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

대덕

분류 문학 > 종교 > 불교

기본정보

신라의 승직(僧職) 중 하나

일반정보

대덕(大德)은 신라 및 고려․조선의 승직(僧職)으로, 본래는 지혜와 덕망이 높은 승려에 대한 호칭이었다. 신라에서는 50세 이상의 승려로 7년의 임기를 정해 왕이 직접 임명하였다고 한다.

전문정보

대덕(大德)은 신라의 승직(僧職) 중 하나로, 본래는 지혜와 덕망이 높은 승려에 대한 호칭이었다. 『동문선(東文選)』 권64에 실려 있는 최치원의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迦耶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900)에 따르면 신라의 대덕은 모두 왕에 의해 선발되었으며(斯皆假王給之所擢), 50세 이상의 승(僧)으로 7년의 임기를 정했다고 한다.(時滿魯丘學易之年 始許遷喬 終期七稔)

『삼국유사』에서는 기이편에서 피은편에 이르기까지 총 19명의 대덕이 등장한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조의 표훈, 48경문대왕(四十八景文大王)조의 범교사(範敎師), 권3 탑상4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조와 권4 의해5 자장정율(慈藏定律)조의 자장, 탑상4 남백월이성 노힐부득 달달박박(南白月二聖 努肹夫得 怛怛朴朴)조의 지인(至仁), 권4 의해5 의상전교(義湘傳敎)조의 명랑(明朗),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의 진문(眞門), 영심(永深), 융종불타(融宗佛陀), 현유가해화엄(賢瑜珈海華嚴)조의 대현(大賢), 법해(法海), 권5 신주6 명랑신인(明朗神印)조의 국교(國敎), 의안(義安)과 안혜(安惠), 낭융(朗融), 광학(廣學), 대연(大緣) 등 4대덕, 감통7 경흥우성(憬興遇聖)조의 경흥, 피은8 낭지승운 보현수(朗智乘雲 普賢樹)조의 연회(緣會), 효선9 대성효이세부모 신문대(大城孝二世父母 神文代)조의 강마(降魔) 등이 그들이다.

이 외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진평왕 24년(602)조에는 왕이 지명(智明)을 대덕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신라민애대왕석탑기(新羅敏哀大王石塔記)」와 최치원의 사산비명,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 등에도 몇몇 대덕의 이름이 전한다. 이를 모두 합하면 신라의 대덕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총 40여명 정도가 된다. 최치원은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서 해인사 창건 이후 당시까지 해인사에서 28명의 대덕이 배출되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신라에서 최초로 대덕이 된 인물에 대해서는 기록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삼국사기』 진평왕 24년조와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2 지명조에서는 지명이 진평왕대 최초로 대덕이 된 것으로 나오지만, 앞서 언급한 최치원의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는 선덕왕대 지영(智潁)과 승고(乘固)가 높은 덕으로 인해 대덕으로 올려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덕의 임명에 대해서는 최치원이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서 50세 이상의 승려로서 왕이 직접 뽑았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이 때 왕은 공이 있던 승려를 대덕에 임명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최치원의 글에는 “덕이 노성(老成)하게 된 사람은, 뛰어난 사람을 특별히 대우하고 기이한 변화를 권장한다는 뜻에서 별(別)자를 붙여주어 후배들에게 영광을 나타내었다.(德協老成 則令禰鶚獨飛 盖奬宋鷄奇辯 仍加別字 用慶後生)”라고 하여 별대덕(別大德)과 관련된 내용도 전한다. 아울러 대덕은 처음에 다양한 종파에서 송(誦) 내지 총지(摠持: 진언을 외워서 모든 법을 가진다는 뜻, 다라니)로 선발하다가 후에는 대개 법상종과 화엄종 두 종파에서 선발되었다고 하는데, 각 종파의 수장이 대덕으로 선발되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또한 진평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지명과 자장, 문무왕을 도와 국정을 보좌한 명랑, 문무왕이 유언으로 국사에 받들려 했던 경흥, 혜공왕의 왕위 계승에 개입한 표훈, 왕궁에서 경전을 강설했던 태현과 법해 등의 경우에서 볼 때 대덕은 왕의 자문역으로 국정에 깊이 개입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김복순, 1998)

고려시대 이후에는 승려의 일반적인 법계 중 하나가 되어, 고려시대에는 광종(光宗)대 만들어진 승과(僧科)의 대선(大選)에 합격한 승려에게 대덕의 법계와 전(田) 40결, 시(柴) 10결을 주었고, 지방에 있는 사원의 주지로 임명하였다. 조선시대는 교종의 승려에게만 대덕이 주어졌으며, 수행경력이 적어도 10년 이상 되어야만 했다고 한다.(이능화, 1918)

참고문헌

이능화, 1918, 『朝鮮佛敎通史』, 신문관.
김복순, 1998, 「신라 불교계의 인재양성과 선발」『新羅의 人材養成과 選拔』(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19).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
德經等 大王備禮受之 王御國二十四年 五岳三山神等 時或現侍於殿庭 三月三日 王御歸正門樓上 謂左右曰 誰能途中得一員榮服僧來 於是適有一大德 威儀鮮潔 徜徉而行 左右望而引見之 王曰 非吾所謂榮僧也 退之 更有一僧 被衲衣 負櫻筒[一作荷簣] 從南而來 王喜見之 邀致樓上 視其筒中 盛茶具已 曰 汝爲誰耶 僧曰 忠談 曰 何所歸來 僧曰 僧每重三重九之日 烹茶饗南山三花嶺彌勒世尊 今玆旣獻而還矣 王曰 寡人亦一甌茶有分乎 僧乃煎茶獻之 茶之氣味異常 甌中異香郁烈 王曰 朕嘗聞 師讚耆婆郞詞腦歌 其意甚高 是其果乎 對曰 然 王曰 然則爲朕作理安民歌 僧應時奉勅歌呈之 王佳之 封王師焉 僧再拜固辭不受 安民歌曰 君隱父也 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肹生以支所音物生 此肹喰惡支治良羅 此地肹捨遣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 國惡支持以 支知古如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 國惡太平恨音叱如
讚耆婆郞歌曰
咽鳴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 白雲音逐于浮去隱安支下 沙是八陵隱汀理也中 耆郞矣貌史是史藪邪 逸烏川理叱磧惡希 郞也持以支如賜烏隱 心未際叱肹逐內良齊 阿耶 栢史叱枝次高支好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王玉莖長八(寸) 無子廢之 封沙梁夫人 後妃滿月夫人 謚景垂太后 依忠角干之女也 王一日詔表訓大德曰 朕無祐 不獲其嗣 願大德請於上帝而有之 訓上告於天帝 還來奏云 帝有言 求女卽可 男卽不宜 王曰 願轉女成男 訓再上天請之 帝曰 可則可矣 然爲男則國殆矣 訓欲下時 帝又召曰 天與人不可亂 今師往來如隣里 漏洩天機 今後宜更不通 訓來以天語諭之 王曰 國雖殆 得男而爲嗣足矣 於是滿月王后生太子 王喜甚 至八歲 王崩 太子卽位 是爲惠恭大王 幼冲故 太后臨朝 政條不理 盜賊蜂起 不遑備禦 訓師之說驗矣 小帝旣女爲男 故自期晬至於登位 常爲婦女之戱 好佩錦囊 與道流爲戱 故國有大亂 <終>爲宣德與金<敬信>所弑 自表訓後 聖人不生於新羅云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도덕경 등을 보내니 대왕이 예를 갖추어 받았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岳)․삼산(三山)의 신들이 때때로 나타나 궁전의 뜰에서 모셨다. 3월 3일에 왕이 귀정문(歸正門)의 누각 위로 행차하여 좌우에게 말하기를 “누가 능히 길 위에서 한 명의 영복승(榮服僧)을 데려올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마침 한 대덕(大德)이 있었는데 태도가 위엄 있고 깨끗했다. 길에서 배회하며 가니 좌우가 바라보고 데려다가 보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한 영승(榮僧)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물리쳤다. 다시 한 승려가 있었는데 납의(衲衣)를 입고 앵통(櫻筒)[삼태기라고도 한다]을 진 채 남쪽으로부터 왔다. 왕이 보고 기뻐하며 누각 위로 맞아들였다. 그 통 안을 보니 다구(茶具)가 담겨 있었다. 왕이 말하기를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하니, 승려는 “충담(忠談)입니다.”라고 하였다. “어디에서 오십니까?”라 하니, 승려가 말하기를 “저는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달여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 미륵세존(彌勒世尊)께 올리는데, 지금도 이에 올리고 돌아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도 차를 한 잔 나눌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승려가 이에 차를 달여 바쳤다. 차의 향기와 맛이 이상하고, 다구 속에 특이한 향기가 풍겼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일찍이 들으니 사(師)가 지은 기파랑(耆婆郞)을 찬양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합니까?”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라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짐을 위하여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승(僧)이 곧바로 칙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왕사(王師)로 봉하였으나, 승은 재배(再拜)하고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안민가에 이르길,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 하실지면 백성이 그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사는 물생(物生)에게 이를 먹여 다스린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려 할지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리이다.”라고 하였다. 후렴구는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라고 하였다.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에 이르기를,
“열치고 나타난 달이 흰 구름을 쫓아 떠가는 것이 아닌가. 새파란 시내에 파랑의 모습이 있도다. 일오천 조약돌에서 낭이 지니신 마음 가를 좇으려 하노라. 아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 서리 모를 화판(花判)이여.”라고 하였다.
왕의 옥경(玉莖)이 8촌의 길이였는데, 아들이 없어 비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으로 봉하였다. 후비(後妃) 만월부인(滿月夫人)은 시호가 경수태후(景垂太后)이며, 의충(依忠) 각간의 딸이다. 왕이 하루는 표훈(表訓) 대덕을 불러 말하기를 “짐이 도움이 없어 후사를 얻지 못하니 원하건대 대덕이 상제(上帝)에게 청하여 후사가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표훈이 올라가 천제(天帝)에게 고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천제가 말하기를 ‘딸을 구하는 것은 가하지만, 아들은 마땅치 않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원컨대 딸을 아들로 바꿔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표훈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그것을 청하였다. 천제가 말하기를 “될 수는 있으나 그렇게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라고 하였다. 표훈이 내려오려 할 때, 천제가 다시 불러 말하기를 “하늘과 인간은 혼란시켜서는 안되는데 지금 대사가 이웃 마을과 같이 왕래하여 천기를 누설하니 지금 이후로는 마땅히 다시 통행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표훈이 돌아와서 천제의 말로 깨우치니 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비록 위태하더라도 아들을 얻어 뒤를 잇는 것으로 족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게 되니,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여덟 살에 이르러 왕이 돌아가시니 태자가 즉위하였는데 이 사람이 혜공대왕(惠恭大王)이다. 어렸기 때문에 태후가 조정(朝政)에 임하였는데, 정사가 다스려지지 않아 도적이 봉기해도 막을 경황이 없었으니 표훈대사의 말에 징험이 있었다. 소제(小帝)가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돌이 되는 날부터 즉위할 때까지 항상 부녀의 놀이를 하며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道流)와 함께 놀았다. 그러므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졌으며 마침내는 선덕(宣德)과 김경신(金敬信)에게 시해되었다. 표훈 이후로부터 신라에 성인(聖人)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