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률사

백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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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경상북도 경주시 소금강산에 위치한 신라시대 사찰.

일반정보

백률사(栢栗寺)는 경주시 소금강산에 위치한 사찰로, 신라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하여 잘린 목이 떨어진 곳에 세운 “자추사(刺楸寺)”였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전문정보

백률사(栢栗寺)는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 赫居世王)조에 신라6촌 중 하나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의 금강산(金剛山)에 위치한 절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小金剛山)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법흥왕 15년(528)조에 불교를 받들 것을 법흥왕에게 청했으나 거절당한 이차돈이 자신이 죽으면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유언을 하였는데, 이차돈의 목을 베자 잘라진 곳에서 용솟음치는 피가 젖과 같이 희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 권3 흥법3 원종흥법염촉멸신조에 보면 이차돈의 목이 베어진 순간 하늘은 사방이 침침해지고 땅이 진동하면서 꽃비가 내렸으며,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가 북산의 서쪽 고개에 떨어져 거기에서 장사를 지내고 그 곳에 세운 절을 “자추사(刺楸寺)”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전해진다.(권오찬, 2001)

1914년 백률사에서는 「이차돈순교비(異次頓殉敎碑)」가 발견되어 이 곳을 자추사였다고 보고 있다. 「이차돈순교비(異次頓殉敎碑)」는 6면(六面)으로 이루어진 석당(石幢)으로, 1면에는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법흥왕 15년(528)조의 설화와 같이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는 흰 피가 솟아 오르는 장면인 이차돈의 순교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비석의 5면에는 정간(井間)을 치고 글씨를 새겼는데 마멸이 심하여 글자의 판독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마멸이 심하지 않을 때 글자를 목판에 새겨 인쇄한 법첩(法帖) 2종류를 통하여 불교를 널리 전파하려는 법흥왕(法興王)의 의도, 이차돈과 법흥왕(法興王)의 대화, 불교의 공인을 둘러싼 신하들의 토론, 그리고 이차돈의 죽음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이차돈의 순교 관련 기록과 크게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언제부터 “백률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자추(刺楸)”는 음차(音借)로 쓰인 이두문자이며 “자(刺)”는 “자”를, “추(楸)”는 “ㅊ”을 음차한 것으로 결국 “잧”, 곧 자추사는 “잧절”이라는 뜻이 된다고 보기도 한다. 따라서 이는 한화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던 경덕왕(景德王, 742-765)대에 본래 자추사에서 栢(잣나무백), 栗(밤나무율)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정부미, 2004)

『삼국유사』 권3 탑상4 백률사조에는 이 절의 대비관음상(大悲觀音像)이 중국의 공장(工匠)이 만든 것이라는 고전(古傳)이 있었으며, 또 이 관음상에 얽힌 영험이 효소왕 2년(693)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효소왕 원년(692)에 국선(國仙)이 된 부례랑(夫禮郎)은 효소왕 2년(693) 3월에 화랑의 무리를 거느리고 북명(北溟)의 지경(地境)에 이르렀다가 오랑캐에게 잡혀갔다. 문객(門客)들은 당황하여 되돌아갔으나 안상(安常)만이 그를 뒤쫓아갔다. 효소왕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였는데, 그 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天尊庫)를 덮었으므로 내고(內庫)를 조사시켰더니 현금(玄琴)과 신적(神笛)의 두 보물이 없어졌다. 부례랑의 부모는 이 관음상 앞에서 여러 날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향탁(香卓) 위에 현금과 신적이 있고, 부례랑과 안상(安常) 두 사람도 불상 뒤에 와 있었다. 부모가 놀라 그 내력을 물으니, 부례랑이 적에게 잡혀가서 말 먹이는 자가 되어 방목(放牧)을 하고 있는데 용모가 단정한 승려가 손에 현금과 신적을 가지고 와서 따라오라고 하였다. 해변에 이르러 안상과 만나게 되는데, 승려는 신적을 둘로 쪼개어 부례랑과 안상이 하나씩 타게 하고 자기는 현금을 타고 하늘을 날아서 잠깐 사이에 백률사에 왔다. 부례랑이 현금과 신적을 왕에게 바치고 이 사실을 아뢰니, 왕은 이 절에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과 마납가사(摩衲袈娑)를 바쳐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하였다.

이러한 영험들과 함께 이 절은 상당히 번창한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폐허가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 불우조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끝난 뒤 경주의 부윤(府尹) 윤승순(尹承順)이 중수한 기록이 있는데, 이러한 이적(異蹟)을 남긴 관음상은 그 때 이미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황수영, 1985)

원래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던 국보 제28호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과 이차돈순교비(異次頓殉敎碑)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소금강산 정상에서 북쪽 30m 아래 지점에는 마애삼존좌상(磨崖三尊坐像)이 있는데, 아미타불(阿彌陀佛) 좌우에 협시보살(脇侍菩薩)이 조각되어 있다. 이 밖에도 초석(礎石)과 석등(石燈)의 옥개석(屋蓋石) 등이 있고, 1972년에는 대웅전 동편 암벽에서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음각(陰刻)된 칠층탑 부조가 발견되었다.(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6)

『삼국유사』 권3 흥법3 사불산굴불산만불산조에서는 경덕왕이 백률사에 행차하여 산 아래에 이르렀을 때,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서, 사람을 시켜 땅을 파보니 큰 돌의 사면에 사방불이 새겨 있었으므로 그 곳에 절을 짓고 굴불사(掘佛寺)라고 이름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져온다. 현재 백률사 아래에 보물 제121호 굴불사지석불상(掘佛寺址石佛像)이 남아있다.

참고문헌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6, 『文化遺蹟總覽』.
황수영, 1976, 『韓國金石遺文』, 일지사.
권오찬, 2001, 『신라의 빛』, 글밭.
정부미, 2004, 「栢栗寺 金銅如來立像 硏究」, 홍익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
新羅始祖 赫居世王
辰韓之地 古有六村 一曰 閼川楊山村 南今曇嚴寺 長曰謁平 初降于瓢嵒峰 是爲及梁部李氏祖[弩禮王九年置 名及梁部 本朝太祖天福五年庚子 改名中興部 波替東山彼上東村屬焉] 二曰 突山高墟村 長曰蘇伐都利 初降于兄山 是爲沙梁部[梁讀云道 或作涿 亦音道]鄭氏祖 今曰南山部 仇良伐麻等烏道北廻德等 南村屬焉[稱今曰者 太祖所致也 下例<如>] 三曰 茂山大樹村 長曰俱[一作仇]禮馬 初降于伊山[一作皆比山] 是爲漸梁[一作涿]部 又牟梁部孫氏之祖 今云長福部 朴谷村等 西村屬焉 四曰 觜山珍支村[一作賓之 又賓子 又<氷>之] 長曰智伯虎,初降于花山 是爲本彼部崔氏祖 今曰通仙部 柴巴等 東南村屬焉 致遠乃本彼部人也 今皇龍寺南味呑寺南 有古墟云是崔侯古宅也 殆明矣 五曰 金山加利村[今金剛山栢栗寺之北山也] 長曰祗沱[一作只他] 初降于明活山 是爲漢歧部又作韓歧部裵氏祖 今云加德部 上下西知乃兒等 東村屬焉 六曰 明<活>山高耶村 長曰虎珍 初降于金剛山 是爲習比部薛氏祖 今臨川部勿伊村仍仇旀村閼谷[一作葛谷]等 東北村屬焉 按上文 此六部之祖 似皆從天而降 弩禮王九年 始改六部名 又賜六姓 <今>俗中興部爲母 長福部爲父 臨川部爲子 加德部爲女 其實未詳 …
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 赫居世王)
진한의 땅에는 옛날에 6촌(六村)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인데,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은 알평(謁平)이다. 처음에 표암봉(瓢嵓峰)으로 내려오니,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弩禮王) 9년(32)에 두어져, 급량부(及梁部)라고 하였는데, 본조(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 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속한다.]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인데,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으로 내려오니, 사량부(沙梁部)[량(梁)은 도(道)라고 읽는다. 혹은 탁(涿)이라고 쓰는데, 역시 도(道)라고 읽는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고 하는데, 구량벌(仇良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때 설치한 것이다. 아래의 예도 이와 같다.] 셋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인데, (촌)장은 구례마(俱禮馬)이다.[구(仇)라고도 쓴다.] 처음에 이산(伊山)으로 내려오니[계비산(皆比山)이라도 한다.], 점량(漸梁)[탁(涿)이라도 한다.]부(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는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 넷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빈지(賓之) 또는 빈자(賓子) 또는 빙지(氷之)라도 쓴다.]인데, (촌)장은 지백호(智伯虎)이다. 처음에 화산(花山)으로 내려오니,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하는데,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致遠)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 황룡사(皇龍寺) 남쪽에 있는 미탄사(味呑寺)남쪽에 옛 터가 있는데, 이것이 최후(崔侯, 최치원)의 옛 집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다섯째 금산(金山) 가리촌(加里村)「지금 금강산(金剛山) 백률사(栢栗寺)의 북쪽 산이다.]인데, (촌)장은 기타(祗沱)[지타(只他)라도 한다.]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으로 내려오니,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하서지(下西知)․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인데,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처음에 금상산(金剛山)으로 내려오니,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임천부(臨川部)인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旀村)․궐곡(闕谷)[갈곡(葛谷)이라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이 육부(六部)의 조상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9년(32)에 비로소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한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는 중흥부를 어머니, 장복부를 아버지, 임천부를 아들, 가덕부를 딸이라고 하는데, 실상은 상세하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