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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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호암리 함월산에 있는 사찰.

일반정보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호암리 함월산에 있는 사찰로 선덕여왕 12년(643) 광유(光有)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전문정보

기림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호암리 함월산에 있는 사찰이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만파식적(萬波息笛)조에 의하면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이 만파식적을 얻어 왕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림사 서편 시냇가에서 점심을 먹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외에도 『삼국유사』 권3 탑상4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조에는 『삼국유사』의 찬자가 이 조목의 이야기를 “당시 내전에서 향을 사르고 기도하던 전 기림사의 대선사(大禪師) 각유(覺猷)에게서 얻은 것인데, 친히 본 일이라고 하면서 나(찬자)에게 기록하게 하였다.(得此實錄於當時內殿焚修 前祗林寺大禪師覺猷 言親所眼見 使予錄之)”라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 권3 탑상4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조에는 고려시대까지 전해진 의상대사와 범일국사 관련 두 보물을 나라에서 관리해야 한다고 주청을 올리는 승려로 또 기림사 주지 각유가 등장한다.

이외에도 기림사에 관한 기록은 절에 보관된 『기림사중창기(祇林寺重創記)』(1705)나 『신라함월산기림사사적(新羅含月山祇林寺事蹟)』(1740)?『김부윤공덕비(金府尹功德碑)』(1786)?『기림사중수기(祇林寺重修記)』(1900) 등에도 전하고 있다.

기림사의 창건에 대해 『기림사중창기』?『신라함월산기림사사적』?『기림사중수기』 등에는 기림사가 선덕여왕 12년(643) 광유(光有)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당시 절의 이름은 임정사(林井寺)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기림사는 원효(元曉, 617-686)에 의해 중창되었는데, 이 때 절의 이름이 임정사에서 기림사로 바뀌었다. 기림사란 부처님 생존 때에 세워졌던 인도 최초의 사찰인 기원정사(祈園精舍)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기림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은 그 진위여부가 확실치 않다고 한다. 왜냐하면 여타의 사서에서는 기림사의 창건주 광유를 찾아볼 수가 없어 그 존재가 의심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원효의 중창 기록 또한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한다. 위에 언급한 『삼국유사』 권2 기이2 만파식적조의 기록을 근거로 하면 기림사가 적어도 682년 이전에는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로 인해 원효의 생존 당시 기림사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원효의 생애에서 기림사와 관련한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한상길, 1998)

고려시대에 기림사는 『삼국유사』 권3 탑상4 전후소장사리조와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조에 전하는 바와 같이 대선사 각유가 주지로 있었다. 대선사는 고려시대 선종의 가장 높은 승계로서, 이러한 인물이 주지를 맡고 있었다는 사실은 기림사가 고려시대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컸음을 말해준다. 또한 1986년 기림사 대적광전(大寂光殿) 비로자나불상(毘盧舍那佛像)에서 발견된 복장전적(腹藏典籍, 보물 제959호) 중에는 『은자대장경(銀字大藏經)』(1348)?『금니다라니경(金泥陀羅尼經)』(1370)?『화엄경(華嚴經)』?『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 고려시대의 전적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통해 기림사는 다양한 전적을 소장하여 교학의 진흥에도 힘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기림사의 조선시대 역사는 비교적 자세히 남아있다. 현재 절에 전하는 각종 문헌기록들이 조선시대에 편찬되었고, 현존하는 전각과 불상?불화 등의 유물들도 대부분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들이다. 기림사는 조선 선조 11년(1578)에 축선(竺禪)에 의해 중건되었고, 정조 때에는 경주부윤 김광묵(金光默)이 사재를 털어 크게 중수하였다. 철종 13년(1862)에는 대화재로 113칸의 당우가 재가 되었으나, 이듬해 봄에 사찰의 승려들이 부윤 송우화(宋迂和) 등의 시주를 받아 공사를 시작하여 가을에 복원하였다. 그 뒤 고종 15년(1878)의 중수를 거쳐 1905년에는 혜훈(慧訓)이 다시 중수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주 일대에서 가장 큰 절로 불국사(佛國寺)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였으나, 현재는 반대로 불국사의 말사이다.

현재 기림사는 조선시대 후기에 건립된 대적광전(大寂光殿, 보물 제833호), 응진전(應眞殿, 경북유형문화재 제214호), 진남루(鎭南樓, 경북문화재자료 제251호), 약사전(藥師殿, 경북문화재자료 제252호), 명부전(冥府殿) 등의 건물을 중심으로, 한국 전쟁 후에 건립된 천왕문(天王門), 1980년대에 계속된 대불사에 의해 새로이 건립된 삼천불전(三千佛殿), 관음전(觀音殿), 삼성각(三聖閣), 종루(鐘樓) 등이 있다. 이들 여러 건물들의 배치상황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건물들이 주를 이루는 동쪽 일곽(하단부)과 이에 접하여 남북으로 한단 높게 축조된 축대에 의하여 구획된 최근 새로 중창한 서쪽 일곽(상단부)으로 구분되어 가람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 중 동쪽 하단부에 대해 살펴보면 대적광전을 중심에 두고 왼쪽에 약사전, 오른쪽에 응진전, 앞쪽에 진남루가 배치되어 있고 뜰에는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대적광전은 정면 5칸?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으로 된 다포양식의 건물이다. 내부에는 중앙의 불단에 기림사 소조 비로자나 삼존불상(보물 제958호)과 그 뒤에 후불탱화를 걸어 놓았다. 삼신불은 중앙에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좌측에 노사나불(盧舍那佛), 우측에 석가불(釋迦佛)로써, 흙으로 빚어 조성된 소조(塑造) 삼신불이다. 이 불상들은 법신불 복장품에서 『불상중수점안기(佛像重修點眼記)』가 발견되어 어느 정도 정확한 편년을 설정할 수 있다. 또한 불상의 양식을 보았을 때 장대한 상체의 특징, 법의(法衣)에서 조선 초기 불상에 표현되는 띠 매듭의 부재, 오른손목에서 흘러내린 옷자락이 아래쪽 배의 U자형 자락 속으로 들어간 착의법 등이 보여 이는 1550년경에서 1600년경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본다.(문명대, 1998)

한편 삼신불상 뒤에 독립적으로 봉안된 후불탱화(後佛幀?)가 앞에 봉안된 불상과 서로 일치하지 않아 주목된다. 후불탱화 중 중앙에 비로자나불화만 서로 일치할 뿐, 왼쪽불화는 아미타회상도(혹은 영산회상도)이고, 오른쪽불화는 약사회상도이다. 이렇듯 대적광전의 후불탱화가 앞의 불상과 일치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현존 대적광전은 처음부터 삼신불을 봉안한 것이 아니라 원래 대웅전이었으나 그 뒤 대적광전으로 법당의 명칭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본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현존 대적광전이 대웅전이었을 때에 불상은 석가?아미타?약사여래의 삼회상불을 봉안하고 후불탱화도 각각 영산회상도?아미타회상도?약사회상도를 봉안하였으나, 대웅전에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봉안하고 법당의 명칭을 대적광전으로 바꾸면서 현존 후불탱화의 구조로 조정된 것이라 본 것이다.(홍윤식, 1998)

이외에도 기림사의 특이한 건물로서 진남루가 있다. 진남루는 법당건물은 아니나 이 사찰의 성격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건물이다. 진남루라는 누각의 명칭은 남쪽을 진압한다는 뜻이고, 진남루는 군통수의 기능을 지닌 곳으로 조선시대에 승군(僧軍)들의 지휘소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이에 대해 진남루의 원래 기능은 불교의식의 집행 장소였으나, 불교의식이 불전내부에서 이루어짐에 따라 원래의 기능을 잃고 강의 등의 집회장소로 사용되거나 별도의 기능을 갖지 못하여 승군의 주둔지 역할을 하게 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홍윤식, 1998)

한편 기림사에 소장된 유물 중 가장 앞서는 것으로 기림사유물관에 소장된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 보물 제415호)이 있다. 머리에는 2단으로 투각된 높은 보관을 썼고 그 밑으로 머리칼이 드러나 있다. 몸은 비만형이고 얼굴의 이목구비는 작게 표현되었다. 목에는 삼도가 없고 세 줄의 구슬이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는데 이 형식은 고려 이래의 형식이다. 천의(天衣)는 두 어깨에 걸쳐서 팔을 거쳐 무릎 밑으로 내려왔고, 군의(裙衣)는 가슴 부근까지 올려 입고 띠를 묶었는데 독특한 형태로 매듭을 지었다. 오른다리는 늘어뜨리고 왼다리는 오른쪽 무릎에서 내려 대좌 위에 얹은 반가(半跏)의 형식이고, 왼손은 무릎 뒤로 돌려 대좌를 짚었고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 위에 얹고 있으나 팔 다리는 몸에 비해 매우 빈약하다. 원래 불신(佛身) 밑에는 장식 문양이 투각된 높은 대좌가 있으나 지금은 따로 보관하였다. 이 대좌에는 “홍치십사년신유정월시지사월초파일(弘治十四年辛酉正月始至四月初八日)”라는 묵서명이 있어 연산군 7년(1501)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진홍섭, 1976) 하지만 보살상과 대좌는 각각 분리되어 있고, 묵서의 연도가 반드시 조성시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불상의 양식이 원의 기법을 따르고 있어 조성시기가 1501년보다 앞설 것으로 추측한다.(한상길, 1998)

이 밖에 문화재로는 목탑지, 석조치미, 문적 등이 있다. 이 중 목탑지는 기림사 약사전 앞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 한 변 길이 9.5m 석대 위에 높이 70cm인 목탑지 초석이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으며, 특히 중심에는 방형의 이중사리공이 시공되어 있고, 그 밖에 3간씩의 주초석이 남아있다.(문화재관리국, 1977) 이 외에도 석조치미는 화강암으로 만든 것으로 화문(花紋) 장식이 있으며, 신라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기림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적으로는 『경상도영주제명기(慶尙道營主題名記)』?『동도역세제자기(東都歷世諸子記)』?『부호장생생가(府戶長生生家)』 등이 있다. 이들은 경상도와 경주의 행정에 관한 것과 행정관에 대한 인적사항, 신라 이후의 지방제도의 변혁 등을 기록한 중요한 문헌들이다. 또한 이 절에는 조선 역대 왕들의 어필도 보관되어 있는데 특이하게 석비 모양의 나무에 사적을 기록한 목비가 전한다.(김형우 외, 2006)

이외에도 기림사에는 오정수(五井水)라고 하는 다섯 개의 신기한 약수가 있었다고 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단 이슬과 같은 물로 차를 끓여 마시면 으뜸이라는 북암의 감로수(甘露水), 그냥 마셔도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후원의 화정수(和精水), 마시면 기개가 커지고 신체가 웅장해져 장군이 된다는 나한전 삼층석탑 아래의 장군수(將軍水), 눈이 맑아진다는 천왕문 앞의 명안수(明眼水), 물빛이 너무 좋아 까마귀가 쪼았다는 동편 산마루의 오탁수(烏啄水)가 그것이다. 그 중 장군수는 조선시대에 어떤 사람이 이곳에서 역모를 꾀하다가 발각된 뒤 나라에서 샘을 메워버렸고, 나머지 샘들도 대부분 물이 말라버렸다.(김형우 외, 2006)

한편 2008년 12월 약사전 삼존불을 전통 옻으로 새롭게 칠하는 개금불사(改金佛事)에 들어갔다가, 기존 불상이 여러 차례에 걸쳐 5~15㎝ 두께로 덧칠된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덧칠을 벗겨내는 과정에서, 삼존불이 그동안 일제강점기나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 불상은 연주황?주황색?녹색이 칠해진 채색 불상이라는 점에서 불교사와 미술사 측면에 학술적 가치가 있다. 고대 불상 중 채색 불상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얼굴 부분을 제외한 불상 대부분이 나무로 이뤄진 목불(木佛)이라는 점에서도 높은 문화재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한다. 불상 내부에서는 복장 유물도 발견되었는데, 고려시대 간행된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비롯해 1679년의 중수기, 17세기 말의 가사?적삼?저고리 등이 함께 나왔다.

참고문헌

진홍섭, 1976, 『韓國의 佛像』, 일지사.
문화재관리국, 1977, 『文化遺蹟總覽』中.
문명대, 1998, 「毘盧遮那三神佛圖像의 形式과 祇林寺 三身佛像 및 佛畵의 연구」『佛敎美術』15.
홍윤식, 1998, 「祇林寺의 伽藍構造와 그 意味」『佛敎美術』15.
김형우?신대현?안병인, 2006, 『한국의 사찰』下, 대한불교진흥원 출판부.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만파식적)
萬波息笛
第三十一神文大王 諱政明 金氏 開耀元年辛巳七月七日卽位 爲聖考文武大王 創感恩寺於東海邊[寺中記云 文武王欲鎭倭兵 故始創此寺 未畢而崩 爲海龍 其子神文立 開耀二年畢 排金堂?下 東向開一穴 乃龍之入寺 旋繞之備 蓋遺詔之葬骨處 名大王岩 寺名感恩寺 後見龍現形處 名利見臺] 明年壬午五月朔[一本云 天授元年 誤矣] 海官波珍<飡>朴夙淸奏曰 東海中有小山 浮來向感恩寺 隨波往來 王異之 命日官金春質[一作春日]占之 曰 聖考今爲海龍 鎭護三韓 抑又金公庾信 乃三十三天之一子 今降爲大臣 二聖同德 欲出守城之寶 若陛下行幸海邊 必得無價大寶 王喜 以其月七日 駕幸利見臺 望其山 遣使審之 山勢如龜頭 上有一竿竹 晝爲二 夜合一[一云 山亦晝夜開合如竹] 使來奏之 王御感恩寺宿 明日午時 竹合爲一 天地振動 風雨晦暗七日 至其月十六日 風霽波平 王泛海入其山 有龍奉黑玉帶來獻 迎接共坐問曰 此山與竹 或判或合如何 龍曰 比如一手拍之無聲 二手拍則有聲 此竹之爲物 合之然後有聲 聖王以聲理天下之瑞也 王取此竹 作笛吹之 天下和平 今王考爲海中大龍 庾信復爲天神 二聖同心 出此無價大寶 令我獻之 王驚 以五色錦彩金玉酬賽之 勅使斫竹出海 時山與龍忽隱不現 王宿感恩寺 十七日到祗林寺西溪邊 留駕晝饍 太子理恭[卽孝昭大王]守闕 聞此事 走馬來賀 徐察奏曰 此玉帶諸? 皆眞龍也 王曰 汝何知之 太子曰 摘一?沈水示之 乃摘左邊第二?沈溪 卽成龍上天 其地成淵 因號龍淵 駕還 以其竹作笛 藏於月城天尊庫 吹此笛 則兵退病愈 旱雨雨晴 風定波平 號萬波息笛 稱爲國寶 至孝昭大王代天授四年癸巳 因失禮郞生還之異 更封號曰萬萬波波息笛 詳見彼傳
만파식적
제31대 신문대왕의 이름은 정명(政明)이며 김씨다. 개요(開耀) 원년 신사(辛巳, 681) 7월 7일에 왕위에 올랐다. 부왕인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절에 있는 기록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으로 짓다가 끝마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682)에 끝마쳤다. 금당 섬돌 아래를 파헤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내었으니, 이는 용이 절에 들어와 서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을 대왕암(大王岩)이라고 하고, 절을 감은사라고 이름하였으며, 뒤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하였다.] 이듬해 임오(壬午, 682) 5월 초하루에[어떤 책에는 천수(天授) 원년(690)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해관(海官) 파진찬(波珍飡) 박숙청(朴夙淸)이 아뢰기를, “동해 가운데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서 왔다 갔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또는 춘일(春日)]에게 점을 치도록 하였다. 그가 아뢰길 “돌아가신 부왕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三韓)을 수호하고 있습니다. 또 김유신공도 33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상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 하여 나라를 지킬 보배를 내어주려 하시니, 만약 폐하께서 해변으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큰 보배를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기뻐하여 그 달 7일에 이견대로 행차하여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 살펴보도록 했더니, 산의 형세는 거북의 머리 같고 그 위에는 한 줄기 대나무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일설에는 산도 역시 밤낮으로 갈라지고 합침이 대나무와 같았다고 한다.] 사자가 와서 그것을 아뢰니, 왕이 감은사로 가서 유숙하였다. 이튿날 오시(午時)에 대나무가 합하여 하나가 되고 천지가 진동하며 비바람이 몰아쳐 7일 동안이나 어두웠다. 그 달 16일이 되어서야 바람이 잦아지고 물결도 평온해졌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흑옥대(黑玉帶)를 가져다 바쳤다. 왕이 영접하여 함께 앉아서 묻기를 “이 산과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기도 하고 혹은 합해지기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였다. 용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비유하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으니, 이 대나무라는 물건은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납니다. 성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좋은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다 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셨는데, 두 성인이 같은 마음으로 이처럼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배를 내어 저를 시켜 이를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놀라서 오색 비단과 금과 옥으로 보답하고,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서 바다에서 나오니 이 때 산과 용이 갑자기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유숙하고 17일에 기림사(祇林寺) 서쪽 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理恭)[즉 효소대왕]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는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며 천천히 살펴보고 말하기를 “이 옥대의 여러 쪽들이 모두 진짜 용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라고 물으니 태자가 아뢰기를 “쪽 하나를 떼어서 물에 넣어보면 보이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왼쪽의 둘째 쪽을 떼어 시냇물에 넣으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못이 되었다. 이로 인해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 하였다. 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하였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이 잦아지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왕대에 이르러 천수 4년 계사(癸巳, 693)에 실례랑(失禮郞)이 살아 돌아온 기이한 일로 해서 다시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봉하여 이름하였다. 자세한 것은 그 전기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