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백암수

남원 백암수

분류 문학 > 건축 > 사찰

기본정보

전라북도 남원군에 있던 절

일반정보

남원(南原) 백암수(白嵓藪)는 전라북도 남원군에 있던 절이다. 『삼국유사』 백엄사석탑사리(伯嚴寺石塔舍利)조에 의하면 신탁(神卓) 화상이 남원(南原) 백암수(白嵓藪)로 부터 백엄사로 와서 그곳의 주지가 되었다고 한다.

전문정보

남원(南原) 백암수(白嵓藪)는 전라북도 남원군에 있던 절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4 백엄사석탑사리(伯嚴寺石塔舍利)조에 따르면 초계(草溪)에 창건된 후 오랫동안 폐사되었던 백엄사를 병인년(丙寅年, 906)에 사목곡(沙木谷)의 양부(陽孚) 화상(和尙)이 고쳐 짓고 주지가 되었으며 정축년(丁丑年, 917)에 입적하였다고 한다. 이후 을유년(乙酉年, 925)에 희양산(曦陽山) 긍양(兢讓) 화상이 백엄사에 와서 10년을 머물다가 다시 을미년(乙未年, 935)에 희양산으로 돌아갔다. 이때 신탁(神卓) 화상이 남원(南原) 백암수(白嵓藪)에서 와 이 절에 들어가 법에 따라 주지가 되었다고 한다.

백암수에 관하여 전하는 기록이 거의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중국 송(宋)나라의 도원(道源)이 1004년에 지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17에 보이는 신라 박암화상(泊巖和尙)에 관한 기록이 보이며, 고려 말의 승려 각운(覺雲)이 펴낸 『염송설화(拈頌說話)』에서는 박암개산조(泊巖開山祖) 긍양(兢讓)이란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들에서 보이는 박암은 곧 남원 백암수와 관련있다고 본 견해가 있다.(김영태, 1979) 한편 긍양이 입당하기 전 남원 백암사에 머물면서 유학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이인재, 2005)

참고문헌

김영태, 1979, 「曦陽山禪派의 성립과 그 法界에 대하여」『韓國佛敎學』4, 韓國佛敎學會.
추만호, 1992, 「9산선문의 성립」『나말려초 선종사상사 연구』, 이론과 실천.
이인재, 2005, 「선사 긍양의 생애와 대장경」『한국사연구』131, 한국사연구회.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백엄사석탑사리)
伯嚴寺石塔舍利
開運三年丙午十月二十九日 康州界任道大監柱貼云 伯嚴禪寺坐草八縣[今草溪] 寺僧偘遊上座 年三十九云 寺之經始則不知 但古傳云 前代新羅時 北宅廳基捨置玆寺 中間久廢 去丙寅年中 沙木谷陽孚和尙 改造住持 丁丑遷化 乙酉年 曦陽山兢讓和尙來住十年 又乙未年 却返曦陽 時有神卓和尙 自南原白嵓藪 來入當院 如法住持 又咸雍元年十一月 當院住持得奧微定大師釋秀立 定院中常規十條 新竪五層石塔 眞身佛舍利四十二粒安邀 以私財立寶 追年供養條<第>一 當寺護法敬僧嚴欣伯欣兩明神及近岳等三位前 立寶供養條[諺傳 嚴欣伯欣二人 捨家爲寺 因名曰伯嚴 仍爲護法神] 金堂藥師前木鉢 月朔遞米條等 已下不錄

백엄사(伯嚴寺) 석탑 사리
개운(開運) 3년 병오(丙午, 946) 10월 29일 강주계(康州界) 임도대감(任道大監) 주첩(柱貼)에 “백엄선사(伯嚴禪寺)는 초팔현(草八縣)[지금의 초계(草溪)]에 있는데, 절의 스님 간유(偘遊) 상좌(上座)는 나이가 39세이다.”라고 하였다. 절을 짓기 시작한 때는 알 수 없으나, 다만 고전(古傳)에 이르기를, “전대(前代)인 신라시대에 북택(北宅)에서 집터를 희사하여 이 절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중간에 오랫동안 폐사되었는데, 지난 병인년(丙寅年, 906)에 사목곡(沙木谷)의 양부(陽孚) 화상(和尙)이 고쳐 짓고 주지를 하다가 정축년(丁丑年, 917)에 세상을 떠났다. 을유년(乙酉年, 925)에 희양산(曦陽山) 긍양(兢讓) 화상이 와서 10년을 머물다가 다시 을미년(乙未年, 935)에 희양산으로 돌아갔다. 이때 신탁(神卓) 화상이 남원(南原) 백암수(白嵓藪)에서 와서 이 절에 들어가 법에 따라 주지를 하였다. 또한 함옹(咸雍) 원년(1065) 11월에 이 절의 주지 득오미정대사(得奧微定大師) 석수립(釋秀立)이 절에서 늘 지켜야할 규칙 10조를 정하고 새로 5층 석탑을 세워 진신 불사리 42낱을 가져다 봉안하였다. 사재(私財)로써 보(寶)를 만들어 해마다 공양할 것을 제일로 하고, 이 절에서 불법을 수호하던 존경받는 스님 엄흔(嚴欣)과 백흔(伯欣) 두 명신(明神)과 근악(近岳) 등 세분 앞으로 보를 세워 공양할 것[세간에 전하기를, 엄흔과 백흔 두 사람은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이름을 백엄(伯嚴)이라 하였고, 이에 호법신이 되었다고 한다], 금당의 약사여래 앞 나무 바리때에는 매월 초하루마다 쌀을 바꾸어 넣을 것 등이었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