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덕사

망덕사

분류 문학 > 건축 > 사찰
망덕사 본문 이미지 1
망덕사 본문 이미지 2
망덕사 본문 이미지 3

기본정보

신라 중대 왕경(王京)에 창건된 사찰

일반정보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위치했던 신라시대 사찰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문무왕대 당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사천왕사(四天王寺)를 당 사신에게 숨기기 위해 그 맞은 편에 망덕사를 지었다는 연기설화가 전한다. 현재 절터에는 보물 제69호로 지정된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쌍탑지, 건물지 등이 남아 있다.

전문정보

망덕사(望德寺)는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위치했던 신라시대의 사찰이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문호왕법민(文虎王法敏)조에는 망덕사의 창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연기설화가 실려 있다.

문무왕(文武王) 15년(675)에 당(唐)은 군사 50만으로 신라(新羅)를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이를 미리 안 문무왕은 명랑법사(明朗法師)로 하여금 당병(唐兵)을 물리칠 방도를 마련케 하였다. 명랑은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립하고 유가(瑜?)의 명승(明僧) 12인과 더불어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행하여 두 차례에 걸친 당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이후 당 고종은 신라의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으로부터 신라가 당의 은혜로 삼국(三國)을 통일한 덕(德)을 갚기 위해 낭산(狼山) 남쪽에 새로 천왕사(天王寺)를 짓고 황수만년(皇壽萬年)을 축원하는 법회를 열었다는 보고를 듣게 된다. 이에 당 고종(高宗)은 크게 기뻐하며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예부시랑(禮部侍郞) 악붕귀(樂鵬龜)를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신라의 문무왕은 당의 사신으로부터 사천왕사를 숨기기 위해 사천왕사 남쪽에 새로운 절을 지어 놓고는, 당의 사신이 도착하자 그 절로 안내하였다. 그러나 사신은 자신이 인도된 절이 사천왕사가 아님을 알아차리고는 절의 문 앞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아니라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구나.”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새로 지은 절의 이름을 망덕사(望德寺)라 하였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문호왕법민조의 망덕사 연기 설화에 따르면 이 절은 문무왕 15년(675) 이후 어느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신문왕 5년(685)조에는 “여름 4월에 망덕사(望德寺)를 완성하였다.(夏四月 望德寺成)”라고 기록하고 있어 앞의 연기 설화에서 기록하고 있는 창건 시기와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는 문무왕대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신문왕 5년에 완성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삼국유사』 권5 감통7 진신수공(眞身受供)조에는 “장수(長壽) 원년(元年, 692) 임진(壬辰)에 효소(孝昭)가 즉위하여 처음으로 망덕사를 세우고 장차 당 황실의 복을 빌었다.(長壽元年壬辰 孝昭卽位 始創望德寺 將以奉福唐室)”라고 하여, 망덕사 창건에 대한 또 다른 전승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살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놓고 보았을 때 망덕사가 효소왕대 처음으로 창건되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이에 대해서 『삼국유사』의 찬자 역시도 문호왕법민조에서 망덕사의 연기 설화를 정리한 뒤 그 말미에 세주(細註)를 달아 “혹은 효소왕(孝昭王) 때의 일이라고 하나 잘못이다.(或系孝昭王代 誤矣)”라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진신수공조의 망덕사 창건 기록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다. 하나는 망덕사가 효소왕과 관계 깊은 절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효소왕의 무덤이 망덕사 동쪽이었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또한 망덕사는 당과도 관계있는 절인 듯하다. 이를테면 비록 당의 사신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하나 당 황제의 복을 빌었던 절이라는 점이 어떤 연관성을 느끼게 한다.(박해현, 2003) 실제로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14년조에 언급되어 있는 고음(顧?)의 「신라국기(新羅國記)」에는 “그 나라가 당을 위해 이 절(망덕사)을 세운 까닭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其國爲唐 立此寺 故以爲名)”라고 하였다. 또한 당에서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던 경덕왕 14년(755)에 망덕사의 두 탑이 흔들렸다는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경덕왕14년조와 『삼국유사』 권5 감통7 진신수공(眞身受供)조의 기록은 이러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삼국유사』에는 이외에도 망덕사에서 효소왕이 재(齋)를 베풀 때 진신석가(眞身釋迦)를 알아보지 못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공양한 뒤 진신석가로부터 조롱을 당한 설화와, 이 절에서 『육백권반야경(六百卷般若經)』을 사경(寫經)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선율(善律)이 명부(冥府)에 갔다가 경의 완성을 위하여 환생한 설화 등이 실려 있다.

망덕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이 절터에 대해서는 1969년과 1970년 2차에 걸쳐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1969년에 목탑지를 조사하였고, 1970년에는 금당지·동회랑지·북회랑지가 조사되었다. 발굴조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귀면와(鬼面瓦)·명문전(銘文塼)·개원통보(開元通寶) 그리고 고려시대의 청동정병(靑銅淨甁)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절터에는 동·서쪽에 목탑지가 남아 있으며 그 북쪽으로 금당지가 자리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가람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금당지를 중심으로 좌·우측에 목탑지가 있고 그 남쪽으로 중문지가 있다. 그리고 금당지의 북쪽으로 강당지가 있으며 이들을 둘러싸는 회랑지가 있다. 금당의 좌우에도 익랑지가 있으며 중문지의 남쪽에는 계단터가 있고 그 서쪽에는 보물 제69호인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국립박물관, 1970)

참고문헌

국립박물관, 1970, 『博物館뉴스』1, 국립박물관.
박해현, 2003, 『신라 중대 정치사 연구』, 국학자료원.

관련원문 및 해석

第三十二 孝昭王 [名?恭(一)作洪 金氏 父神文王 母神穆王后 (壬)辰立 理十年 陵在望德寺東]
제32 효소왕 [이름은 이공, 혹은 이홍이라고 하며 김씨이다. 아버지는 신문왕이고 어머니는 신목왕후이다. 임진년에 즉위하여 10년간 다스렸다. 능은 망덕사 동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