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사

동천사

분류 문학 > 건축 > 사찰

기본정보

신라시대 경주에 지어진 절이다.

일반정보

동천사(東泉寺)는 신라시대 경주에 지어졌으며, 진평왕(眞平王)이 혁거세가 알에서 나와 목욕한 동천(東泉)에 창건한 절이다.

전문정보

동천사(東泉寺)는 신라시대 경주에 있던 절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그 알을 깨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시켰다.(剖其卵得童男 形儀端美 驚異之 浴於東泉[東泉寺在詞腦野北])”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또한 『삼국유사』 권2 기이2 원성대왕조에도 “두 여자가 내정(內庭)에 나와 아뢰기를 저희들은 동지(東池)·청지(靑池)[청지(靑池)는 곧 동천사(東泉寺)의 샘이다. 사기(寺記)에 이 샘은 동해의 용이 왕래하며 법문을 듣는 곳이요 절은 진평왕(眞平王)이 지은 것이니, 오백성중(五百聖衆)과 5층탑 및 전민(田民)을 아울러 헌납하였다] 두 용의 아내인데, 당사(唐使)가 하서국(河西國) 사람 둘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있는 용 등 세 마리에게 술법을 써서 작은 고기로 변하게 하여 통 속에 담아 가지고 갔습니다.(有二女進內庭 奏曰 妾等乃東池·靑池[靑池卽東泉寺之泉也 寺記云 泉乃東海龍往來聽法之地 寺乃眞平王所造 五百聖衆五層塔 幷納田民焉] 二龍之妻也 唐使將河西國二人而來 呪我夫二龍及芬皇寺井等三龍 變爲小魚 筒貯而歸)”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 같이 동천사는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혁거세가 알에서 나와 목욕한 동천(東泉)에 창건하였으며, 오층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천사가 있다고 전해지는 사뇌야(詞腦野),는 35금입택(金入宅) 중 하나인 동야택(東野宅)의 동야(東野)를 동쪽 방향의 들이라고 풀어서 “Sai Nai”로 읽을 수 있는 것과 관련하여, 곧 동야와 글자만 다른 같은 말로 이해되기도 한다. 즉 사뇌야는 동쪽 방향의 들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三品彰英, 1975) 청지(靑池)와 동천사는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동전천(東田泉)”, “동(東)” 등의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된 현재 경주시 동천동의 전 헌덕왕릉(傳 憲德王陵) 서북 일대를 동천사지로 추정하고 있다.(진성규·이인철, 2002)

참고문헌

三品彰英, 1975, 『三國遺事考?』上, ?書房.
진성규·이인철, 2002, 『신라의 불교사원』, 백산자료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
… 前漢地節元年壬子[古本云 建虎元年 又云 建元三年 等 皆誤]三月朔 六部祖各率子弟 俱會於閼川岸上 議曰 我輩上無君主 臨理蒸民 民皆放逸 自從所欲 蓋覓有德人 爲之君主 立邦設都乎 於是乘高南望 楊山下蘿井傍 異氣如電光垂地 有一白馬?拜之狀 尋?之 有一紫卵[一云 靑大卵] 馬見人長嘶上天 剖其卵得童男 形儀端美 驚異之 <浴>於東泉[東泉寺在詞腦野北] 身生光彩 鳥獸率舞 天地振動 日月淸明 因名赫居世王[蓋鄕言也 或作弗矩內王 言光明理世也 說者云 是西述聖母之所誕也 故中華人讚仙桃聖母 有娠賢肇邦之語 是也 乃至?龍現瑞産閼英 又焉知非西述聖母之所現耶] 位號曰居瑟邯[或作居西干 初開口之時 自稱云 閼智居西干 一起 因其言稱之 自後爲王者之尊稱] 時人爭賀曰 今天子已降 宜覓有德女君配之 是日 沙梁里閼英井[一作娥利英井]邊 有?龍現 而左脇誕生童女[一云 龍現死 而剖其腹得之] 姿容殊麗 然而唇似?? 將浴於月城北川 其?撥落 因名其川曰撥川 營宮室於南山西麓[今昌林寺] 奉養二聖兒 男以卵生 卵如瓠 鄕人以瓠爲朴 故因姓朴 女以所出井名 名之 二聖年至十三歲 以五鳳元年甲子 男立爲王 仍以女爲后 國號徐羅伐 又徐伐[今俗訓京字云徐伐 以此故也] 或云斯羅 又斯盧 初王生於?井 故或云?林國 以其?龍現瑞也 一說 脫解王時 得金閼智 而?鳴於林中 乃改國號爲?林 後世遂定新羅之號 理國六十一年 王升于天 七日後 遺體散落于地 后亦云亡 國人欲合而葬之 有大蛇逐禁 各葬五體爲五陵 亦名蛇陵 曇嚴寺北陵是也 太子南解王繼位
… 전한(前漢) 지절 원년(地節) 임자(壬子,기원전69)[옛 책에는 건호(建虎) 원년(25)이라 하고 또는 건원(建元) 3년(기원전 138)이라고도 하나 모두 잘못이다]3월 초하루에 육부(六部)의 조상들이 각기 자제들을 데리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서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위로는 백성을 다스릴 군주가 없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방일하여 제 마음대로 하게 되었다. 어찌 덕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 때에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 나정 곁에 이상스러운 기운이 전광(電光)과 같이 땅에 비치더니 흰 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곳을 찾아가 살펴보니 보랏빛 알 한 개[또는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한다]가 있는데, 말은 사람을 보자 길게 울면서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어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경이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시키니 몸에서는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지므로, 따라서 그를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 이름하였다.[아마 향언(鄕言)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설명하는자는 말하길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은 것이다. 중국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하여 현인을 낳아 나라를 시작하였다”란 말이 있는 것도 이 까닭이라 하였다. 계룡(鷄龍)이 상서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또한 서술성모의 현신(現身)을 말한 것이 아닐까] 위호(位號)를 거슬한(居瑟邯)[혹은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하니, 이는 그가 처음 말할 때에 스스로 일컬어 “알지거서간(閼智居西干)이 한번 일어났다” 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부른 것인데, 이로부터 왕의 존칭이 되었다]이라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치하하며 말하기를, 이제 천자가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 있는 배필을 찾아서 짝을 지어야 할 것이라 하였다. 이 날에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혹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한다] 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편 갈비에서 여자아이 하나를 탄생하니[혹은 용이 나타나 죽으며 그 배를 갈라 여자아이를 얻었다 한다], 자태와 얼굴은 유달리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월성(月城) 북천(北川)에 가서 목욕시키니 부리가 떨어졌다. 그 때문에 그 내를 발천(撥川)이라 하였다. 궁실을 남산(南山) 서쪽 기슭[지금 창림사(昌林寺)]에 세워 두 성스러운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나왔는데 알은 박과 같았다. 향인(鄕人)들이 박을 박(朴)이라 하므로 그로 인하여 성(姓)을 박(朴)이라 하였고, 여자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의 나이가 열세살이 되자 오봉(五鳳) 원년 갑자(甲子, 기원전 57)에 남자는 왕이 되고, 그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국호를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 세간에 경(京)을 훈독하여 서벌(徐伐)이라 이르는 것도 이 까닭이다]이라 하고 혹은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출생한 까닭에 혹은 계림국(鷄林國)이라 하니 계룡이 상서를 나타낸 까닭이었다. 일설에는 탈해(脫解) 때에 김알지(金閼智)를 얻을 때 닭이 숲속에서 울었으므로 국호를 고쳐 계림이라 하였다 하는데, 후세에 와서 신라(新羅)란 국호를 정하였다. 나라를 다스린지 62년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가더니 그 후 7일만에 유해가 흩어져 땅에 떨어졌으며 왕후도 따라 돌아가셨다 한다. 나라사람들이 합장하고자 하매 큰 뱀이 쫓아와 방해하므로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지내어 오릉(五陵)이라 하고, 또한 사릉(蛇陵)이라고도 하니, 담엄사 북쪽 능이 이것이다.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