 逐尹卿於海岸 積甲如山 禽雛造於城邊 伏尸蔽野 燕山郡畔 斬吉奐於軍前 馬利[疑伊山郡]城 戮隨晤於纛下 拔任存[今大興郡]之日 刑積等數百人捐軀 破淸川縣[尙州領內縣名]之時 直心等四五輩授首 桐藪[今桐華寺]望旗而潰散 京山銜璧以投降 康州則自南而來 羅府則自西移屬 侵攻若此 收復寧遙 必期?水營中 <雪>張耳千般之恨 烏江岸上 成漢王一捷之心 竟息風波 永淸?海 天之所助 命欲何歸 況承吳越王殿下 德洽包荒 仁深字小 特出綸於<丹>禁 諭?難於靑丘 旣奉訓謀 敢不尊奉 若足下祗承睿旨 悉?凶機 不唯副上國之仁恩 抑可紹東海之絶緖 若不過而能改 其如悔不可追[書乃崔致遠作也] 長興三年 甄萱臣?直勇而有智略 來降太祖 萱捉?直二子一女 烙斷股筋 秋九月 萱遣一吉 以舡兵入高麗禮城江 留三日 取鹽白眞三州船一百? 焚之而去[云云] 淸泰元年甲午 萱聞太祖屯運州[未詳] 遂簡甲士 ?食而至 未及營壘 將軍黔弼以勁騎擊之 斬獲三千餘級 態津以北三十餘城聞風自降 萱麾下術士宗訓醫者之謙勇將尙逢?雀弼等降於太祖 丙申正月 萱<謂>子曰 老夫新羅之季 立後百濟名 有年于今矣 兵倍於北軍 尙爾不利 殆天假手爲高麗 蓋歸順於北王 保首領矣 其子神劍龍劍良劍等三人皆不應 李?家記云 萱有九子 長曰神劍[一云甄成] 二子太師謙腦 三子佐承龍述 四子太師聰智 五子大阿干宗祐 六子闕 七子佐承位興 八子太師靑丘 一女國大夫人 皆上院夫人所生也 萱多妻妾 有子十餘人 第四子金剛身長而多智 萱特愛之 意欲傳位 其兄神劍良劍龍劍知之 憂憫 時良劍爲康州都督 龍劍爲<武>州都督 獨神劍在側 伊<飡>能奐使人往康<武>二州 與良劍等謀 至淸泰二年乙未春三月 與英順等勸神劍 幽萱於金山佛宇 遣人殺金剛 神劍自稱大王 赦境內[云云] 初萱寢未起 遙聞宮庭呼喊聲 問 是何聲歟 告父曰 <王>年老 暗於軍國政要 長子神劍攝父王位 而諸將歡賀聲也 俄移父於金山佛宇 以巴達等壯士三十人守之 童謠曰 可憐完山兒 失父涕連? 萱與後宮年小男女二人 侍婢古比女 內人能又男等囚繫 至四月 釀酒而飮醉守卒三十人 而與小元甫香又吳琰忠質等 以海路迎之 旣至以萱爲十年之長 尊號爲尙父 安置于南宮 賜<楊>州食邑田莊奴婢四十口馬九匹 以其國先來降者信康爲衙前 甄萱?將軍英規密語其妻曰 大王勤勞四十餘年 功業垂成 一旦以家人之禍 失地從於高麗 夫貞女不可二夫 忠臣不事二主 若捨己君以事逆子耶 何顔以見天下之義士乎 況聞高麗王公仁厚懃儉 以得民心 殆天啓也 必爲三韓之主 ?致書以安慰我王 兼慇懃於王公 以圖後來之福乎 妻曰 子之言是吾意也 於是天福元年丙申二月 遣人致意於太祖曰 君擧義旗 請爲內應以迎王師 太祖喜 厚賜其使者遣之 謝英規曰 若蒙恩一合 無道路之梗 卽先致謁於將軍 然後升堂拜夫人 兄事而?尊之 必終有以厚報之 天下鬼神皆聞此語 六月 萱告太祖 老臣所以投身於殿下者 願仗殿下威稜 以誅逆子耳 伏望大王借以神兵 殲其賊亂 臣雖死無憾 太祖曰 非不欲討之 待其時也 先遣太子及<武>將軍述希 領步騎十萬趣天安府 秋九月 太祖率三軍至天安 合兵進次一善 神劍以兵逆之 甲午 隔一利川相對 王師背艮向坤而陳 太祖與萱觀兵 忽白雲狀如劍戟起我師 向彼行焉 乃鼓行而進 百濟將軍孝奉德述哀述明吉等 望兵勢大而整 棄甲降於陣前 太祖勞慰之 問將帥所在 孝奉等曰 元帥神劍在中軍 太祖命將軍公萱等 三軍齊進狹擊 百濟軍潰北 至黃山炭峴 神劍與二弟將軍富達能奐等四十餘人生降 太祖受降 餘皆勞之 許令與妻子上京 問能奐曰 始與良劍等密謀 囚大王 立其子者 汝之謀也 爲臣之義當如是乎 能奐?首不能言 遂命誅之 以神劍僭位爲人所脅 非其本心 又且歸命乞罪 特原其死 甄萱憂?發疽 數日卒於黃山佛舍 九月八日也 壽七十 太祖軍令嚴明 士卒不犯秋毫 州縣安堵 老幼皆呼萬歲 謂英規曰 前王失國後 其臣子無一人慰之者 獨卿夫妻 千里嗣音 以致誠意 兼歸美於寡人 其義不可忘 許職左承 賜田一千<頃> 許借驛馬三十五匹以迎家人 賜其二子以官 甄萱起唐景福元年 至晉天福元年 共四十五年 丙申滅 史論曰 新羅數窮道喪 天無所助 民無所歸 於是群盜投隙而作 若?毛然 其劇者弓裔甄萱二人而已 弓裔本新羅王子 而反以家國爲? 至斬先祖之畵像 其爲不仁甚矣 甄萱起自新羅之民 食新羅之祿 包藏禍心 幸國之危 侵?都邑 虔劉君臣 若禽獸 實天下之元惡 故弓裔見棄於其臣 甄萱産禍於其子 皆自取之也 又誰咎也 雖項羽李密之雄才 不能敵漢唐之興 而況裔萱之凶人 豈可與我太祖相抗歟
… 지극히 존귀한 왕으로 하여금 몸을 굽혀 그대에게 아들이라고 칭하게 하여 높고 낮음이 질서를 잃으니 상하가 모두 근심하였다. 이에 원보(元輔)의 순수한 충성이 아니면 어찌 사직을 다시 편안케 할 수 있었을 것인가. 나는 감추어둔 나쁜 마음이 없고 왕실을 높이는 뜻이 간절하기에 신라에서는 장차 나를 조정에 불러 위태로운 나라를 지탱케 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티끌같이 작은 이익을 보고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잊어 임금을 살륙하고 궁궐을 불태우며 신하들을 죽이고 백성들을 도살했으며 궁녀들을 납치하고 보화를 탈취해 싣고 가니 그 흉악함은 걸(桀)?주(紂)보다, 크고 어질지 못함은 자기 부모를 잡아 먹는 경(?)과 올빼미보다 심하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원한과 태양의 운행을 바꿀만한 정성을 갖고, 먹이를 쫓는 매를 본받아 견마(犬馬)의 수고를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그리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켜 2년을 보내면서 땅에서는 번개처럼 날래게 움직였으며 물에서는 범과 용처럼 용감히 싸워, 출동하면 반드시 성공함으로써 헛되이 군사를 일으키는 일이 없었다. 윤경(尹卿)을 해안까지 추격했을 때는 갑옷이 산처럼 쌓였고 추조(雛造)를 성 옆에서 사로잡았을 때는 시체가 들을 덮었다. 연산군(燕山郡) 근처에서는 길환(吉奐)을 군문(軍門) 앞에서 참수했고 마리성(馬利城)[이산군(伊山郡)으로 생각된다.] 부근에서는 수오(隨晤)를 군기 아래서 베었으며 임존성(任存城)[지금의 대흥군(大興郡)]을 함락시킬 때는 형적(刑積) 등 수백명이 목숨을 내놓았고 청천현(淸川縣)[상주(尙州) 영내의 현명]을 격파할 때는 직심(直心) 등 네, 다섯 무리가 목을 바쳤다. 또 동수(桐藪)[지금의 동화사(桐華寺)]는 우리의 깃발만 보고도 흩어졌고 경산(京山)은 보배를 가지고 투항했으며 강주(康州)는 남쪽에서, 나부(羅府)는 서쪽에서 투항했다. 전과가 이와 같으니 나라를 수복함이 어찌 멀다하겠는가. 기필코 저수(?水)의 진영에서 장이(張耳)가 천추에 맺힌 한을 풀고 오강(烏江)의 언덕에서 한왕(漢王)이 최후의 승리를 거둔 마음을 본받아 이 혼란을 종식시킴으로써 온 나라를 영원히 평안케 할 것이다. 하늘이 도우시니 천명이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하물며 오월왕 전하의 칙서를 받으니 그 덕은 어지러운 이 나라를 넉넉히 감싸고 그 인(仁)은 소국(小國)을 깊이 사랑하여 지고한 궁궐에서 특별히 칙서를 내어 이 땅의 병란을 그치라고 타이르니 그 칙서를 받들고서 감히 높여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그대가 삼가 칙서를 따라 군사를 거둔다면 상국(上國)의 어진 은혜에 부응할 뿐 아니라 신라의 끊어진 명맥도 이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이 편지는 최치원이 쓴 것이다]” 장흥(長興) 3년(932) 견훤의 신하 공직(?直)은 용감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태조에게 귀순하자 견훤은 그의 2남1녀를 잡아 다리의 힘줄을 불로 지져 끊었다. 가을 9월에 견훤이 일길(一吉)을 보내니 그는 수군을 이끌고 고려 예성강(禮城江)으로 들어가 3일동안 염주(鹽州)·백주(白州)·진주(眞州)의 배 1백척을 빼앗아 불 지르고 돌아왔다고 한다.[등등] 청태(淸泰) 원년(934) 갑오(甲午), 견훤은 태조가 운주(運州)[자세히 알 수 없다.]에 주둔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정예병을 뽑아 서둘러 진격했다. 견훤의 진지가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장군 유금필[黔弼]이 날랜 기병을 이끌고 공격하여 3천여 명을 베니 웅진 이북의 30여 성은 그 소식을 듣고 스스로 항복했으며 견훤의 휘하인 술사(術士) 종훈(宗訓), 의원[醫者] 지겸(之謙), 용맹한 장수인 상봉(尙逢)·작필(雀弼) 등도 태조에게 투항했다. 병신(丙申, 936) 정월, 견훤은 아들에게 상의했다. “늙은 이 애비는 신라 말엽에 후백제를 세워 지금에 이르렀다. 군사는 왕건의 북군(北軍)보다 두 배나 많지만 아직도 불리하구나. 아마도 하늘이 고려를 돕는 것 같으니 북왕(北王)에게 귀순하여 목숨을 보존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그러나 신검(神劍)·용검(龍劍)·양검(良劍) 등 세 아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가기(李?家記)』에는 견훤은 아홉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아들은 첫째가 심검(神劍)[또는 견성(甄成)이라고도 한다.], 둘째는 태사(太師) 겸뇌(謙腦), 셋째는 좌승(佐承) 용술(龍述), 넷째는 태사(太師) 총지(聰智), 다섯째는 대아간(大阿干) 종우(宗祐), 여섯째는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고 일곱째는 좌승(佐承) 위흥(位興), 여덟째는 태사(太師) 청구(靑丘)였으며 딸 하나는 국대부인(國大夫人)인데 모두 상원부인(上院夫人)의 소생이다. 견훤은 아내와 첩이 많아 10여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넷째 금강(金剛)은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아 견훤이 특히 사랑하여 왕위를 물려주려고 생각했다. 그의 형 신검·양검·용검은 그 사실을 알고 걱정했다. 그때 양검은 강주도독이었고 용검은 무주도독이어서 신검만이 견훤의 곁에 있었다. 이찬(伊飡) 능환(能奐)은 사람을 강주와 무주에 보내 양검 등과 모의하여 청태 2년(935) 을미 봄 3월, 영순(英順) 등과 함께 신검을 충동하여 견훤을 금산(金山)의 불우(佛宇)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 금강을 죽였다. 신검은 대왕이라 자칭하고 사면령을 내렸다.[등등] 견훤이 잠자리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 멀리 궁궐 뜰에서 함성소리가 들리자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그러자 신검은 “왕께서 연로하여 군국(軍國)의 정사에 어두우시므로 맏아들 신검이 왕위를 대신하게 된 것을 장수들이 환호하는 소리입니다.”고 대답했다. 곧 신검은 아버지를 금산의 불당으로 옮기고 파달(巴達) 등 장사 30명에게 지키도록 하니 “가엾구나, 완산아이. 아비 잃고 눈물짓네”라는 동요가 떠돌았다. 견훤은 후궁이 낳은 어린 아들과 딸 2명, 시비(侍婢) 고비녀(古比女), 나인[內人] 능예남(能乂男) 등과 갇혀있었는데 4월이 되어 술을 빚어 장사 30명에게 먹여 취하게 했다. 태조는 소원보(小元甫), 향우(香又), 오염(吳琰), 충질(忠質) 등과 해로로 가서 맞이했다. 도착한 뒤 견훤이 10살 많았기 때문에 존칭으로 상보(尙父)로 하고 남궁(南宮)에 모신 뒤 양주(楊州)의 식읍과 전장, 노비 40명, 말 9필을 주고 후백제에서 항복해 온 신강(信康)을 아전(衙前)으로 삼았다. 견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는 그 처에게 몰래 말했다. “대왕은 40여년 동안 수고하여 공업이 거의 이루어지려 했으나 하루 아침에 가족간의 불화 때문에 땅을 잃고 고려에 복종케 되었구료. 무릇 정숙한 여인은 두 지아비를 따르지 않고 충성스런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니 만약 나의 주군을 버리고 반역한 아들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義士)를 보겠소. 하물며 고려의 왕공(王公)은 어질고 후덕하며 근검하여 민심을 얻었다고 들었으니 아마도 하늘의 계시인 듯 싶소. 그분은 반드시 삼한의 군주가 되리니 어찌 서신을 띄워 나의 주군을 위안하고 아울러 왕공께 은근한 마음을 표시하여 훗날의 복을 도모하지 않겠소” 그러자 처는 “당신의 말은 바로 제 뜻입니다.”라 하였다. 곧 천복(天福) 원년(936) 병신 2월, 사람을 보내 태조에게 “공께서 의로운 깃발을 드시면 내응하여 왕의 군대를 맞이하겠습니다.”는 뜻을 전했다. 태조는 기뻐하며 그 사신에게 후하게 예물을 주어 보내면서 “만약 장군의 은혜를 입어 하나가 됨으로써 길을 막고 저항하는 일이 없어진다면 먼저 장군을 찾아뵌 뒤 당에 올라 부인께 절하고 형과 누이로 존경하며 반드시 후히 보답할 것이니 천지의 귀신도 모두 이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6월(936), 견훤은 태조에게 “노신이 전하에게 투신한 까닭은 전하의 위엄에 기대 반역한 자식을 죽이고자 해서 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인께서 신병(神兵)을 빌려주어 난신적자(亂臣賊子)를 섬멸케 하신다면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고 부탁했다. 그러자 태조는 “토벌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적당한 때를 기다리십시다.”고 만류한 뒤 먼저 태자 무와 장군 술희를 보내 보병과 기병 10만을 거느리고 천안부(天安府)로 나아가게 했다. 가을 9월 태조도 삼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 합세하여 일선군[一善]으로 나아가니 신검이 군사를 거느리고 맞이하였다. 갑오일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는데 고려군은 동북쪽을 등지고 서남쪽을 향해서 진을 쳤다. 태조가 견훤과 함께 군사를 사열할 때 갑자기 창칼 같은 모습의 흰구름이 아군에서 일어나 저쪽으로 향하므로 이에 북을 쳐 진군하니 백제의 장군 효봉(孝奉) · 덕술(德述) · 애술(哀述) · 명길(明吉) 등은 군사의 세력이 크고 정연한 것을 보고 무기를 버리고 진 앞에서 항복했다. 태조는 그들을 위로하고 신검이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은 “신검은 중군(中軍)에 있습니다.”하고 대답했다. 태조는 장군 공훤(公萱) 등에게 명령하여 삼군이 일제히 나아가 협공하니 백제군은 무너져 도망갔는데 황산 탄현에 이르렀을 때 신검은 두 동생, 장군 부달(富達) · 능환(能奐)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했다. 태조는 항복을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위로한 뒤 처자와 함께 상경하는 것을 허락했다. 태조가 능환을 “처음 양검 등과 몰래 의논하여 대왕을 거두고 그 아들을 세우려 한 것은 네 계책이다. 신하된 의리로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하고 꾸짖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지 못하니 마침내 죽이라고 명령했다. 신검이 왕위를 찬탈한 것은 다른 사람의 위협 때문이지 그 본심은 아니었으며 또 항복하여 죄를 비니 특별히 사형을 면제해 주었다. 그 때문에 견훤은 울화가 치밀어 등창이 발병했는데 며칠 만인 9월 8일에 황산(黃山)의 불당에서 죽으니 70세였다. 태조의 군령이 엄숙하고 명확하여 사졸들이 조금도 백성을 침해하지 않으니 주현(州縣)이 편안하여 온 백성이 만세를 불렀다. 태조는 영규(英規)에게 “전왕이 나라를 잃은 뒤 그를 위로하는 신하가 한 명도 없었으나 오직 경의 부부 만이 먼 곳에서도 편지를 띄워 성의를 보였으며 아울러 과인에게 칭송을 돌리니 그 의로움을 잊을 수가 없다.”라 말하면서 좌승(左承)의 직책을 허락하고 밭 1천경(頃)을 하사했으며 역마 35필을 빌려주어 가족을 데려오도록 하고 두 아들에게 관직을 내려주었다. 견훤은 당(唐) 경복(景福) 원년(892)에 일어나 45년만인 진(晉) 천복(天福) 원년(936) 병신(丙申)에 멸망하였다. “사론(史論)에서 말하였다. 신라의 운수가 다하고 도의가 쇠퇴했으나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백성이 의지할 바 없게 되니 도적들이 그 틈을 타 마치 고슴도치 털 같이 일어났다. 강성한 자는 궁예와 견훤 두 사람 뿐이었는데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였으나 조국을 원수로 삼아 조상의 화상(?像)을 칼로 베기까지 했으니 그 어질지 못함이 매우 심하였다. 견훤은 신라의 백성에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었으나 역심(逆心)을 품고 나라의 위기를 틈타 도읍을 유린하여 임금과 신하를 짐승처럼 도륙하니 참으로 천하의 가장 큰 원흉이다. 이 때문에 궁예는 자기의 신하에게 버림받았고 견훤은 그 자식에게서 화근이 생겨났지만 모두 자초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항우나 이밀(李密)의 뛰어난 재주로도 한(漢)·당(唐)의 흥기를 대적하지 못했으니 하물며 궁예와 견훤 같은 흉악한 인물이 어찌 우리 태조에게 저항할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