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림사

창림사

분류 문학 > 건축 >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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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원형백과

기본정보

현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남산에 위치했었던 신라시대의 사찰

일반정보

창림사(昌林寺)는 현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남산 기슭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사찰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혁거세와 알영이 기거했던 신라의 첫 궁실이 창림사터 자리에 세워졌다고 한다. 창림사는 정확한 창건 시기는 물론이고 폐사 시기마저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신라의 서예가 김생(金生)이 창림사비(昌林寺碑)의 글을 썼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그가 활약했던 신라 원성왕 7년(791) 이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창림사터에는 창림사지삼층석탑(昌林寺址三層石塔)과 창림사지쌍귀부(昌林寺址雙龜趺) 등의 유물이 남아 있다.

전문정보

창림사(昌林寺)는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남산 기슭에 위치했던 신라시대의 사찰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赫居世王)조에는 “남산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이다.]에 궁실을 짓고 두 성스러운 아이들(혁거세와 알영)을 받들어 길렀다.(營宮室於南山西麓[今昌林寺] 奉養二聖兒)”라고 하였다. 이 기록을 근거로 남산 서쪽 기슭에는 금성(金城)이라는 명칭의 독립된 궁성(宮城)이 건립되었으며, 그 구체적인 위치는 지금의 창림사터에 해당하는 곳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이종욱, 1987)

창림사가 언제 세워지고 폐사되었는지는 기록으로 전하는 바가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상도 경주부 고적조에서 인용된 원(元) 학사(學士) 조자앙(趙子昻)의 창림사비(昌林寺碑) 발문(跋文)에서 “이것은 당대(唐代) 신라 중 김생(金生)이 쓴 그 나라의 창림사비(昌林寺碑)이다.(右唐新羅僧金生所書 其國昌林寺碑)”라고 한 점을 참고하여 대강의 창건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삼국사기』 권48 열전8 김생전에는 김생이 “경운 2년(성덕왕 10년, 711)에 태어났다. … 80세가 넘어서도 여전히 붓 잡는 것을 쉬지 않았다.(生於景雲二年 … 年踰八十 猶操筆不休)”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김생이 태어난 해가 711년이고 80년 이상을 살았으므로 창림사는 대략 김생이 사망하기 전인 791년 이전에 이미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창림사에 대해서 “금오산(金鰲山) 기슭에 신라 때 궁전의 옛터가 있었는데, 후인들이 그 자리에 이 절을 세웠다. 지금은 없어졌다.(金鰲山麓 有新羅時宮殿遺基 後人卽其地建此寺 今廢)”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창림사는 적어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되었던 조선 현종 10년(1669) 이전에 폐사되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아직까지 창림사지(昌林寺址)는 전면 발굴과 같은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림사지에서는 “창림사(昌林寺)” 명(銘) 기와가 보고됨으로써 사찰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를 확보하게 되었다.(小場恒吉, 1940)

창림사지의 현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절의 영역은 높낮이에 따라 네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현재 옥개석(屋蓋石)과 탑신석(塔身石)이 남아있는 논이 최하단부이다. 다음 영역인 하단부는 경사진 구릉에 인공적으로 남북 60m, 동서 26m의 공간이 마련되었는데, 이곳에 남향을 한 창림사지쌍귀부(昌林寺址雙龜趺)가 위치해 있다. 세 번째의 중단부에는 건물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초석(礎石)과 와편(瓦片)들이 산재되어 있다. 마지막 최상단 지역에는 높이 7m의 대형 삼층석탑이 있는데, 탑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제외하면 법당(法堂)이 들어설 만한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신용철, 2004)

최상단에 위치한 창림사지삼층석탑(昌林寺址三層石塔)은 남산일대에서는 가장 큰 것이다. 폐탑으로 남아 있던 탑을 1976년에 복원하였는데, 이중기단의 상층에는 사실적 기법으로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조각되어 있다.(문화재관리국, 1977) 이 탑 사리공에서는 조선 순조 28년(1828) 「창림사무구정탑지(昌林寺無垢淨塔誌)」와 사경(寫經)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의 일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 내용은 국왕인 경응(慶膺, 문성왕)이 현세와 내세에서의 공덕을 쌓기 위하여 무구정탑을 만들었다는 것으로 이 시기에 많이 제작된 무구정탑과 그 신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최연식, 1992)

하단부에 위치한 창림사지쌍귀부는 모가 죽은 사각 대석 위에 두 마리의 거북이가 큰 비석을 등에 지고서 고개를 들어 기어가는 모습을 새긴 것이다. 거북이의 크기는 한 마리의 너비가 86.3cm, 길이 142.5cm, 높이 38.5cm이다. 현재 두 거북이의 머리는 모두 떨어지고 없는데, 그 중 한 마리의 머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고 다른 한 마리의 머리는 행방을 알 수 없다. 이 귀부 위에 세운 비신(碑身)에는 신라의 서예가 김생(金生)의 글씨가 새겨져 있어 멀리 당(唐)에까지 알려졌다고 하나 현재 비의 소재는 알 수 없다.(경주시, 1979)

참고문헌

小場恒吉, 1940, 『慶州南山の佛蹟』, 朝鮮總督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7, 『文化遺蹟總覽』中.
경주시 편, 1979, 『慶州南山古蹟巡禮』.
이종욱, 1987, 『新羅國家形成史硏究』, 일조각.
최연식, 1992, 「昌林寺 無垢淨塔誌」『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신용철, 2004, 「統一新羅 八部衆像의 考察 -慶州 南山 昌林寺址 三層石塔像을 中心으로-」『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24, 경주시 신라문화선양회·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
… 前漢地節元年壬子[古本云 建虎元年 又云 建元三年 等 皆誤]三月朔 六部祖各率子弟 俱會於閼川岸上 議曰 我輩上無君主 臨理蒸民 民皆放逸 自從所欲 蓋覓有德人 爲之君主 立邦設都乎 於是乘高南望 楊山下蘿井傍 異氣如電光垂地 有一白馬?拜之狀 尋?之 有一紫卵[一云 靑大卵] 馬見人長嘶上天 剖其卵得童男 形儀端美 驚異之 <浴>於東泉[東泉寺在詞腦野北] 身生光彩 鳥獸率舞 天地振動 日月淸明 因名赫居世王[蓋鄕言也 或作弗矩內王 言光明理世也 說者云 是西述聖母之所誕也 故中華人讚仙桃聖母 有娠賢肇邦之語 是也 乃至?龍現瑞産閼英 又焉知非西述聖母之所現耶] 位號曰居瑟邯[或作居西干 初開口之時 自稱云 閼智居西干 一起 因其言稱之 自後爲王者之尊稱] 時人爭賀曰 今天子已降 宜覓有德女君配之 是日 沙梁里閼英井[一作娥利英井]邊 有?龍現 而左脇誕生童女[一云 龍現死 而剖其腹得之] 姿容殊麗 然而唇似?? 將浴於月城北川 其?撥落 因名其川曰撥川 營宮室於南山西麓[今昌林寺] 奉養二聖兒 男以卵生 卵如瓠 鄕人以瓠爲朴 故因姓朴 女以所出井名 名之 二聖年至十三歲 以五鳳元年甲子 男立爲王 仍以女爲后 國號徐羅伐 又徐伐[今俗訓京字云徐伐 以此故也] 或云斯羅 又斯盧 初王生於?井 故或云?林國 以其?龍現瑞也 一說 脫解王時 得金閼智 而?鳴於林中 乃改國號爲?林 後世遂定新羅之號 理國六十一年 王升于天 七日後 遺體散落于地 后亦云亡 國人欲合而葬之 有大蛇逐禁 各葬五體爲五陵 亦名蛇陵 曇嚴寺北陵是也 太子南解王繼位
… 전한(前漢) 지절 원년(地節) 임자(壬子,기원전69)[옛 책에는 건호(建虎) 원년(25)이라 하고 또는 건원(建元) 3년(기원전 138)이라고도 하나 모두 잘못이다]3월 초하루에 육부(六部)의 조상들이 각기 자제들을 데리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서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위로는 백성을 다스릴 군주가 없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방일하여 제 마음대로 하게 되었다. 어찌 덕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 때에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 나정 곁에 이상스러운 기운이 전광(電光)과 같이 땅에 비치더니 흰 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곳을 찾아가 살펴보니 보랏빛 알 한 개[또는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한다]가 있는데, 말은 사람을 보자 길게 울면서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어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경이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시키니 몸에서는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지므로, 따라서 그를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 이름하였다.[아마 향언(鄕言)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설명하는자는 말하길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은 것이다. 중국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하여 현인을 낳아 나라를 시작하였다”란 말이 있는 것도 이 까닭이라 하였다. 계룡(鷄龍)이 상서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또한 서술성모의 현신(現身)을 말한 것이 아닐까] 위호(位號)를 거슬한(居瑟邯)[혹은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하니, 이는 그가 처음 말할 때에 스스로 일컬어 “알지거서간(閼智居西干)이 한번 일어났다” 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부른 것인데, 이로부터 왕의 존칭이 되었다]이라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치하하며 말하기를, 이제 천자가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 있는 배필을 찾아서 짝을 지어야 할 것이라 하였다. 이 날에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혹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한다] 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편 갈비에서 여자아이 하나를 탄생하니[혹은 용이 나타나 죽으며 그 배를 갈라 여자아이를 얻었다 한다], 자태와 얼굴은 유달리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월성(月城) 북천(北川)에 가서 목욕시키니 부리가 떨어졌다. 그 때문에 그 내를 발천(撥川)이라 하였다. 궁실을 남산(南山) 서쪽 기슭[지금 창림사(昌林寺)]에 세워 두 성스러운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나왔는데 알은 박과 같았다. 향인(鄕人)들이 박을 박(朴)이라 하므로 그로 인하여 성(姓)을 박(朴)이라 하였고, 여자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의 나이가 열세살이 되자 오봉(五鳳) 원년 갑자(甲子, 기원전 57)에 남자는 왕이 되고, 그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국호를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 세간에 경(京)을 훈독하여 서벌(徐伐)이라 이르는 것도 이 까닭이다]이라 하고 혹은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출생한 까닭에 혹은 계림국(鷄林國)이라 하니 계룡이 상서를 나타낸 까닭이었다. 일설에는 탈해(脫解) 때에 김알지(金閼智)를 얻을 때 닭이 숲속에서 울었으므로 국호를 고쳐 계림이라 하였다 하는데, 후세에 와서 신라(新羅)란 국호를 정하였다. 나라를 다스린지 62년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가더니 그 후 7일만에 유해가 흩어져 땅에 떨어졌으며 왕후도 따라 돌아가셨다 한다. 나라사람들이 합장하고자 하매 큰 뱀이 쫓아와 방해하므로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지내어 오릉(五陵)이라 하고, 또한 사릉(蛇陵)이라고도 하니, 담엄사 북쪽 능이 이것이다.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