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구형왕릉

전구형왕릉

분류 문학 > 건축 > 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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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가락국(금관가야) 제10대 구형왕(仇衡王)의 능으로 전해지는 무덤

지정명: 전 구형왕릉(傳 仇衡王陵)
지정번호: 사적
소재지: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

일반정보

가락국(금관가야) 제10대 구형왕(仇衡王)의 능으로 전해지는 무덤은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의 왕산(王山)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경사진 언덕에 자연석을 쌓아 만든 7단의 석축 형태이며, 전체 높이는 11.15m이다. 정상부는 타원형이고 석축의 앞면 네 번째 단 중간에는 감실(龕室)이 설치되어 있으며, 무덤의 주변을 높이 1m 정도의 돌담이 둘러싸고 있다. 무덤 앞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고 쓰여진 비석과 석물들이 있다.

전문정보

전 구형왕릉은 가락국(금관가야) 제10대 구형왕의 능으로 전하는 무덤으로 경남 산청군 근서면 화계리에 위치하고 있다. 전체 높이는 11.15m로, 일반 분묘(墳墓)와는 달리 자연석으로 축조된 석축의 형태인 점이 특징이다. 앞면은 7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양 측면은 경사면을 따라 올라가며 조성했기 때문에 층단이 단계적으로 감소한다. 뒷면은 산의 비탈면을 그대로 이용하여 층단이 없으며 정상부는 타원형이다. 석축의 앞면 네 번째 단 중간에 가로 42cm, 세로 47cm, 깊이 65cm 정도의 방형 감실(龕室)이 설치되어 있다. 무덤 앞 중앙에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최근에 세운 석물들이 있으며, 무덤의 주변을 높이 1m 정도의 돌담이 둘러싸고 있다. 입구에는 홍살문과 중문(重門)이 있고, 능 아래쪽에 구형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덕양전(德讓殿)이 있다.

구형왕은 신라 법흥왕 19년(532) 신라에 투항하였는데, 그 후의 행적이나 죽은 시기, 왕릉에 관해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전하는 바가 없다. 전 구형왕릉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1 산음현(山陰縣) 산천조의 “왕산(王山)[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산 속에 돌을 쌓아 언덕을 만들었는데, 4면에 모두 층계가 있다. 세속에 왕릉으로 전한다](王山[在縣西十里 山中累石爲丘 四面皆有層級 俗傳王陵云])”는 내용으로, 여기서는 이 석축이 누구의 왕릉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를 통해 왕릉설이 적어도 조선 전기 이전부터 세속에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아마도 석축은 그 영이(靈異)함 때문에 일찍부터 현지인들의 외경 및 숭앙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이도학, 1990)

그 후 이 석축은 왕릉, 고릉(古陵), 신라왕릉 등으로 전승되다가, 1798년 고을의 유생 민경원(閔景元)에 의해 구형왕릉으로 확인되었다. 그 전말은 조선 정조(正祖), 순조(純祖) 연간에 흥해군수․부사를 역임한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이 지은 『심왕산릉기(尋王山陵記)』와 경기도 암행어사․북평사 등을 역임한 홍의영(洪儀永, 1750~1815)이 지은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 자세히 전한다. 이에 따르면, 민경원은 1798년 영남지방에 큰 가뭄이 들어 6월 4일 왕릉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갑자기 큰 비가 내리자 비를 피해 근처의 왕산사(王山寺)로 들어갔다. 이 때 왕산사의 승려가 100여년 전 승려 탄영(坦瑛)이 지은 『산사기(山寺記)』 한 권을 보여주었는데, 거기에 가락국 제10대 구형왕이 땅 때문에 백성이 다치는 것을 참지 못하여 신라에 나라를 양보하고 식읍(食邑)을 받았으나, 후에 이곳으로 와서 살다 죽었고 이에 왕산에 장사지내고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한 김유신이 옛날 구형왕이 살던 수정궁(水晶宮)에 왕산사를 짓고 명복을 빌었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김해 김씨 문중에서는 묘역을 손질하고 사당을 세워 이 석축을 구형왕릉으로 확정하고자 하였고, 그 과정에서 왕산의 묘역 소유권과 관리권을 둘러싸고 몇 차례 송사(訟事)가 이어졌다. 이 송사에서는 김해 김씨가 모두 이겼고 구형왕릉의 존재가 지방과 중앙의 관청에 널리 알려졌으므로, 19세기 중엽에는 이 석축이 구형왕릉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조선 고종 원년(1864) 경에 편찬된 것으로 여겨지는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 권9 산청현(山淸縣) 산수(山水) 왕산조에는 “왕산[서북 20리에 있다. 가야국 구형왕릉이 왕산사 뒤에 있다. 돌을 쌓아 언덕을 만들었고 4면에 층급이 있다. 절은 곧 구형왕이 살던 수정궁이다(王山[西北二十里 加耶國仇衡王陵 王山寺後 累石爲邱 四面皆有層級 寺卽仇衡王所居水晶宮])"라고 하여 이 석축을 구형왕릉으로 확정하고 있다.

한편 능 앞에 서 있는 비석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양왕은 구형왕의 시호(諡號)라 할 수 있다. 구형왕에게 양왕이라는 시호를 붙인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고종 21년(1884) 허전(許傳)이 찬술한 「가락국태조릉숭선전비문(駕洛國太祖陵崇善殿碑文)」에서 이미 그를 양왕이라 칭하고 있다. 양왕이라는 호칭은 구형왕이 왕위를 양보하고 또 죄없는 백성들을 죽게 할 수 없어 나라를 신라에 양도했다는 전승에 근거하여 붙여진 것이다.(권덕영, 2007)

구형왕이 과연 실제로 산청에서 은거하면서 일생을 마치고 이곳에 묻혔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구형왕이 신라에 투항한 후 그 후손들은 신라왕실의 외척으로 성장하며 현달하였으며, 구형왕이 산청에서 은신하다 죽었다 하더라도 많은 인력이 동원되는 방단형 석축 형태의 능을 남길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전 구형왕릉과 흡사한 유적이 경북 의성군 안평면 석탑리와 안동시 북후면 석탑리, 그리고 일본의 강산현(岡山縣) 적반군(赤磐郡) 웅산정(熊山町)에도 존재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들 석축은 자연석으로 방형 기단을 쌓고 3~5층의 석축을 쌓았으며, 의성과 일본의 석축에는 중간에 감실이 만들어져 있고, 근처에 사찰이 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석축들을 불상을 안치한 특수한 형태의 석탑으로 보기도 한다.(진홍섭, 1971)

따라서 이 석축을 불탑으로 보는 견해에 동의하면서, 8세기 후반 몰락해가던 금관가야계 귀족들이 9세기경에 왕산사를 창건하여 구형왕 관련 유품을 함께 보관하였고, 이후 그와 걸맞는 구형왕의 전승이 덧붙여졌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왕산사 창건 당시 구형왕을 추념(追念)하기 위한 방단형 적석탑도 함께 조형되었는데 이것이 그 후 구형왕릉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것이다.(이도학, 1990)

참고문헌

진홍섭, 1971, 「所謂 方壇式特殊形式의 石塔 數例」 『考古美術』110.
이도학, 1990, 「山淸의 傳 仇衡王陵에 관한 一考察-王陵說에 관한 文獻的 檢討」 『鄕土文化』5, 향토문화연구회.
권덕영, 2007, 「금관가야 ‘仇衡王陵’ 전승과 역사화 과정」 『大丘史學』86.

관련원문 및 해석

第十 仇衝王 [鉗知子 母□女 辛丑立 理十二年 中大通四年壬子 納土<投>羅 自首露王壬寅 至壬子 合四百九十年] 國除
제10 구충왕 [겸지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녀이다. 신축년에 즉위하여 12년간 다스렸다.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에 땅을 바쳐 신라에 투항하였다. 수로왕 임인년부터 임자년까지 합하여 490년이다.] 나라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