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사

흥국사

분류 문학 > 건축 >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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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고려시대에 창건된 초문사(肖門寺) 후대의 사찰

일반정보

고려시대의 절인 흥국사는 『해동고승전』에 따르면 고구려의 초문사(肖門寺)가 변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는 이를 착오로 보고 있다.

전문정보

고려시대 사찰인 흥국사는 『삼국유사』 왕력에 의하면 고려 태조 7년(924) 갑신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또 『삼국유사』 권3 흥법3 순도조려(順道肇麗)조에 의하면 고구려의 초문사가 그 전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찬자 일연은 압록강 북쪽에 고구려의 첫 수도 안시성(安市城)이 있기 때문에 고려 수도 개성에 있는 흥국사가 그곳에 있다는 것은 오류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51 평양부 고적조에 평양에도 흥국사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흥국사의 전신이 초문사라는 것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즉, 초문사는 처음에 국내성에 있다가 후에 평양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신동하, 1988)

흥국사의 창건기사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왕력에만 전하고 있다. 흥국사에는 고려의 명장 강감찬(姜邯贊, 948-1031)이 이름을 짓고 찬(撰)하였다고 하는 오중탑(五重塔)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 현종 12년(1021)에 건립된 이 탑 속에는 강감찬의 제시(題詩)와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가 있었다고 한다. 오중탑 속에 있었던 사탑고적고를 통하여 흥국사 위치가 지금의 개성직할시 만월동임을 확인할 수 있다.(권상로, 1979)

태조 초기에 창건된 사찰들은 대부분 개경의 궁궐 주변이나 송악산에 위치하였다. 이러한 이유는 당시 사찰의 기능과 관련 있었다. 태조는 팔관회(八關會)‧연등회(燃燈會)‧제석신앙(帝釋信仰)‧무차대회(無遮大會)‧미륵신앙(彌勒信仰) 등 중요 불교행사를 각 사찰에 분담시켜 각 종파(宗派)의 근거지로 삼았으며, 그곳에서 중요한 불교행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며, 동시에 사찰의 위치가 아직 제도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궁궐을 보완하는 기능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사찰의 설치는 태조 초기 대체로 개경의 중심부 궁궐 주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점차 창건되는 사찰의 위치가 개경 중심부에서 송악산 위쪽으로 확대되었다. 그 이유는 후삼국 통일을 전후하여 개경의 도시구조 틀이 잡히게 되어, 중심부에는 더 이상 큰 사찰이 들어설 공간이 확보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박종진, 2000)

흥국사는 고려 초기의 관단(官檀) 사찰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수계(受戒)는 크게 사적(私的)으로 행해지는 것과 공적(公的)으로 행해지는 것으로 나누어지는데 대부분은 거의 공적인 관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특히 고려의 통치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한 후삼국통일 이후는 모두 관단에서 수계하였고 신라말‧고려초에도 관단에서 수계한 기록이 있다. 흥국사가 관단 사원의 기능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은 적연국사(寂然國師) 영준(英俊)이 14세 때(945)에 이 사원의 관단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흥국사의 창건 당시에 관단이 있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신라말‧고려초에 관단에서 수계한 기록이 있고 구족계를 받은 시기와 흥국사의 창건연대의 차이가 크지 않으므로 태조가 흥국사를 세울 때 관단을 설치하여 관단사원의 기능을 지니게 한 것이라 추측한다. 즉 태조는 관단사원을 두어 구족계의 수계를 국가에서 관장하려 하였던 것이다.(한기문, 1998)

참고문헌

권상로 편, 1979, 『韓國寺刹全書』, 동국대학교출판부.
신동하, 1988, 「高句麗의 寺院 造成과 그 意味」『韓國史論』19,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한기문, 1998, 『高麗寺院의 構造와 機能』, 민족사.
박종진, 2000, 「고려시기 개경 절의 위치와 기능」『역사와 현실』38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왕력)
太祖[戊寅六月裔死 太祖卽位于鐵原京 己卯 移都松岳郡 是年 創法王 慈雲 王輪 內帝釋 舍那
又創天禪院 [卽普<濟>] 新興 文殊 (靈)通 地藏 前十大寺皆是年所創 庚辰 乳岩下立油市 故今俗利市云乳下 十月創大興寺 或系壬午 壬午 又創日月寺 或系辛寺 甲申 創外帝釋 新衆院 興國寺 丁亥 創妙寺 己丑 創龜山 庚寅安 丙申統三]

태조[무인년6월에 궁예가 죽으니 태조가 철원경에서 즉위하였다. 기묘년에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겼다. 이 해에 법왕·자운·왕륜·내제석·사나 등의 절을 세우고 또 천선원[곧 보제]·신흥·문수·영통·지장 등의 절을 세웠으니 앞의 10대 사찰은 모두 이 해에 창건되었다. 경진년에 유암 아래에 유시를 설치하였다. 이 때문에 지금 항간에서는 시장에서 이익을 얻는 것을 유하라고 한다. 10월에 대흥사를 세우니 또는 임오년의 일이라고도 한다. 임오년에 또 일월사를 세우니 또는 신사년의 일이라고도 한다. 갑신년에 외제석·신중원·흥국사를 세우고, 정해년에는 묘사를 기축년에 귀산사를 세웠으며 경인년에 안(이하미상). 병신년에 삼국을 통일하였다.]

(『삼국유사』 권3 흥법3 순도조려)
順道肇麗
順道肇麗[道公之次 亦有法深義淵曇嚴之流 相繼而興敎 然古傳無文 今亦不敢編次 詳見僧傳]高麗本記云 小獸林王卽位二年壬申 乃東晉咸安二年 孝武帝卽位之年也 前秦符堅 遣使及僧順道 送佛像經文[時堅都關中 卽長安] 又四年甲戌 阿道來自晉 明年乙亥二月 創肖門寺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高麗佛法之始 僧傳作二道來自魏云者 誤矣 實自前秦而來 又云肖門寺今興國 伊弗蘭寺今興福者 亦誤 按麗時都安市城 一名安丁忽 在遼水之北 遼水一名鴨淥 今云安民江 豈有松京之興國寺名 讚曰 鴨淥春深渚草鮮 白沙鷗鷺等閑眠 忽驚柔櫓一聲遠 何處漁舟客到烟

순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하다
순도(順道)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하다.[순도공(順道公)의 다음에 법심(法深), 의연(義淵), 담엄(曇嚴)의 무리가 서로 계속하여 불교를 일으켰다. 그러나 『고전(古傳)』에는 기사가 없으므로 지금 여기서 함부로 편차(編次)하지 않는다. 『승전(僧傳)』에 자세히 보인다.]
고구려본기[高麗本記]에 이르기를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384) 즉위 2년 임신(壬申)(372)은 즉 동진(東晉) 함안(咸安) 2년이니 효무제(孝武帝, 재위 372-396)가 즉위하던 해였다. 전진(前秦)의 부견(符堅, 재위 357-385)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시켜 불상과 경문(經文)을 보내왔다.[그때 부견은 관중(關中)에 도읍하였으니, 즉 장안(長安)이다.] 또 4년(374) 갑술(甲戌)에 아도(阿道)가 진(晉)에서 왔다. 이듬해 을해(乙亥) 2월에는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여 순도를 두고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아도를 두었으니 이것이 고구려[高麗] 불법의 시초이다.”라고 하였다. 『승전(僧傳)』에 순도와 아도가 위(魏)에서 왔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사실은 전진(前秦)에서 왔다. 또 초문사(肖門寺)는 지금의 흥국사(興國寺)이고, 이불란사(伊弗蘭寺)는 지금의 흥복사(興福寺)라 한 것도 역시 잘못이다. 생각컨대 고구려 시대의 도읍(都邑)은 안시성(安市城), 일명 안정홀(安丁忽)이니 요수(遼水)의 북쪽에 있었고, 요수는 일명 압록(鴨淥)으로 지금은 안민강(安民江)이라 한다. 송경(松京, 개경) 흥국사(興國寺)의 이름이 어찌 여기에 있을 수 있으랴. 찬(讚)한다. “압록에 봄이 깊어 물가의 풀빛 고운데, 백사장에 갈매기 한가롭게 조는구나. 부드러이 노 젓는 소리에 놀라 한 소리 길게 우니, 어느 곳 고깃배가 손님을 싣고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