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사

무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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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신라시대 경상북도 경주시 암곡동 무장산에 위치했던 절

일반정보

무장사는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암곡동 무장산에 위치했던 절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무장사미타전(鍪藏寺彌陀殿)조에는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의 아버지 효양(孝讓)이 그의 숙부를 추모하여 창건한 절이라는 기록을 전한다. 또한 절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 태종(太宗,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에 병기와 투구를 골짜기 안에 감추어서, 그 때문에 무장사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전문정보

무장사(鍪藏寺)는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암곡동 무장산에 위치했던 절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4 무장사미타전(鍪藏寺彌陀殿)조에서 무장사의 유래와 관련 내용들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의 아버지 효양(孝讓)이 그의 숙부 파진찬(波珍飡, 17관등 중 4번째 관등)을 추모하여 무장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또한 절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 태종(太宗, 태종무열왕 재위, 645-661)이 삼국을 통일한 후에 병기와 투구를 골짜기 안에 감추어서, 그 때문에 무장사라고 이름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무장사 위쪽에 있었던 아미타(彌陀)를 모신 옛 불전인 미타전(彌陀殿)에 대해서는, 소성왕(昭聖王, 재위 799-800)의 비(妃) 계화왕후(桂花王后)가 왕이 먼저 죽은 것을 슬퍼하여 6의(六衣)의 성대한 복장을 희사하고 9부(九府)에 쌓아두었던 재물을 모두 내어 이름난 장인을 불러 아미타상(彌陀) 한구를 만들고 아울러 여러 신중(神衆)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부연되어 있다. 또한 이보다 앞서 절에 한 노승이 있었는데 홀연히 꿈에 부처(眞人)가 설법하는 것을 보고 이곳은 반드시 불법이 머무르는 곳이라 생각했지만 남에게 알리지 않았다. 장인들은 그곳이 좋지 못한 곳이라 하여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땅을 개간함에 미치어서 평탄한 곳을 얻으니 집을 세울만하고 완연히 신령스러운 터와 다름이 없어 모두 놀라면서 좋다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시대 이미 미타전은 사라졌으며 무장사만 남아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무장사와 관련된 기록은 다른 사료에서도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慶州) 불우조(佛宇條)에서는 “무장사(鍪藏寺)는 부(府)의 동북쪽 30리, 암곡촌(暗谷村)의 북쪽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太祖, 재위 918-943)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 무기와 투구를 골짜기 속에 감추었으므로 무장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옛 비석이 있다.” 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영조(英祖, 재위 1725-1776)때의 문신인 홍양호(洪良浩, 1724-1782)가 지은 『이계집(耳溪集)』 권16 제무장사비(題鍪藏寺碑)조에서 그가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있을 때 일을 기록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때 무장사에 김생(金生, 711-?)이 글을 쓴 비가 있었는데 지금은 소재를 알지 못한다. 사람을 보내 비가 있던 곳을 살펴보게 했는데, 산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 작은 난야(蘭若, 사찰)를 찾아냈다. 승려의 말로는 무장사의 옛터인데 고전(古傳)에 의하면 신라여주(新羅女主)가 병기를 이곳에 감추었다고 하나 비는 보이지 않은지가 오래 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무장사에 대해 무장사는 원성왕의 아버지인 효양이 파진찬의 관등을 가진 숙부를 위해 세운 것으로 이후 원성왕 가문의 원찰이었던 것으로 본 견해가 있다.(곽승훈, 1994) 또한 무장사의 위치가 험준한 곳에 있는 것에 주목하여 다른 귀족들의 간섭을 물리치기 위함과, 유사시에 군사상에 있어 천연의 요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보며, 무장사란 이름의 유래를 통해 원성왕 가문이 어느 정도의 군력을 소유했던 것으로 본 견해가 있다.(곽승훈, 1995)

한편 무장사의 이름 유래에 대해 전하는 세 기록은 병기를 감춘 주체를 태종, 고려 태조, 신라여주로 각각 다르게 전하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이에 대해 『이계집(耳溪集)』의 기록은 무장사가 세워진지 거의 1000년이 뒤에 민간에서 전해지던 이야기이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인 800년경에 세워진 무장사비에 이미 무장사라는 절 이름이 등장하므로 900년대의 고려 태조라 기록한 것은 시대가 맞지 않기에 신뢰하기 어렵다고 본 견해가 있다. 다만 이 견해도 『삼국유사』의 기록을 가장 신뢰하되, 삼국을 통일한 것은 태종 무열왕이 아니라 문무왕이므로 『삼국유사』기록에서 전하는 태종은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의 오기로 보았다.(이종문, 2005)

『삼국유사』 권3 탑상4 무장사미타전조의 내용을 통해 무장사는 『삼국유사』를 찬술할 당시까지 절은 남아 있었으나 아미타를 모신 옛 불전은 허물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무장사가 언제 폐허가 되었는지는 전하는 기록은 없지만, 위 『이계집』의 기록을 보면 홍양호가 영조 36년(1760) 경주부윤으로 있을 당시 이미 폐사(廢寺)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장사지는 현재 경주시 암곡동 무장산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보물 제125호인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이수및귀부(鍪藏寺阿彌陀佛造像事蹟碑螭首및龜趺)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 불우조에서 옛 비석이 있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찬술할 당시에는 무장사의 비가 남아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완전한 비는 전하고 있지 않고 비편들만 전하고 있다. 비편은 조선 영조 38년(1760)에 홍양호가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에 경주 내동명 암곡리에서 한 부분을 발견하였다고 하는데 다시 그 소재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 후기 문신인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17년(1817)에 경주를 방문하여 이 일대를 수색한 끝에 무장사와 관련된 깨진 비편 두개를 찾아냈다. 이 때 발견된 두개의 비편은 청(淸)나라 사람 유승간(劉承幹)이 편찬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부록에 처음 소개되었다. 그 후 1914년에 자료 조사 과정 중 무장사지(鍪藏寺址) 부근에서 귀부(龜趺), 이수(螭首) 및 『해동금석원』에 소개되지 않았던 다른 비편 한 부분이 다시 발견되어 소개되었다.(葛城末治, 1935) 이렇게 발견된 비편의 내용을 통해, 이들 비편이 있던 곳을 『삼국유사』 권3 탑상4 무장사미타전조에 등장하는 무장사의 터로 추정한 근거가 되었다.

한편 김정희가 찾은 비편에 남긴 기록을 근거로 김정희가 비편 두 부분을 다시 찾은 것이 아니라 한 부분은 그대로 전하고 있고 다른 한 부분만 새롭게 찾은 것으로 본 견해도 있다.(이종문, 2005)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의 비문을 쓴 사람에 대해서 홍양호의 『이계집』 권16 제무장사비(題鍪藏寺碑)조에서는 세간에서는 비문을 신라 때 서예가인 김생(金生, 711-?)이 지은 것으로 전하고 있었는데, 홍양호가 탁본을 본 뒤 비문은 애장왕(哀莊王, 재위 800-809)대의 신라 한림(翰林) 김육진(金陸珍)의 글씨이며, 전하는 사람들이 그 성만 보고 김생으로 잘 못 일컬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같은 책 권16 제김각간묘비(題金角干墓碑)조에서 무장사비의 글씨를 왕희지(王羲之, 303-361)풍으로 파악하고 있다.

김정희의 완당전집(阮堂全集)』 제4권 서독(書牘) 여김동리경연(與金東籬敬淵)에서는 “무장비(imagefont藏碑)는 과연 홍복비(弘福碑)의 자체(字體)입니다. 인각비(麟角碑)와 같이 집자(集字)한 것은 아니며 김육진(金陸珍)은 바로 신라 말엽의 사람인데, 비의 연대는 지금 상고할 수 없으며 정예(鄭隸)는 끝내 구득 못한다니 이상한 일입니다. 나더러 보서(補書)하라는 것은 불감(不敢)하여 사양하겠습니다.” 라고 기록하였다. 이를 보면 김정희는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는 집자비가 아니며 비문은 김육진이 쓴 것으로 파악하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집자(集子)는 명필들의 다양한 문장에서 필요한 글씨를 찾아 모아서 이를 조화롭게 연결하는 작업을 말한다.

이에 대해 비문의 찬자는 김육진이지만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는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집자비이기 때문에 김육진은 문장만 짓기만 하고 새기지는 않은 것으로 본 견해가 있다.(葛城末治, 1935) 같은 예로 비슷한 시기인 헌덕왕(憲德王, 재위 809-826)대 문장가인 김입지(金立之 ?-?)가 문장을 짓고 건립된 「창림사무구정탑원기(昌林寺無垢淨塔願記)」나 「성주사비(聖住寺碑)」등이 있다.(한국고대사회연구소, 1992)

무장사 비문 내용 중에 사서삼경 중 하나인 시경(詩經)의 싯귀들이 간혹 보이는 점 때문에 일반적으로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는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집자비로 보고 있다. 그러나 홍양호와 김정희는 김육진이 쓴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 비면이 훼손되어 탁본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상하간의 형태 및 필획(筆劃)의 흐름이 자연스러운 점과 주위의 글씨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은 집자한 성교서, 흥복사비와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를 집자비로 보기 어려우며 전하는 기록대로 김육진이 쓴 것으로 본 견해도 있다.(이종문, 2005)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의 이수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여섯 글자를 2행으로 새겼는데, 이수 왼쪽 면에는 김정희의 조사기가 별도로 기록되어 있다. 이수 일부분은 부러져 있고, 쌍귀부도 부러져 없어졌다. 비좌 네 면에 십이지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귀부에 십이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은 특이한 예에 속한다. 잘린 이수에는 반룡(蟠龍)이 운기문(雲氣文) 속에서 앞발로 여의주를 잡고 있어서 통일신라 초기에 조성된 신라태종무열왕릉비(新羅太宗武烈王陵碑) 이후 이수가 남아 있는 예가 없는 통일신라기 이수의 변천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이 귀부의 제작연대는 애장왕 2년(801)인 9세고 초로 본 견해가 있다.(이호관, 1982) 2008년에 비신 복원을 위한 현지 조사과정에서 근처 계곡에서 부러져 없어졌던 쌍귀부 가운데 왼쪽 귀부를 발견했다. 현재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이수 및 귀부는 무장사지에 있으며, 2010년에 비와 귀부를 보수할 계획에 있다고 한다. 비편 3점은 국립중앙박물관 유물 보존실에 있다.

이 무장사 쌍신두 귀부에 대해 비좌 면석부에 양각된 십이지상 이수부의 운룡문(雲龍文)조각 수법, 귀갑문의 표현수법 등에 주목하여, 무장사지 쌍신두 귀부는 통일신라 초기에 조성된 신라태종무열왕릉비나 당나라 이수부의 영양을 받아 9세기 후반경 탑비가 성행하기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본 견해가 있다.(엄기표, 2003)

이밖에 숲에 방치되었던 폐탑을 1962년에 복원한 보물 제126호인 무장사지삼층석탑이 있다. 이 탑은 2층기단 위에 3층탑신을 건립한 전형적인 통일신라석탑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지만 상층기단에 안상(眼象)을 조각한 점이 특이하다. 이 탑의 중앙에서 변 27.5cm, 깊이 23cm의 방형 사리공(舍利孔)이 확인되었다.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으나 1962년 석탑 복원 당시 하층기단 갑석, 상층기단 중석 등의 일부와 함께 노반(露盤) 및 복발(覆鉢)을 새로 만들어 보충하였다.(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편, 1977)

이 무장사지 삼층석탑의 조성시기에 대해 석탑은 본래 가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사찰의 창건과 동시에 건립되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귀부가 세워진 전후시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탑의 기단부의 상대갑석과 하대갑석의 치석 수법, 상층기단 호각형(弧角形) 2단의 괴임 수법, 탑신석의 우주와 옥개석의 정연한 치석수법은 8세기에서 9세기 초반에 건립된 석탑들과 강한 친연성을 보이는 것으로 보고 무장사지 삼층석탑은 8세기 후반경이나 늦어도 9세기 초반에는 건립되었다고 본 견해가 있다.(엄기표, 2003)

참고문헌

葛城末治, 1935, 「鍪藏寺阿彌陀如來造像碑」『朝鮮金石攷』, 大阪屋號書店.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편, 1969, 『文化財大觀』寶物篇 中,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편, 1977, 『文化遺蹟總覽』中,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이호관, 1982, 「統一新羅의 龜趺와 螭首」『考古美術』, 한국미술학회.
한국고대사회연구소, 1992, 「鍪藏寺 阿彌陀如來 造像碑」『韓國古代金石文』3,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곽승훈, 1994, 「新羅 中代 末期 中央貴族들의 佛事活動」『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上) -古代篇·高麗時代篇-』, 일조각.
곽승훈, 1995, 「新羅 元聖王의 政法典 整備와 그 意義」『震壇學報』80, 진단학회.
엄기표, 2003, 「新羅 雙身頭 龜趺에 대한 考察」『文化史學』19, 한국문화사학회.
이종문, 2005, 「무장사비를 쓴 서예가에 관한 한 고찰」『한문고전의 실증적 탐색』, 계명대학교출판부.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무장사미타전)
鍪藏寺彌陀殿
京城之東北二十許里 暗谷村之<北> 有鍪藏寺 第三十八元聖大王之考大阿干孝讓追封明德大王之爲叔父波珍<飡>追崇所創也 幽谷逈絶類似削成 所寄冥奧自生虛白 乃息心樂道之靈境也 寺之上方 有彌陁古殿 乃昭成[一作聖]大王之妃桂花王后 爲大王先逝 中宮乃充充焉 皇皇焉 哀戚之至泣血棘心 思所以幽贊明休 光啓玄福者 聞西方有大聖曰彌陁 至誠歸仰 則善救來迎 是眞語者 豈欺我哉 乃捨六衣之盛服 罄九府之貯財 召彼名匠 敎造彌陀像一軀 幷造神衆以安之 先是寺有一老僧 忽夢眞人坐於石塔東南岡上 向西爲大衆說法 意謂 此地必佛法所住也 心秘之而不向人說 嵓石巉崒 流澗激迅 匠者不顧 咸謂不臧 及乎辟地 乃得平坦之地 可容堂宇 宛似神基 見者莫不愕然稱善 近古來 殿則壞圮 而寺獨在 諺傳 太宗統三已後 藏兵鍪於谷中 因名之

무장사 미타전
서울(京城, 경주)에서 동북쪽으로 20리쯤 떨어진 암곡촌의 북쪽에 무장사가 있다. 제38대 원성대왕의 돌아가신 아버지인 대아간 효양, 추봉(追封)된 명덕대왕이 숙부인 파진찬을 추모하여 받들기 위해 창건한 것이다. 깊은 골짜기는 너무도 기이하여 깎아서 세운 듯하며, 그 곳은 어둡고 그윽하여 저절로 허백(虛白)이 생기니 마음을 쉬고 도를 즐길 만한 신령스런 곳이다. 절의 위쪽에 아미타를 모신 옛 불전이 있다. 곧 소성(昭成)[또는 聖이라 한다.]대왕의 비 계화왕후가 대왕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이에 왕후는 근심하여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그것을 슬퍼함이 지극하였다. 피눈물을 흘리고 마음이 상하여 밝은 덕을 조용히 기리고 명복을 빌 일을 생각하였다. (이 때에) 서방에 아미타(彌陀)라고 부르는 대성이 있어 지극 정성으로 귀의하면 잘 구원하여 와서 맞아준다는 말을 듣고 “이 말이 진실이라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라 하고, 육의(六衣)의 성대한 복장을 희사하고 9부(九府)에 쌓아두었던 재물을 모두 내어 이름난 장인을 불러 아미타상(彌陀) 한 구를 만들게 하고 아울러 여러 신중(神衆)을 만들어 모셨다. 이보다 앞서 이 절에는 노승이 한분이 있었다. 홀연히 꿈에 진인(眞人)이 석탑의 동남쪽 언덕위에 앉아 서쪽을 향해 대중을 위하여 설법을 하니 마음속으로 이르길 “이곳은 반드시 불법이 머무를 곳이다”라고 했으나 그것을 속으로만 생각하고 남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곳은 바위가 험준하고 계곡 물이 세차고 빠르게 흐르는 곳이므로, 장인들은 눈여겨보지 않았으며 다들 좋지 못한 곳이라고 했다. 땅을 개간함에 이르자 평탄한 곳을 얻으니 집을 세울 만하고 완연히 신령스런 터여서, 보는 사람마다 놀라며 좋다고 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근래에 와서 미타전은 허물어졌고 절만 남아 있다. 세간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태종(太宗武烈王)이 삼국을 통일한 후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안에 감추어서, 그 때문에 (무장사라고) 이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