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미추왕릉

전 미추왕릉

분류 문학 > 건축 > 왕릉
전 미추왕릉 본문 이미지 1
전 미추왕릉 본문 이미지 2

기본정보

지정명 : 신라미추왕릉(新羅味鄒王陵)
지정번호 : 사적
소재지 : 경북 경주시 황남동(皇南洞) 89-2

일반정보

미추왕릉은 『삼국유사』에서 죽현릉(竹現陵)․죽장릉(竹長陵)이라고도 부른다고 하였다. 현재 신라 제13대 미추왕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는 고분은 경주고분공원으로 조성한 대릉원(大陵苑) 내의 106호분이다. 내부구조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으로 여겨지는데, 당시에 적석목곽분이 조성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전문정보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미추이사금 23년조에서는 “왕이 재위 23년에 돌아가니 대릉(大陵)(또는 죽장릉(竹長陵)이라고도 함)에 장사지냈다(二十三年 冬十月 王薨 葬大陵(一云竹長陵))”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미추왕(味鄒王) 죽엽군조(竹葉軍條)에서는 미추왕이 “왕위에 있은 지 23년 만에 죽었으며 능(陵)은 흥륜사(興輪寺) 동쪽에 있다(在位二十三年而崩 陵在興輪寺東)”고 하였다. 또한, 14대 유례이사금 14년에 이서고국(伊西古國: 지금의 청도(淸道))이 금성(金城)을 쳐들어왔을 때 귀에 대나무잎을 꽂은 죽엽군(竹葉軍)이 갑자기 신라군을 도와 이들을 물리친 일이 있는데, 이들 병사들이 돌아간 곳을 찾아보니 미추왕릉 위에 대나무잎이 쌓여 있어 선왕(先王)의 음덕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 설화 때문에 미추왕릉은 대묘(大廟) 혹은 대릉(大陵)․죽장릉(竹長陵)․죽현릉(竹現陵)이라 칭한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경주시내 평지고분군 가운데 미추왕릉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을 통해서는 “대릉(大陵)”의 자세한 내부구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문자 그대로 고총고분(高塚古墳)을 의미한다는 추론은 가능하다.

현재 제13대 미추왕의 능이라 전해오는 왕릉은 경주 분지내 마립간시기의 집단묘역인 노서동고분군, 노동동고분군, 황남동고분군 내에 있으며, 왕성인 월성과는 남북으로 근접하였다. 주변에 대형분이 밀집하여 있으며, 천마총과 황남대총은 그 북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다. 봉분 직경은 56.7m, 높이 12.4m로 경주시내 평지고분 가운데에서도 대형분에 속한다. 능 앞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혼유석이 있고, 남쪽에는 삼문(三門)이 있으며, 이 삼문을 따라 담장이 돌려져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으나 모두 후대에 설치한 것이다. 또 능 전방 가까운 곳에 왕을 제사하기 위한 숭혜전(崇惠殿)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에 불탄 것을 조선 정조 18년(1794)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이러한 표면상의 특징은 전미추왕릉의 묘제가 대릉원내의 다른 대형분들과 마찬가지로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며, 규모로 보아 피장자의 신분은 최상위 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왕 또는 왕족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능이 실제 미추왕의 능인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도 미추왕릉의 조영시기인 3세기말에 과연 적석목곽분이 발생하였는지의 여부가 먼저 검토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미추왕대 고총고분이 조성되었다는 연구들은 다음과 같이 크게 구별할 수 있다.

첫째, 『삼국사기』의 대릉(大陵) 기사를 토대로 미추왕릉을 가장 초기의 적석목곽분으로 보는 견해이다. 여기서는 미추왕의 즉위, 곧 김씨족의 출현이 신라가 실질적인 왕국 단계에 도달한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는 적석목곽분의 발생을 미추왕릉과 연계시키는 것으로서 이 묘제가 김씨계의 왕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즉, 미추왕, 나물왕 등 김씨왕이 나타나면서 교동과 황남동을 왕릉지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노서동․노동동으로 점차 확대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현 경주 중심지 남부 일대의 거대한 봉토묘군은 미추왕대인 3세기 말경에서부터 조성된 김씨계 왕족의 분묘임이 분명하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적석목곽분의 기원은 시베리아 적석총-신석기시대 적석총-영남지방의 다곽식지석묘-경주 적석목곽분이라고 하는 일련의 계통을 정립하여 외래적 요소를 강조하였다.(김원룡, 1986)

둘째, 적석목곽분을 김씨족과 연관된 외래적인 요소로 보고 그 기원을 추적하여, 김씨족을 소백산맥의 재지세력으로 보면서, 이들이 경주에 진출하는 시점 즉 3세기 중반 미추왕대에 경주 지역에서 적석목곽이 출현하였다고 본 견해가 있다. 여기서는 적석목곽을 말갈과 연결지으면서, 그 전파경로를 동해안을 중심으로 말갈 침입기사와 연계시켰다.(박영복, 1992)

셋째, 적석목곽분이 미추왕대에 활발히 보급․전파되었다는 견해이다. 이는 탈해조의 석총(石塚) 기사와 예맥과의 접촉기사를 근거로 당시 압록강 연안의 고구려 적석총이 신라에 전파되었으며, 이것이 3세기 경에 이르러 활발히 보급되었다는 입장이다.(강인구, 1984)

넷째, 미추왕이 죽었을 때 비로소 “대릉”(고총고분)이 조성되었다면, 이는 당시 신장된 왕권을 반영하는 것이며, 또한 대외적으로 고구려와의 폭넓은 문화교류도 상정해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곧, 당시 고구려에서 왕실을 중심으로 일반적으로 조성되었던 고총고분의 묘제가 3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신라에 본격적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문화전파의 경로였던 소문국을 지배하고 있었던 구도-미추 세력이 이를 적극적으로 흡수․동화시킨 것으로 보았다.(박순교, 1993)

다섯째, 미추왕대에 적석목곽분이 조성되었다고 보는 것은 위와 동일하나, 미추왕의 재위년대인 262년-283년을 부정하고 미추를 나물마립간과 동일하게 보는 견해이다. 곧, 적석목곽분을 4세기 무렵 즉 나물왕대에서부터 6세기 지증왕대에 이르는 마립간 시기의 묘제로 보아, 적석목곽분의 개시 시기를 마립간 시기의 시작과 일치시키기 위해 미추를 나물마립간과 동일하게 보는 것이다. 경주일원에만 존재한 적석목곽분의 기원에 대해서는 시베리아 쿠르간 계통의 묘제로 보고 있다.(최병현, 1992)

이 견해에 의하면, 적석목곽분은 대형일수록 시기가 빠르고 시기가 내려올수록 규모가 축소되면서 세부구조가 간략화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전 미추왕릉은 5세기말 6세기 전후로 보고 있는 천마총과(이종선, 2000) 비슷한 규모를 보이고 있으므로, 그 시기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3세기말 경주분지에 실재한 미추왕의 묘제는 봉분이 전혀 남아있지 않는 목곽묘 단계이므로, 실제 미추왕릉은 찾기가 어려워진다. 이처럼 문헌과 고고학적 상황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그동안 고고학계에서는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눌지마립간 19년조의 “19년(435) 봄 정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2월에 역대(歷代)의 왕릉을 수리하였다. 여름 4월에 시조묘에 제사지냈다(十九年春正月 大風拔木 二月 修葺歷代園陵 夏四月 祀始祖廟)”는 기사를 참고하여, 전 미추왕릉이 3세기말에 일단 만들어졌다가 후대에 개축 또는 개수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먼저 2월의 기사를 “역대 왕릉에 새로이 봉토를 입혔다”고 해석한 후, 이를 토대로 당시에 눌지왕 이전의 18대에 이르는 왕과 왕비들의 능 30여기를 오늘날과 같은 외형을 가진 고총고분으로 개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기도 하고,(강인구, 1984) 원래 미추왕릉은 목곽묘 단계로서 봉분의 규모가 크지 않았는데, 151년 후인 435년에 와서 정변으로 왕위에 오른 눌지왕이 내물계의 직계 조상묘들에 대해 당시의 묘제인 적석목곽분과 같은 외형으로 수축하였다고 보기도 한다.(최병현, 1992)

경주분지 고분군 내에 존재하는 30여기의 대형분 가운데에서, 밑지름 56.7m, 높이 12.4m인 중형급인 106호분만 피장자가 미추왕이라는 분명한 전승과정을 지키고 있다면, 『삼국유사』 권1 기이1 미추왕(味鄒王) 죽엽군조(竹葉軍條)에 따라 전 미추왕릉과 동서방향을 이루고 있는 경주공업고등학교 일원의 절터가 흥륜사지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삼국사기』에서 법흥왕 이전 왕들의 장지 관련 기록을 보면, 박․석․김 3성 시조왕들에 대해서만 한정적으로 관련기사가 등장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시조 혁거세부터 통일초 어느 시점에 이르기까지는 왕들의 장지가 기록으로 남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통일기에 이르면 사서 편찬 과정에서 왕들의 장지를 기록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것이다.

미추왕릉의 장지를 언급한 ‘대릉(大陵)’ 역시 구체성이 결여된 표현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후대의 필요에 의해 소급되어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시기는 대체로 신라 하대 또는 고려 초일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의 미추왕릉은 중대에 지정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유는 혜공왕대에 이르러 오묘제(五廟制)를 개정하면서 미추왕이 김성 시조의 자격으로 오묘의 수위(首位)로 모셔지기 시작한 것과 아울러 미추왕릉을 “대묘(大廟)”라 칭했다는 점이(『삼국유사』 권1 기이1 미추왕 죽엽군) 주목되기 때문이다. 즉, 신라 중대에 이르러 전대의 역사를 새롭게 편찬하는 과정에서 미추왕을 실질적인 김성 시조로 결정하면서부터 미추왕릉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8세기 중엽에 이르러, 3세기말의 고고학적 상황과 무관하게 미추왕릉이 고총고분 가운데 지정되었고, 곧이어 왕실에 의해 “대묘(大廟)”로 추숭(追崇)되었다고 보았다.(이근직, 2002) 조선 전기 경주지역에 전해오던 신라 왕릉을 직접 조사한 후에 기록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1469) 능침조에서는 혁거세릉․미추왕릉․법흥왕릉․진흥왕릉․선덕여왕릉․효소왕릉․성덕왕릉․헌덕왕릉․흥덕왕릉 등 9기의 왕릉과 김유신묘 등 모두 10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미추왕릉에 대한 전승은 『삼국유사』 권1 기이1 미추왕 죽엽군조 이후 조선전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김원룡, 1986, 『韓國考古學槪說』, 일지사.
강인구, 1984, 『三國時代 墳丘墓硏究』,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최병현, 1992, 『新羅古墳硏究』, 일지사.
박영복, 1992, 「新羅 적석목관분의 發生과 消滅에 관한 一考」『국사관논총』33.
박순교, 1993, 「신라 미추왕대의 정치세력과 남당정치」『大丘史學』46.
이종선, 2000, 『古新羅王陵硏究』, 학연문화사.
이근직, 2002, 「신라 興輪寺 위치관련 기사 검토」『新羅文化』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