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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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학 > 건축 >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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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사찰

일반정보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사찰로서 왕실과 관계된 사찰로 추정되나 창건자 및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전문정보

신라의 왕경에 창건된 황복사(皇福寺)는 현재 경주시 구황동에 폐사지(廢寺址)만이 남아있다. 현재의 사지(寺址)에서 ‘황복(皇福)’, ‘왕복(王福)’ 등의 명문 기와편이 출토되어 이곳이 황복사였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삼국유사』 권4 의해5 의상전교에서는 “(의상이) 나이 29세에 서울의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年二十九依京師皇福寺落髮)”라고 되어있다. 의상이 644년에 승려가 되었으므로 황복사는 그 이전에 창건된 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 황복사 관련 기사로는 『삼국유사』왕력편 경명왕(景明王)조에 “황복사에서 화장하였다(火葬皇福寺)”라는 기록과 『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12 경명왕 8년조에 “황복사 북쪽에 장사지냈다.(葬于皇福寺北)”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현재 사지(寺址)에는 국보 제37호인 ‘경주구황리삼층석탑(慶州九黃里三層石塔)’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부조된 건물기단부 석재와 귀부(龜趺)가 남아있다. ‘경주구황리삼층석탑’은 높이 7.3m로서 불국사 석탑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의 탑으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보관한 최초의 탑이기도 하다. 1942년 수리공사 때 2층 옥개석 내에서 순금여래입상과 좌상, 은과 동의 고배(高配), 무수한 유리구슬, 팔찌, 금실 등이 청동사리함과 함께 발견되었는데 사리함 내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이 탑이 효소왕 원년(692)에 세워졌음을 알게 되었다.

「황복사석탑금동사리함기(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記)」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저 성인은 가만히 있으면서 혼탁한 세상에서 백성을 기르고 지극한 덕은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신문대왕이 오계로 세상에 응하고 십선으로 백성을 다스려 통치를 안정하고 공을 이루고는 천수 3년(692) 임진년 7월 2일에 돌아갔다. 신목태후와 효소대왕이 받들어 종묘의 신성한 영령을 위해 선원가람에 삼층석탑을 세웠다. 성력 3년(700) 경자년 6월 1일에 신목태후가 마침내 세상을 떠나 높이 극락에 오르고 대족 2년(702) 임인년 7월 27일에는 효소대왕도 승하하였다. 신룡 2년(706) 경오년 5월 30일에 지금의 대왕이 부처 사리 4과와 6치 크기의 순금제 미타상 1구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석탑의 둘 째 층에 안치하였다. 이 복전으로 위로는 신문대왕과 신목태후 효소대왕의 대대 성묘가 열반산을 베고 보리수에 앉는데 보탬이 되기를 빈다. 지금의 융기대왕은 수명이 강산과 같이 오래고 지위는 알천과 같이 크며 천명의 자손이 구족하고 칠보의 상서로움이 나타나기를 빈다. 왕후는 몸이 달의 정령과 같고 수명이 겁수와 같기를 빈다. 내외 친속들은 옥나무처럼 장대하고 보물 가지처럼 무성하게 열매맺기를 빈다. 또한 범왕 제석 사천왕은 위덕이 더욱 밝아지고 기력이 자재로와져 천하가 태평하고 항상 법륜을 굴려 삼도의 중생이 어려움을 벗어나고 육도 중생이 즐거움을 받으며 법계의 중생들이 모두 불도를 이루기를 빈다.

사주는 사문 선륜이다. 소판 김순원과 김흥종이 특별히 왕명을 받든다. 승 영휴, 승 영태, 대나마 아모, 대사 계력. 탑전은 승 혜안, 승 심상, 승 원각, 승 현방, 대사 일인, 대사 전극, 사지 조양, 사지 순절이다. 만든 이는 계생과 알온이다.(夫聖人垂拱處濁世而育蒼生 至德無爲應閻浮而濟群有 神文大王五戒應世十善御民治定功成 天授三年壬辰七月二日乘天 所以神睦太后孝照大王奉爲 宗?聖靈禪院伽藍建立三層石塔 聖曆三年庚子六月一日 神睦太后遂以長辭高昇淨國 大足二年壬寅七月?七日 孝照大王登霞 神龍二年丙午五月?日 今主大王佛舍利四全金彌陀像六寸一軀無垢淨光大陀羅尼經一卷安置石塔第二層 以卜以此福田上資 神文大王神睦太后孝照大王 代代聖?枕涅盤之山坐菩提之樹 隆基大王壽共山河同久位與軋川等大千子具足七寶呈祥 王后體類月精命同劫數 內外親屬長大玉樹茂實寶枝 梵釋四王威德增明氣力自在 天下太平恒轉法輪三塗勉難六趣受樂法界含靈俱成佛道 寺主沙門善倫 蘇判金順元金興宗特奉 敎旨僧令?僧令太韓奈麻阿摸韓舍季歷 塔典僧惠岸僧心尙僧元覺僧玄昉韓舍一仁韓舍全極舍知朝陽舍知純節匠季生閼溫)”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명문에 따르면 신문왕이 691년에 돌아가자 그의 아들인 효소왕이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 이듬해(692)에 이 탑을 세웠으며, 효소왕이 죽자 성덕왕 5년(706)에 앞의 두 왕을 위해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넣고 아울러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세를 기원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명문으로 인해 황복사가 신문왕의 원찰(願刹)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신종원, 1992) 또한 이것은 신문왕의 능이 바로 이 곳 황복사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과도 연결해서 고찰할 수 있다. 즉 『삼국사기』권8 신라본기8 신문왕 12년조의 “낭산동쪽에 장사지냈다.(葬狼山東)”라는 기록과 황복사 부근의 십이지석열 유적과 석재가 산재해 있는 것을 근거로 이곳을 신문왕릉으로 추정하고 있기도 하다. (강우방, 1973) 한편 전 신문왕릉(사적 제181호)은 경주시 배반동에 위치하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참고문헌

강우방, 1973,「新羅 十二支像의 分析과 理解」『佛敎美術』1.
신종원, 1992,「신라 오대산사적과 성덕왕의 즉위」『崔永禧先生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五十四 景明王 [朴氏 名昇英 父神德 母資成 妃長沙宅 大尊角干 追封聖僖大王之子 大尊卽水宗伊干之子 丁丑立 理七年 火葬皇福寺 散骨于省等仍山西]
제54 경명왕 [박씨이며 이름은 승영이다. 아버지는 신덕왕이고, 어머니는 자성왕후이다. 왕비는 장사택으로 대존각간, 즉 추봉된 성희대왕의 자식이다. 대존은 곧 수종 이간의 아들이다. 정축년에 즉위하여 7년간 다스렸다. 황복사에서 화장하여 뼈를 성등잉산 서쪽에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