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제석궁

내제석궁

분류 문학 > 건축 > 사찰

기본정보

신라시대 경주 궁성 내에 세워진 사찰

일반정보

내제석궁(內帝釋宮)은 신라 진평왕대에 경주에 세워진 절로 천주사(天柱寺)라고도 하며, 궐 내에 있었던 제석(帝釋)을 모신 불당으로 보인다.

전문정보

내제석궁(內帝釋宮)은 신라 진평왕대에 경주에 세워진 절로 천주사(天柱寺)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천사옥대조에는 “제26 백정왕의 시호는 진평대왕이니 성은 김씨이다. 대건 11년 기해(579) 8월에 왕위에 올랐는데 신장이 11척이었다. 내제석궁[또한 천주사라고도 하니, 왕이 세운 것이다.]에 행차할 때에 돌계단을 밟으니 돌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라는 설화가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 불우조 의하면 “천주사가 있어 세간에 전하기를, ‘소지왕(炤智王)이 거문고의 갑(匣)을 쏘아 넘어뜨렸더니 그 속에 있던 자는 바로 이 절의 중이었다.’라고 한다. 북쪽에 안압지가 있었다.”라고 전한다. 즉 내제석궁은 월성의 서북쪽에 있는 안압지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1976년 안압지(雁鴨池) 일대의 발굴 조사 중에 근방에서 “천주사(天柱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와편이 출토되었다.(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8) 이를 통해 안압지 남쪽을 내제석궁이 있던 위치로 비정하고 있다. 안압지 일대는 동궁전(東宮殿)을 비롯한 부속 건물들이 위치하고 있는 궁궐터이므로, 따라서 내제석궁의 “내(內)”는 궐내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내제석궁은 궐 내에 있었던 제석(帝釋)을 모신 불당이란 의미에서 내제석궁이라 하였던 것으로 이해되며(안지원, 1997), 『삼국유사』 권1 기이1 사금갑조에서 금갑(琴匣)에서 궁주(宮主)와 내통하던 “내전 분수승(內殿 焚修僧)”의 존재를 참고해 보면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이전에 궐 내에 설치된 내전(內殿)이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신종원, 1992)

내제석궁은 천주사라고도 하였는데 “천주(天柱)”는 전통적 무속신앙(巫俗信仰)의 세계관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것으로, 천상(天上)과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우주수(宇宙樹)”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불교 수용 이후 왕궁 내 전통적 무속신앙의 신성지역이 불교적으로 변용되어 내전 또는 내불당으로 불리다가, 제석신앙이 고대적 천신관념과 습합되어 지배이데올로기로 표방되면서 내제석궁이라 명명되었고, 천상과 연결되는 우주축을 상징하는 곳으로써 천주사로도 불려지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안지원, 1997)

내제석궁(內帝釋宮)은 제석(帝釋)을 모신 사찰로, 신라 진평왕 대에 국정(國政)에 대한 자신감이 표출되어 표출된 제석신앙(帝釋信仰)의 수용을 보여준다. 진평왕이 성골(聖骨) 관념을 바탕으로 다른 왕족들과 차별을 두게 되면서, 이전부터 공유하였던 천(天)으로는 자신들의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천(天)의 관념으로 제석을 등장시키게 되었으며, 따라서 우리 고유의 천신(天神)이 불교 수용 후 제석천(帝釋天)으로 표현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제석(帝釋)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욕계(欲界)로 일컬어지는 세계의 두 번째 천으로 지거천(地居天)의 수미산(須彌山)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며 도리천(?利天)을 다스린다. 제석이 거느리는 도리천은 욕계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지상의 가장 꼭대기인 수미산 봉우리에 있는 장엄세계로 연결되어 관념적으로 다른 제천(諸天)들보다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쉬운 신이었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면서 권속들을 이끌고 불법을 수호하는 제석의 관념은 석가모니 왕실을 그대로 재현한 신라 왕실에서 차용되었다. 따라서 신라 왕실은 제석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진평왕 자신도 제석의 호위를 받는 부처와 같은 존재로 군림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안지원, 1997)

따라서 천사옥대조 설화에서와 같이 왕이 행차하여 내제석궁의 돌계단을 밟으니 돌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는 이야기는 진평왕이 왕으로서 강력한 힘의 소유자였음을 상징하는 것이며, 이를 부동석(不動石)으로 만들어 신성시함으로써 왕의 권위를 나타내 보였다는 것을 뒷받침 해준다고 보기도 한다.(이정숙, 1999)

『삼국유사』 권5 감통7 월명사도솔가조에서는 “홀연히 외양이 깨끗한 한 동자(童子)가 공손히 차와 구슬을 받들고 궁전(宮殿) 서쪽 소문(小門)에 나타났다. 월명(月明)은 이것이 내궁의 사자(使者)라 하고, 왕은 사(師)의 종자(從者)라 하였으나, 현징(玄徵)의 결과 모두 아니었다. 왕이 매우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뒤를 쫓게 하니 동자는 내원탑(內院塔) 속으로 숨고, 차와 구슬은 남벽화(南壁畵) 미륵상(彌勒像) 앞에 있었다.”는 설화가 전해져 온다. 이곳에서 등장하는 “내원탑(內院塔)”은 내제석궁의 탑으로서 따라서 내제석궁에는 내원탑과 벽화로 그려진 미륵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보기도 하였다.(진성규·이인철, 2003)

참고문헌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8, 『雁鴨池 發掘調査報告書』.
신종원, 1992, 『新羅初期佛敎史硏究』, 민족사.
안지원, 1997, 「新羅 眞平王代 帝釋信仰과 王權」『歷史敎育』63.
이정숙, 1999, 「眞平王代 王權强化와 帝釋信仰」『新羅文化』16.
진성규·이인철, 2003, 『신라의 불교사원』, 백산자료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천사옥대)
天賜玉帶[淸泰四年丁酉五月 正承金傅獻鐫金粧玉排方腰帶一條 長十圍 鐫?六十二 <曰>是眞平王天賜帶也 太祖受之 藏之內庫]
第二十六白淨王 諡眞平大王 金氏 大建十一年己亥八月卽位 身長十一尺 駕幸內帝釋宮[亦名天柱寺 王之所創] 踏石梯 二石幷折 王謂左右曰 不動此石 以示後來 卽城中五不動石之一也 卽位元年 有天使降於殿庭 謂王曰 上皇命我傳賜玉帶 王親奉?受 然後其使上天 凡郊廟大祀皆服之 後高麗王將謀伐羅 乃曰 新羅有三寶 不可犯 何謂也 皇龍寺丈六尊像一 其寺九層塔二 眞平王天賜玉帶三也 乃止其謀 讚曰 雲外天頒玉帶圍 ?雍龍袞雅相宜 吾君自此身彌重 准擬明朝鐵作?
하늘이 내려준 옥대[청태 4년 정유(937) 5월에 정승 김부가 금으로 새기고 옥으로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치니, 길이가 10위요, 새겨 넣은 장식이 62개였다. 이것은 진평왕(眞平王)이 하늘에서 받은 띠라고 한다. 고려 태조(太祖)는 이것을 받아서 내고(內庫)에 두었다.]
제26대 백정왕(白淨王)의 시호는 진평대왕(眞平大王)으로 성은 김씨이다. 대건 11년 기해(579) 8월 왕위에 올랐는데 키가 11척이었다. 내제석궁에 행차하여[또한 천주사라고도 하는데 왕이 창건하였다.] 돌계단을 밟으니 돌 2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에게 말하기를 “이 돌을 옮기지 말고 뒷사람들에게 보여라”고 하였으니, 성 안에 있는 움직이지 못하는 다섯 개의 돌 중 하나이다. 즉위 원년에 천사(天使)가 궁전의 뜰에 내려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상황(上皇)께서 나에게 명하여 옥대(玉帶)를 전해주라 하였습니다.”하니 왕은 친히 꿇어앉아서 받았다. 그 후에 천사는 하늘로 올라갔다. 무릇 큰 제사 때에는 모두 이 옥대를 착용하였다. 그 후에 고구려왕이 장차 신라를 치려고 계획하면서 말하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할 수 없다하니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라고 하니, “황룡사의 장육존상이 첫째요, 그 절의 9층탑이 둘째요, 진평왕의 천사옥대가 셋째입니다.”하고 이에 고구려왕은 그 계획을 중지하였다. 찬하여 말하였다. 구름 위의 하늘이 옥대를 내리니, 임금의 곤룡포에 알맞게 둘렀구나, 우리 임금 이로부터 몸 더욱 무거우니, 이 다음엔 쇠로써 섬돌을 만들까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