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

월성

분류 문학 > 건축 > 궁궐
월성 본문 이미지 1
월성 본문 이미지 2
월성 본문 이미지 3
월성 본문 이미지 4

기본정보

지정명 : 경주월성(慶州月城)
지정번호 : 사적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인왕동 387-1

일반정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때의 도성으로, 현재 경북 경주시 인왕동(仁旺洞)에 있는 계림과 국립경주박물관 사이의 성터 유적으로 비정된다. 신라 파사왕 22년(101)에 축조되었다고 전해진다.

전문정보

이 성은 모양이 반달 같다 하여 “반월성(半月城)”?“신월성(新月城)”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곳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탈해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토함산정에서 경주시내를 조망하다가 이 월성 자리를 길지라 생각하고, 원래 호공(瓠公)의 거주지였던 이곳을 꾀를 부려 차지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파사이사금 22년(101) 기록에는 “봄 2월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이라 이름하였다. 가을 7월에 왕이 월성에 이거(移居)하였다(二十二年 春二月 築城名月城 秋七月 王移居月城)”고 했다. 곧, 월성을 궁성으로 쌓은 뒤 금성(金城)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여러 차례 궁실을 중수하여 오다가 유례왕 7년(290)에 와서 홍수로 인해 월성이 무너졌다고 하였는데, 아마 이때의 일이 『삼국유사』 왕력편에 나타나는 월성 보축 기사와 연결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자비왕 18년(475)에 명활성으로 이거(移居)하였다가 소지왕 9년(487)에는 월성을 수리하고, 소지왕 10년(488)에 월성으로 다시 이거(移居)하였다. 선덕여왕 16년(647)에 비담(毗曇)의 난이 일어났을 때 왕의 군대가 월성에 주둔하였고, 반군은 명활성에 주둔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 진덕왕 5년(651) 기사를 통해서는 조원전(朝元殿)이 성내에 있었음을 알 수 있고, 태종무열왕 2년(655) 기사를 통해서는 고루(鼓樓)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나라가 커짐에 따라 부근 일대가 편입되기도 하였는데, 특히 문무왕때에는 안압지(雁鴨池)?임해전(臨海殿)?첨성대(瞻星臺) 일대가 편입, 확장되어 신라의 중심지가 되었다.

월성은 근래의 지표조사에서 그 둘레가 2,340m이고, 면적이 19,3845㎡임이 밝혀졌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4) 성벽은 동?서?북 3면과 서남면은 토석(土石)을 함께 다지고, 그 맨 위에 점토를 이겨 덮었다. 성벽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며 대체로 10-20m 정도 되게 쌓았으나, 남면은 문천(蚊川)이 있고 천연단애로 이루어진 곳이라서 거의 성벽을 쌓지 않았다. 지금 지표에서 흔적을 확인할 수 없으나, 당시에는 현재의 성벽 위에 다시 낮은 토장(土墻)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성에는 9개소의 문지(門址)가 남아 있다. 그 중에서 서쪽의 귀정문지(歸正門址)와 북쪽의 북문지는 문헌과 현지의 방위에 따라 추정할 수 있으며, 동북쪽에 남아 있는 문지는 1979-1980년에 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하여 정면 1칸, 측면 2칸의 단층 문루가 있음이 밝혀졌다.

해자(垓子) 시설도 발견되었는데, 해자 양쪽 석축의 간격은 동쪽으로 가면서 넓어져 최고 20여m까지 넓어지다가, 문지 앞에서는 10m 정도의 길이에 1.5m의 폭으로 좁아졌으며, 서쪽으로 가면서는 다시 넓어졌다. 해자는 이와 같이 모두 121m가 성 주위에 돌려졌음이 확인되었다. 또 이 해자 부근의 문지 북측 지점에서 동북으로 뻗어 있는 목책(木柵)을 발견하였다. 이 목책은 약 1.5m 간격으로 기둥을 세우고 옆으로 다시 원목을 차곡차곡 가로 댄 것이었는데, 수로를 위한 방책으로 보고 있다. 월성 내에는 소지(小池) 2개소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매몰되어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박방룡, 1997)

월성 내에는 경주 석씨의 시조를 모시는 숭신전(崇信殿)이 있었으나, 1980년에 석탈해왕릉(昔脫解王陵) 남쪽으로 옮겨졌다. 그리하여 현재의 월성 내에는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 만든 석빙고(石氷庫, 보물)만 남아 있다.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신라조에는 “신월성 북쪽에 만월성이 있다(新月城北有滿月城)”고 하였는데, 신월성이 지금의 월성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같은 기록에 “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였고 후세에 와서 두 월성에 많이 거처하였다(始祖已來處金城 至後世多處兩月城)”고 하여 월성이 2개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렇다면 초기의 월성과 신월성은 다른 것이다. 문헌 기술의 순서로 보아 만월성이 월성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아울러 신월성도 월성 이후에 세운 것이다. 그런데 같은 문헌에 월성과 신월성을 별도로 표기한 기록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아, 월성과 신월성은 별도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舊 월성에서 범위를 확장하여 세운 부분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7)

만월성은 신월성 북쪽에 있다고 되어 있어, 대체로 일제시대와 근년에 조사된 북천 남변의 전랑지로 추정하기도 하고, 현재의 경주고등학교 터를 주목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장경호, 1984, 「統一新羅時代의 宮殿建築」『考古美術』162?163.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1990, 『月城垓子』Ⅰ?Ⅱ.
박방룡, 1997, 『新羅 都城 硏究』, 東亞大學校 史學科 박사논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4, 『월성지표조사보고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7, 『경주 월성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2007년 7월 19일 학술 심포지엄 자료집).

관련원문 및 해석

第十四 儒禮尼叱今[一作世里智王 昔氏 父諸賁(王) 母□召夫人朴氏 甲辰立 治十五年 補築月城]
제14대 유례니질금[혹은 세리지왕이라고도 한다. 석씨이다. 아버지는 제분왕이고, 어머니는 □소부인 박씨이다. 갑진에 즉위하여 15년간 다스렸다. 월성을 보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