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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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학 > 건축 >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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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신라시대의 사찰

일반정보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과 김유신(金庾信)의 장지(葬地)와 관련된 사찰로, 모지사(毛只寺) 혹은 모지사(毛祗寺)라고 한다.

전문정보

신라 제35대 경덕왕과 김유신의 장지(葬地)와 관련된 사찰로, 경덕왕의 경우는『삼국유사』 왕력 경덕왕조에 “처음에는 경지사 서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서 돌을 다듬어 능을 만들었는데, 후에는 양장곡으로 이장하였다.(初葬頃只寺西岑 鍊石爲陵 後移葬楊長谷中)”라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24년조(765)에는 “모지사 서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葬毛祇寺西岑)”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모지사는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유신조에도 그 묘를 비정하면서 “능은 서산 모지사에서 북동쪽으로 향하는 봉우리에 있다.(陵在西山毛只寺北東向走奉)”라고 기록하고 있어 모지사(毛祗寺), 모지사(毛只寺), 경지사(頃只寺)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모(毛)와 경(頃), 지(祗)와 지(只)의 차이만 없으면 표기 방법과 내용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지(祗)와 지(只)는 “다만”이라는 의미와 함께 동일한 발음을 공유하고 있어 문제되지 않는다. 반면 경지사의 경(頃)은 항(項)->경(頃)이라는 변화양상을 거쳤거나 왕력편 편찬시 이미 저본으로 한 사료의 난독(難讀)으로 인하여 오독(誤讀)했을 가능성, 혹은 후대에 중간(重刊)되는 과정에서 오각(誤刻)의 여지가 있다고 보기도 하였다.(권상로, 1994) 즉 일반적으로 모지사(毛祗寺), 모지사(毛只寺), 경지사(頃只寺)는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모지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표적으로 전(傳) 김유신묘(金庾信墓)의 동쪽 계곡에 세워진 금산재(金山齋) 일원의 절터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금산재는 조선 후기에 금산사(金山寺)라는 사찰이 있었으며,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석조미륵반가사유상이 출토된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를 모지사로 볼 수 있고, 이렇게 본다면 역으로 모지사 서쪽 언덕 위에 조영된 전 김유신묘가 경덕왕릉이 된다고 보기도 한다.(최완수, 2000; 이근직, 2006)

참고문헌

권상로, 1994, 「頃只寺?毛只寺」 『한국사찰전서』(상).
최완수, 2000, 「성덕왕릉에 십이지신상이 세워진 까닭」 『신동아』12월호, 동아일보사.
이근직, 2006, 『新羅 王陵의 起源과 變遷』,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관련원문 및 해석

第三十五 景德王 [金氏 名憲英 父聖德 母炤德太后 先妃三毛夫人 出宮無後 後妃滿月夫人 諡景垂王后 垂一作穆 依忠角干之女 壬午立 理二十三年 初葬頃只寺西岑 鍊石爲陵 後移葬楊長谷中]
제35 경덕왕 [김씨이며, 이름은 헌영이다. 아버지는 성덕왕이고, 어머니는 소덕태후이다. 처음 왕비는 삼모부인으로, 궁중에서 폐출되어 후사가 없다. 다음 왕비는 만월부인으로, 시호는 경수왕후이다. 수는 혹은 목이라고도 한다. 의충 각간의 딸이다. 임오년(742)에 즉위하여 23년간 다스렸다. 처음에는 경지사 서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서 돌을 다듬어 능을 만들었는데, 후에 양장곡으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