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축사

영축사

분류 문학 > 건축 >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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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신라시대에 영축산에 있었던 사찰
사적명 : 영축사지
지정번호 :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 24호
위치: 울산 울주군 청량면 율리 822-1

일반정보

영축사(靈鷲寺)는 신라시대 사찰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영축사(靈鷲寺)조에서 영축사(靈鷲寺)에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영축사지는 현재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 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문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4 영축사(靈鷲寺)조에 영축사가 창건된 배경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 제 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 영순(永淳) 2년(683) 계미에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장산국(萇山國) 온천에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 굴정역(屈井驛) 동지(桐旨)들판에서 머무르며 쉬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나 매를 놓아 꿩을 좇게 했는데, 그 꿩이 날아서 금악(金岳)을 지나갔다. 어두워서 종적을 찾을 수 없었지만, 방울소리를 듣고 그것을 찾아 굴정현(屈井縣) 관아 북쪽 우물가에 이르렀다. 매는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우물 안에 있었는데, 우물 안의 물이 핏빛으로 흐려졌다. 꿩이 새끼 두 마리를 안고 있으니 매도 그것을 측은히 여기는지 함부로 움켜쥐지 않았다. 공이 그것을 보고 측은함을 느껴 이곳에 대해서 점을 쳐서 물었더니, 절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공이 서울로 돌아와 왕에게 아뢰어, 그 현의 관청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땅에 절을 지으니 이에 영축사(靈鷲寺)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영축사(靈鷲寺)는 현재 영축사지로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축산(靈鷲山)은 본래 인도에 있는 산으로 부처가 설법한 장소인데 영축사의 이름도 여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부처와 관련된 지명이기 때무인지 『삼국유사』의 다른 조목에서도 영축은 등장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감통(感通)7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조에서는 고려 시대에 굴불지의 용이 황제의 꿈에 나타나 영축산에 약사도량(藥師道場)을 개설하여 바닷길을 편안하게 해 줄 것을 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피은(避隱)8 낭지승운보현수(朗智乘雲普賢樹)조에서 삽량주(揷良州) 아곡현(阿曲縣)의 영축산에 이상한 스님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한 세주에서 삽량(揷良)은 고려시대의 양주(梁州)이며, 아곡(阿曲)의 곡은 어떤 곳에는 서(西)라고 되어 있는데, 아곡 자체는 구불 혹은 굴불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려 시대에 울주에 굴불역을 두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피은(避隱)8 연회도명문수점(緣會逃名文殊岾)조에서는 영축사의 위치비정과 그 외에 다른 기록을 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고승 연희는 일찍이 영축산에 숨어 살면서 언제나 법화경을 읽고 보현관행을 닦았는데, 뜰의 연못에는 항상 연꽃 몇 떨기가 있어 사철 시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 본문의 세주에 영축산은 지금의 영축사라고 하였다. 곧 영축사가 영축산에 있던 사찰이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상의 기록을 정리해보면, 삽량주 아곡현에 영축산이 있으며, 이 영축산에 영축사가 세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곡현은 혹은 굴불이라고 하였는데 이 굴불은 울산의 옛 지명이다. 따라서 영축사는 현재 울산 지역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현재 울산 문수산 동쪽에 영축산이 있다. 한편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조에 등장하는 굴불지의 용은 울산지역에서 해외무역에 종사하고 있는 지방호족 정도로 이해한 견해가 있다.(울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2) 이외에도 울산의 신라시대 이름인 굴아화와 굴불이 음운상 서로 통한다는 점과 충원공이 동래에서 경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울산을 경유했을 것으로 보아, 영축사의 소재지를 울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서영대, 2001) 따라서 일반적으로 영축사의 소재지는 현재 울산시 울주군 율리의 영축사지로 비정한다.

그러나 영축사의 소재지를 울산 이외의 지역으로 잡는 견해도 있다. 먼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3 경상도 장기현 불우조에 영축사는 묘봉산에 있다는 기록을 토대로 하여 영축사의 소재지를 장기로 본 견해가 있다.(이병도, 1956) 한편 『삼국유사』 영축사조에 기록된 것처럼 굴정현을 장산국의 근처에 있다고 보고, 굴정현 근처에 세워진 영축사가 장산국, 곧 동래 근처에 있다고 보는 견해도 제기된다.(권상로, 1979)

울산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로 비정된 영축사지에는 영축사지 석탑이 남아있어, 영축사의 흔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현재 영축사지에는 2기의 삼층석탑이 동편과 서편에 무너진 상태로 남아 있다. 동탑 근처에는 귀부 1기가 놓여 있으며, 동탑 석재더미에는 2층 탑신석에 해당하는 탑재가 보이지 않는다. 서탑은 무너진 이후 현재의 무덤이 설치되면서 서편으로 옮겨진 상태다. 동서 양 탑의 남은 탑재의 크기로 추정해 볼 때, 영축사지 쌍탑은 감은사지 쌍탑에 비해 규모는 작으나 균형미나 정제미가 뛰어나다고 한다.(전호태, 2001)

참고문헌

이병도, 1956, 『譯註三國遺事』, 동국문화사.
권상로, 1979, 『韓國寺刹全書』下, 동국대출판부.
서영대, 2001, 「울산지역의 사찰설화」『울산연구』3, 울산대학교 박물관.
전호태, 2001, 「울산지역 신라 불교유적의 현황과 과제」『울산연구』3, 울산대학교 박물관.
울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편, 2002, 『蔚山廣域市史』, 울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영축사)
靈鷲寺
寺中古記云 新羅眞骨第三十一主神文王代 永淳二年癸未[本文云元年誤] 宰相忠元公 萇山國[卽東萊縣 亦名萊山國]溫井沐浴 還城次 到屈井驛桐旨野駐歇 忽見一人放鷹而逐雉 雉飛過金岳 杳無蹤迹 聞鈴尋之 到屈井縣官北井<邊> 鷹坐樹上 雉在井中 水渾血色 雉開兩<翅> 抱二雛焉 鷹亦如相惻隱 而不敢攫也 公見之惻然有感 卜問此地 云可立寺 歸京啓於王 移其縣於他所 創寺於其地 名靈鷲寺焉

영축사
절의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신라 진골 제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대 영순(永淳) 2년 계미(683)에[본문에 원년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장산국(萇山國)[곧 동래현(東萊縣)이니 또는 내산국(萊山國)이라 이른다.] 온천에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 굴정역(屈井驛) 동지(桐旨)들판에 머무르며 쉬었다.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나 매를 놓아 꿩을 쫓게 했는데, 꿩은 날아서 금악(金岳)을 지나갔다. 어두워서 종적을 찾을 수 없었는데 방울소리를 듣고 그것을 찾아 굴정현(屈井縣) 관아 북쪽 우물가에 이르렀다. 매는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우물 안에 있었는데 물이 핏빛으로 흐려졌다. 꿩이 두 날개를 열어 새끼 두 마리를 안고 있으니 매도 또한 그것을 측은히 여기는지 함부로 움켜쥐지 않았다. 공(公)이 그것을 보고 측은한 느낌이 있어 이곳에 대하여 점을 쳐서 물었더니, ‘절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서울로 돌아와 왕에게 아뢰어, 그 현의 관청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땅에 절을 지으니 이에 영축사(靈鷲寺)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