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사

왕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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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가락국 질지왕 2년(452)에 허황옥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수로왕과 처음 만났던 장소에 세운 사찰

일반정보

왕후사는 가락국 질지왕 2년(452)에 허황옥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수로왕과 처음 만났던 장소에 세운 사찰로 500년이 지난 뒤에 인근에 장유사(長遊寺)가 건립되면서 폐사되었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조에는 “원군(元君)의 8대손 김질왕(金銍王)이 정사(政事)에 부지런하고 또 진리를 숭상함(崇眞)이 간절하여 세조(世祖)의 어머니인 허황후(許皇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원가(元嘉) 29년 임진(壬辰, 452)에 원군과 황후가 혼례를 치룬 곳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라는 편액을 달았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근처의 평전(平田) 10결(結)을 측량하여 삼보(三寶)에 이바지하는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이 절이 생긴지 5백년 후에 또 장유사(長遊寺)를 설치하였는데, (그 절에) 납부된 전시(田柴)가 모두 3백결(結)이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剛)이 왕후사(王后寺)가 이 절의 시지(柴地)의 동남쪽 표식 내에 있다고 하여, (왕후사를) 폐하고 전장(田莊)을 만들어 가을에 추수하고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과 소를 기르는 축사를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元君八代孫金銍王 克勤爲政 又切崇眞 爲世祖母許皇后 奉資冥福 以元嘉二十九年壬辰 於元君與皇后合婚之地創寺 額曰王后寺 遣使審量近側平田十結 以爲供億三寶之費 自有是寺五百年後 置長遊寺 所納田柴 幷三百結 於是右寺三綱 以王后寺在寺柴地東南標內 罷寺爲莊 作秋收冬藏之場 秣馬養牛之廐 悲夫)”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어서 같은 조에서 “질지왕(銍知王)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원가(元嘉) 28년(451)에 즉위하여 다음해에 세조(世祖), 허황옥(許黃玉)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조와 왕후가 처음 만났던 곳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고 이름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에 충당하게 하였다.(銍知王 一云金銍王 元嘉二十八年卽位 明年 爲世祖許黃玉王后 奉資冥福 於初與世祖合御之地創寺 曰王后寺 納田十結充之)”라고 유사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즉, 이상의 내용을 통해서 원가(元嘉) 29년(452)에 김질왕(金銍王)이 허황옥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수로왕과 처음 만났던 장소에 왕후사를 세우고, 전지 10결을 사찰의 운영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는데, 500년 후에 장유사(長遊寺)가 세워지고, 사원의 시지에 왕후사가 들어가게 되면서 왕후사가 폐사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 권3 탑상4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조에서도 “제8대 질지왕(銍知王) 2년 임진(壬辰)에 이르러, 그곳에 절을 세우고 또 왕후사(王后寺)를 창설(創設)하여[아도(阿道)와 눌지왕(訥祗王)때에 해당하니, 법흥왕(法興王) 이전이다.] 지금까지 복을 빌고 있으며 더불어 남쪽의 왜(倭)를 진압하고 있으니 본국본기(本國本記)에 자세히 보인다.(逮第八代銍知王二年壬辰 置寺於其地 又創王后寺[在阿道訥祗王之世 法興王之前] 至今奉福焉 兼以鎭南倭 具見本國本記)”라고 하였다. 여기서도 왕후사와 관련된 유사한 내용을 언급하지만, 남쪽의 왜를 진압하기 위해서 세웠다는 다른 목적이 언급이 추가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2 김해도호부 고적(古蹟)조에서는 왕후사의 위치를 비정하면서 “왕후사(王后寺)[옛 터가 장유산(長遊山)에 있다. 수로왕 8대손 질지왕(銍知王)이, 그 때에 장막을 치고 합혼(合婚)하던 곳에다가 절을 세우고 왕후사라 하였는데, 뒤에 절은 파하고 장(莊)으로 만들었다.](王后寺[舊址在長遊山 首露王八代孫銍知王 就幔殿合婚之地 建寺名曰王后寺 後罷寺爲莊]).”라고 기록하였다. 기왕의『삼국유사』에서 막연하게 수로왕과 허황옥이 처음 만난 곳이라는 언급하였으나, 여기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장유산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였다. 한편 장유산은 같은 책 산천(山川)조에서는 장유산이 부(府)의 남쪽 40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고 있는데, 현재 김해시 장유면 장유리 남쪽의 옥녀봉(玉女峰)에 해당한다.
옥녀봉의 인근에 있는 장유면 응달리 태정마을 뒷산에는 임강사(臨江寺) 혹은 태장사(苔長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 정조 년간(1776-1800)에 편찬된 『김해부읍지(金海府邑誌)』 사찰조(寺刹條)에서는 “임강사(臨江寺) 허황후(許后)가 천축국에서 올 때 이곳에 정박하자 왕이 임시 궁궐을 설치하여 맞이하였다. 수로왕의 8대손인 질지왕이 절을 지었는데 왕후사라고 하였다. 지금의 임강사이다.(臨江寺 許后自天竺來 泊于此 王設幔殿迎之 王八代孫銍知王建寺 故名王后寺 今名臨江寺)”고 하여, 임강사가 왕후사의 후신이라고 비정하였다. 또한 『숭선전지(崇善殿誌)』에 인용된 『임강사각항응역등록(臨江寺各項應役藤錄)』에서도 임강사가 옛날 허왕후가 주연(住輦)한 곳이므로 영정을 봉안하였다는 내용의 기록이 있어서 임강사가 왕후사일 가능성이 높다.(김태식, 1998)

이와 달리 『김해읍지(金海邑誌)』비판(碑板)조에 인용된 「명월사사적비문(明月寺事蹟碑文)」에 의하면 수로왕이 처음 허황후를 만났던 곳은 산신령의 영험함에 감동하여 산의 이름을 명월(明月)이라고 했는데, 그 후에 국가의 번영과 허황후, 세자, 왕 자신을 위하여 흥국사(興國寺), 진국사(鎭國寺), 신국사(新國寺)의 세절을 명월산의 같은 골짜기에 세웠다고 한다. 또한 명월사를 중수할 때 수로왕 103년(144)에 해당하는 ‘건강원년갑신삼월남색(建康元年甲申三月藍色)’의 명문이 있는 기와가 나왔으며, 장유화상이 서역에서 불법을 받들고 오니 왕이 도를 존중하고 숭불하였다는 내용도 전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허황후를 위하여 건립했다는 흥국사를 왕후사와 동일한 사찰로 파악하여 명월산(明月山)에 위치하였다고 파악하는 전언도 있다. 실제로 명월산에 해당하는 현재의 금병산(錦屛山)에 북쪽 기슭에는 흥국사(興國寺)라는 이름의 사찰이 명월사지로 전하는 곳에 1942년에 중건되었다.
그렇지만 「명월사적비문」의 내용은 『가락국기』에서 원가(元嘉) 29년(452)에 왕후사가 건립되었다는 내용과 충돌하고 있으며 수로왕 시기에 불교가 전해졌다는 내용이나 한반도 남부지역에 기와가 도입되기 훨씬 이전인 건강(建康) 원년(144)의 기년명 와편이 나왔다는 내용은 신뢰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홍윤식, 1991)
그리고 『가락국기』의 내용 중에서 왕후사가 장유사의 범위에 포함되었다는 내용에 착안하여 현재 불모산에 위치한 장유사 인근에 왕후사의 터가 존재한다는 견해도 있다.(이종기, 1977) 그렇지만 구체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고찰은 어렵다.

참고문헌

이종기, 1977, 『駕洛國探査』, 일지사.
홍윤식, 1991, 「伽倻佛敎의 傳來와 그 展開」『佛敎學報』27.
김영태, 1997, 「伽倻佛敎의 史的 考察」『伽倻文化』10.
김태식, 1998, 「駕洛國記 所載 許王后 說話의 性格」『韓國史硏究』102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
駕洛國記[文廟朝大康年間 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 今略而載之]
… 淳化二年 金海府量田使中大夫趙文善申省狀稱 首露陵王廟屬田結數多也 宜以十五結仍舊貫 其餘分折於府之役丁 所司傳狀奏聞 時廟朝宣旨曰 天所降卵 化爲聖君 居位而延齡 則一百五十八年也 自彼三皇而下 鮮克比肩者歟 崩後自先代 俾屬廟之壟畝 而今減除 良堪疑懼 而不允 使又申省 朝廷然之 半不動於陵廟中 半分給於鄕人之丁也 節使[量田使<稱>也]受朝旨 乃以半屬於陵園 半以支給於府之徭役戶丁也 幾臨事畢 而甚勞倦 忽一夕夢 見七八介鬼神 執縲紲握刀劒而至云 儞有大憝 故加斬戮 其使以謂受刑而慟楚 驚懼而覺 仍有疾瘵 勿令人知之 宵遁而行 其病不間 渡關而死 是故量田都帳 不著印也 後人奉使來 審檢厥田 <十>一結十二負九束也 不足者三結八十七負一束矣 乃推鞠斜入處 報告內外官 勅理足支給焉 又有古今所嘆息者 元君八代孫金銍王 克勤爲政 又切崇眞 爲世祖母許皇后 奉資冥福 以元嘉二十九年壬辰 於元君與皇后合婚之地創寺 額曰王后寺 遣使審量近側平田十結 以爲供億三寶之費 自有是寺五百(年)後 置長遊寺 所納田柴 幷三百結 於是右寺三<綱> 以王后寺在寺柴地東南標內 罷寺爲莊 作秋收冬藏之場 秣馬養牛之廐 悲夫 …
가락국기[문종조 대강(大康) 연간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로 있던 문인(文人)이 찬술한 것이다. 지금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 순화(淳化) 2년(991)에 김해부(金海府) 양전사(量田使)인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의 조사보고(申省狀)에서 말하기를, “수로왕묘(露陵王廟)에 속한 전결(田結) 수가 많으니, 마땅히 15결(結)로써 예전 관행대로 따르게 하고, 나머지는 김해부의 역정(役丁)에게 나누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해당 관청에서 그 장계를 전하여 임금께 아뢰니, 조정에서 지령(指令)하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성스러운 임금(聖君)으로 화생(化生)하여, 왕위에 있으면서 나이가 158세였다. 저 삼황(三皇) 이후로 이에 견줄 자가 드물 것이다. 돌아가신 후 선대로부터 묘(廟)에 속하게 한 전지(田地)인데, 지금에 줄여 없애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송구스러운 일이므로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양전사(量田使)가 거듭하여 아뢰니 조정(朝廷)에서는 그렇게 여겨서 절반은 능묘(陵廟)에 계속 속하게 하고, 절반은 그 곳의 역정(役丁)에게 나누어 주었다. 절사(節使)[양전사(量田使)를 칭한다.]가 조정의 뜻을 받고, 절반은 능원에 소속케 하고, 절반은 김해부의 요역에 동원되는 호정(戶丁)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이 거의 끝날 무렵에 (양전사가) 몹시 피로하였는데, 갑자기 어느 날 밤에 꿈을 꾸니, 칠팔 명의 귀신이 밧줄을 잡고 칼을 쥐고 와서 말하기를, “네가 큰 잘못이 있으니, 목을 베어 죽이겠다.”고 하였다. 그 양전사가 형벌을 받는다며 아프다고 말하고, 놀라고 두려워서 깨어났다. (이로 인하여) 병이 들어서 남에게 알리지도 않고 밤에 도망하여 갔는데, 그 병은 조금도 낫지 않고 관문(關門)을 지나다가 죽었다. 이러한 까닭에 토지측량대장(量田都帳)에는 (그의) 도장이 찍히지 아니하였다. 그 후에 사람들이 사명을 받들고 와서 그 밭을 자세히 조사해 보니 11결(結) 12부(負) 9속(束)뿐이고, 부족한 밭이 3결(結) 87부(負) 1속(束)이었다. 이에 잘못 들어간 부분(斜入處)을 추문(推問)하여 내외의 관서에 보고하고 칙명(勅命)으로 부족분을 지급하도록 처리하였다. 또한 고금에 탄식할 일이 있는데, 원군(元君)의 8대손 김질왕(金銍王)이 정사(政事)에 부지런하고 또 진리를 숭상함(崇眞)이 간절하여 세조(世祖)의 어머니인 허황후(許皇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원가(元嘉) 29년 임진(壬辰, 452)에 원군과 황후가 혼례를 치룬 곳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라는 편액을 달았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근처의 평전(平田) 10결(結)을 측량하여 삼보(三寶)에 이바지하는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이 절이 생긴지 5백년 후에 또 장유사(長遊寺)를 설치하였는데, (그 절에) 납부된 전시(田柴)가 모두 3백결(結)이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剛)이 왕후사(王后寺)가 이 절의 시지(柴地)의 동남쪽 표식 내에 있다고 하여, (왕후사를) 폐하고 전장(田莊)을 만들어 가을에 추수하고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과 소를 기르는 축사를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