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제석

내제석

분류 문학 > 건축 > 사찰

기본정보

고려 태조 2년(919) 송악에 창건된 10대 사찰 중 하나.

일반정보

내제석(內帝釋)은 곧 제석원(帝釋院) 또는 내제석원(內帝釋院)이라고 하며,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재위 2년(919)에 송악(松岳)에 창건한 10대 사찰 중 하나이다. 제석도량(帝釋道場)이 열린 제석신앙(帝釋信仰)의 중심사찰이다.

전문정보

내제석(內帝釋)은 『고려사(高麗史)』에서 “내제석원(內帝釋院)”이라 지칭되는 사원(寺院)으로, 고려(高麗)의 태조(太祖)가 재위 2년(919) 송악(松岳, 지금의 개성)에 창건한 10대 사찰 중 하나이다. 태조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우리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모든 부처의 호위에 힘입은 것이다(我國家大業 必資諸佛護衛之力)”라고 하여 후삼국의 통일이 불교에 힘입은 바가 컸으며, 고려 왕조의 사상적 기반도 불교에 두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숭불정책(崇佛政策)의 일환으로 고려 도선(道詵)이 지정한 산수(山水)의 순역(順逆)에 따라 사원(寺院)을 창건하였다. 특히 태조가 919년 수도를 철원(鐵原)에서 송악(松岳)으로 옮긴 뒤, 그 곳에 세운 법왕(法王)·자운(慈雲)·왕륜(王輪)·내제석(內帝釋)·사나(舍那)·천선원(天禪院)·신흥(新興)·문수(文殊)·영통(靈通)·지장(地藏) 등의 10대 사찰은 경주 중심의 고대적 불교기반을 송악으로 재편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한기문, 1998)

내제석은 제석신앙(帝釋信仰)의 중심사원으로, 제석을 모시는 제석도량(帝釋道場)이 행해졌던 곳이다. 제석은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로 나누는 불교 세계관에서 욕계(欲界)인 수미산(須彌山), 그 중에서도 정상에 해당하는 도리천(?利天)을 주지하는 신이다. 도리천은 천상과 바로 연결되는 곳으로 이곳에 사는 제석은 인간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는 신이 된다. 제석은 사천왕(四天王)과 팔부신중(八部神衆)을 거느리면서 부처님을 공양하고 인간사회에 정법(正法)을 이루게 한다. 또한 병과 재앙·전쟁으로부터 인간을 수호하고 수명을 장수하게하며, 사회를 안정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제석의 이러한 능력은 인간의 선행 정도에 따라서 강해지며, 이로 인하여 인간들에 대한 수호력도 함께 증가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제석신앙은 민중교화의 의미를 가지게 하였으며, 후삼국 통일 후 새로운 국가의 운영과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는 고려의 호국적 의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서윤길, 1976)

궐내에 세워졌던 내제석은 본래 제석원(帝釋院)이라 지칭되었으나, 태조 7년(924)에 궐 밖에 창건된 외제석(外帝釋)과 구분하기 위하여 후에 “내(內)”자를 붙인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외제석 창건 후에도 내·외가 붙지 않은 “제석원(帝釋院)”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외제석이 창건되기 전에 구태여 내·외를 붙여 구별할 필요가 없어 내세석을 제석원이라 부르던 관례가 계속 남은 것이다.(안지원, 2005) 이처럼 고려의 내제석과 외제석은 내덕(內德)·외덕(外德)의 분류에 따라 세워졌다. 이러한 근거로 고려의 내제석은 제석신앙, 외제석은 사천왕(四天王)을 비롯한 제석이 통솔하는 신들에 대한 의례가 행하여 졌던 것으로 파악한다.(서윤길, 1976)

참고문헌

서윤길, 1976, 「高麗의 帝釋信仰」 『佛敎學報』15.
한기문, 1998, 『高麗寺院의 構造와 機能』, 민족사.
안지원, 2005, 『고려의 국가 불교의례와 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관련원문 및 해석

太祖[戊寅六月裔死 太祖卽位于鐵原京 己卯 移都松岳郡 是年 創法王 慈雲 王輪 內帝釋 舍那
又創天禪院 [卽普<濟>] 新興 文殊 (靈)通 地藏 前十大寺皆是年所創 庚辰 乳岩下立油市 故今俗利市云乳下 十月創大興寺 或系壬午 壬午 又創日月寺 或系辛寺 甲申 創外帝釋 新衆院 興國寺 丁亥 創妙寺 己丑 創龜山 庚寅安 丙申統三]
태조[무인년(918) 6월에 죽으니 태조가 철원경에서 즉위하였다. 기묘년(919)에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겼다. 이 해에 법왕·자운·왕륜·내제석·사나 등의 절을 세우고 또 천선원[곧 보제]·신흥·문수·영통·지장 등의 절을 세웠으니 앞의 10대 사찰은 모두 이 해에 창건되었다. 경진년(920)에 유암 아래에 유시를 설치하였다. 이 때문에 지금 항간에서는 시장에서 이익을 얻는 것을 유하라고 한다. 10월에 대흥사를 세우니 또는 임오년(922)의 일이라고도 한다. 임오년(922)에 또 일월사를 세우니 또는 신사년(921)의 일이라고도 한다. 갑신년(924)에 외제석·신중원·흥국사를 세우고, 정해년(927)에는 묘사를 기축년(929)에 귀산사를 세웠으며 경인년(930)에 안(이하미상). 병신년(936)에 삼국을 통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