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황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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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신라 진흥왕 14년(553) 경주에 창건한 사찰이다.

일반정보

황룡사(皇龍寺)는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즉위 14년(553) 경주에 창건한 사찰이다. 신라 삼보(三寶) 중 황룡사장육존상(皇龍寺丈六尊像), 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 등 두 가지가 조영된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고려(高麗) 고종(高宗)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불에 타 없어졌다.

전문정보

황룡사(皇龍寺)는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재위 14년(553)에 현재 경북 경주 구황동 320번지 일대에 세운 사찰이다. 그 창건과 역사에 대해서는『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 권3 흥법3 아도기라조, 권3 탑상4 황룡사장육조,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조, 권3 탑상4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조, 권4 의해5 자장정률조 등에 전하고 있다. 칠처가람(七處伽藍) 중 하나라고 전해져 내려오는 곳으로, 신라의 삼보(三寶) 중 황룡사장육존상(皇龍寺丈六尊像), 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 두 가지나 조영된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황룡사는 월성(月城) 동쪽 용궁(龍宮) 남쪽에 신궁(新宮)을 조성하려다가 황룡(黃龍)이 출현하자 사찰로 용도를 변경하여 세워진 절이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조에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즉위한 지 14년 되는 계유년(553) 2월에 용궁(龍宮) 남쪽에 궁궐을 지으려 하였는데, 황룡(黃龍)이 그 땅에 나타나자 이를 고쳐서 절로 삼게 하고 황룡사(黃龍寺)라 이름 하였다. 기축년(569)에 이르러 담장을 두르고 17년 만에 공사가 끝났다.(新羅第二十四眞興王卽位十四年癸酉二月 將築紫宮於龍宮南 有黃龍現其地 乃改置爲佛寺 號黃龍寺 至己丑年 周圍墻宇 至十七年方畢)”라는 창건설화가 전해진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14년(553)조에도 “봄 2월에 왕이 담당관청에 명하여 월성(月城) 동쪽에 신궁(新宮)을 짓게 하였는데, 황룡(黃龍)이 그 땅에 나타나자 왕이 이를 의아하게 여겨, 고쳐서 사찰로 삼게 하고 “황룡(皇龍)”이라는 이름을 내렸다.(春二月 王命所司 築新宮於月城東 黃龍見其地 王疑之 改爲佛寺 賜號曰皇龍)”라고 전하고 있다.

다만 『삼국유사』의 “월성 동쪽”을 『삼국사기』에서는 “용궁의 남쪽”이라고 하고, 이름을 “황룡사(黃龍寺)”가 아닌 “황룡사(皇龍寺)”로 기록한 점은 서로 다르다. 황룡사의 명칭에 대해서는 모든 『삼국사기』의 기록과 대부분의 『삼국유사』가 “황룡사(皇龍寺)”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조와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조 두 기록에서는 “황룡사(黃龍寺)”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조와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14년(553)조 모두 황룡이 나타난 곳에 절을 지었다고 했으므로 이는 그 곳이 용이 사는 물과 관련된 지역임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삼국사기』 권4 진흥왕 14년(553)조의 기록은 『삼국유사』권3 탑상4 황룡사장육조에서 용궁이라고 한 것과 상통하는 내용으로, 결국 두 기록은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신동하, 2001) 또한 “황(黃)”과 “황(皇)”은 서로 통용되는 한자로 굳이 『삼국사기』처럼 “황(皇)”자를 사용한 것은 왕실 사찰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남동신, 2001)

또한 이 같은 황룡사의 창건에 대해, 진흥왕(眞興王) 12년(551) 모태후(母太后)의 섭정(攝政)을 받아오던 진흥왕이 비로소 친정(親政)하게 된 것과 관련하여 진흥왕 14년(553)의 황룡사 창건도 친정을 통한 새로운 국가건설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또한 신라에서 행해진 백좌강회(百座講會)가 모두 황룡사에서 이루어진 점을 들어 이러한 호국(護國)을 위한 백좌강회를 열 장소를 위한 목적도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이기백, 1986)

황룡사가 완성된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조에 “기축년(569)에 이르러 담장을 둘렀으니, 17년만에 공사가 끝났다.(至己丑年 周圍墻宇 至十七年方畢)”라고 기록된 것과는 다르게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27년(566)조에서는 “황룡사 짓는 일이 끝났다(皇龍寺畢功)”라고 전하고 있다. 이는 두 기록의 완공 기준이 다른 것으로, 『삼국사기』에서는 중요한 시설들이 갖춘 것을 기준으로 566년 “필공(畢功)”이라 한 것이고, 『삼국유사』에서는 그 뒤 건물 둘레에 담장을 두르게 되고 공사가 마무리됨을 기준으로 569년 “필(畢)“이라고 한 것이라고 본다.(이기백, 1986)

황룡사는 가람이 완성된 이후에도 탑상(塔像) 등이 새로 만들어지거나 수축되면서 모습을 더해갔다. 황룡사에 조성된 장육상에 대해서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조에 인도의 아육왕(阿育王)이 불상을 조성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인연이 있는 땅에 가서 이루어 질 것을 기원하며 금·구리·모형 석가삼존상을 배에 띄워 보내니, 마침내 진흥왕 35년(574)에 신라 땅에서 장육상이 조성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장육상의 무게는 3만 5007근인데 황금이 1만 198분이 들었고, 두 보살상은 구리 1만 2000근과 황금 1만 136분이 들었다고 할 만큼 거구의 금동삼존불상으로 추측되며, 높이는 1장 6척으로 4.5-5m 사이의 불상으로 추측된다.

장육상의 완성은 진흥왕 35년(574)으로서, 황룡사가 완성된 진흥왕 27년(566) 또는 진흥왕 30년(569)에서 6-9년이나 지난 다음이다. 이 본존상 공백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9년간의 공백을 궁궐에서 사찰로 용도 변경되는 과정으로 이해하여 장육의 석가삼존상을 최초의 본존상으로 보기도 한다.(남동신, 2001)

한편 장육상 이전에 본존상이 있었으며, 이는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조에서처럼 인도에서 보내온 모형 석가삼존상을 잠시 모셨던 동축사(東竺寺)의 삼존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본존불이 황룡사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것이었기 때문에 장육상으로 고쳐 만들었다는 것이다.(이기백, 1986) 이 같은 의견과 같은 맥락으로 용은 우리말로 “미르”라고 하며 이 “미르”는 “미륵(彌勒)”과도 연관되는 것에 착안하여 곧 창건설화의 황룡 출현은 황룡사 창건이 미륵신앙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보기도 한다. 따라서 본존불 역시 미륵불로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노중국, 2000)

장육존상 연기설화는 인도의 굽타양식 불상이 6세기 후반 아육왕상(阿育王像)이라는 이름하에 중국을 거쳐 신라로 전래된 사실을 반영한다는 견해가 있다.(김리나, 1997) 이러한 아육왕상 계열의 석가상을 조성한 데에는 전륜성왕(轉輪聖王) 의식이 작용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장육상을 조성한 진흥왕(眞興王)은 아육왕이 세 번씩이나 실패한 불상 조성을 단 한 번에 성공시킴으로써 아육왕을 능가하는 전륜성왕 군주임을 웅변하고 있다는 것이다.(김영태, 1992)

그러나 아육왕상설은 선덕여왕(善德女王)대 자장(慈藏)이 신라가 불교인연의 국토라는 사상으로 지어낸 것으로 보기도 한다. 장육상이 조성된 진흥왕 당시에는 아육왕상설은 아직 생성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신동하, 2001) 또한 『삼국유사』권3 탑상4 황룡사장육조 세주에서 보이는 진평왕대의 연기설화와 진평왕 6년(584) 금당(金堂) 조성의 기사와 관련해 진평왕대 후반이 전제왕권의 성립기로 간주된다는 점을 들어 장육존상이 7세기 중엽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야 하며(신종원, 1992), 창건기의 황룡사는 전륜성왕신앙의 사찰로 창건되었지만, 장육존상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석가불신앙의 사찰로 변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 의견에 따르면, 진평왕 6년(584)에 기존의 금당을 완전히 제거한 후 기반의 흙부터 새롭게 조성한 점을 들어 이 때에 들어 기존의 신앙인 전륜성왕신앙에서 벗어나 새로운 신앙인 북조(北朝) 불교의 석가불신앙으로 재편하려 하였음을 보여준다고 하였다.(양정석, 2004)

황룡사에는 신라 최대의 구층탑이 조성되었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선덕왕 14년(645)조에 “황룡사탑을 창조하니 자장의 청에 따른 것이다.(創造皇龍寺塔 從慈藏之請也)”,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조에 “자장(慈藏)이 중국의 태화지(太和池) 곁을 지날 때 홀연히 신인이 출현하여 물었다…본국으로 돌아가 그 절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귀국하여 탑 세울 사연을 왕에게 아뢰었다…아비지(阿非知)라는 공장이 명을 받고 와서 공사를 경영하였는데 이간(伊干) 용춘(龍春)이 일을 주관해 소장(小匠) 200명을 인솔했다.(經由中國大和池邊 忽有神人出問…歸本國成九層塔於寺中 隣國降伏 九韓來貢 王祚永安矣 建塔之後 設八關會 赦罪人 則外賊不能爲害…而還國以建塔之事聞於上…匠名阿非知 受命而來 經營木石 伊干龍春幹蠱 率小匠二百人)”라고 한 기록으로 보아 황룡사에는 선덕여왕 14년(645) 자장(慈藏)의 청에 의해 구층탑이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높이는 상륜부 42척(약 15m), 탑신부 183척(약 65m), 전체 225척(약 80m)의 대탑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찰주기(刹柱記)를 인용하여 목탑에 사리가 안치되어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구층탑은 사리불신앙(舍利佛信仰)으로서 신라 사람들에게 신봉되었음을 알 수 있다.(김상현, 1999)

이 같이 백제로부터 아비지(阿非知)라는 기술자를 초청하고, 왕족 용춘(龍春)에게 감독을 맡겨서 탑을 세운 것은, 탑의 조성이 국가적 관심 속에 진행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役事)는 당시 여왕이 다스린다하여 업신여기던 풍조와 선덕여왕 11년(642) 백제의 침략으로 인한 대야성(大耶城) 등 40여성의 함락 등으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며, 국가를 수호하고 나아가 통일 의지를 나타낸 노력의 일환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김상현, 1999)

황룡사는 선덕여왕(善德女王)대에 구층목탑을 건립하며 신라 최고의 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황룡사를 중심으로 자장이 승관제(僧官制)를 정비하는 바탕이 되었다. 또한 『삼국유사』권3 탑상4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조에서와 같이 경덕왕 13년(754) 50만근에 가까운 무게로 주조된 황룡사종은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종인 황동 12만근으로 주조한 봉덕사종을 능가하는 큰 종을 주조하면서 위상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 중대에 와서 중고왕실과 밀착되어 있던 황룡사에 대한 개편이 이루어지고 황룡사가 수행했던 승정기구가 성전사원(成典寺院)으로 넘어가면서 그 기능이 축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사격(寺格)과 기능을 회복한 것은 신라 하대에 들어와서이다. 이는 1960년대 황룡사지에서 발견된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 “문성왕대(文聖王代)에 이르니 (탑을 세운 지가) 오래 되어 (탑이) 동북쪽으로 기울어졌다. 나라에서 쓰러질까 염려하여 고쳐 세우고자 여러 재목을 모은 지 30여년이 되었으나 아직 고쳐 세우지 못하였다. 지금의 왕이 즉위한 지 11년인 함통(咸通) 신묘년(879)에 탑이 기울어진 것을 애석하게 여겨…그 해 8월 12일 처음으로 낡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 안에 다시 무구정경(無垢淨經)에 의거하여 작은 석탑 99개에 각각의 석탑마다 사리 하나씩을 넣고, 다라니 네 가지와 경전 1권을 책 위에 사리 1구를 안치하고 철반의 위에 넣었다. 이듬해 7월에 9층을 모두 마쳤다. 그러나 찰주가 움직이지 않아 왕께서 찰주에 본래 봉안한 사리가 어떠한지 염려하여 이간인 승지(承旨)에게 임진년(872) 11월 6일에 여러 신하를 이끌고 가보도록 하였다. 기둥을 들게 하고 보았더니 주초(柱礎)의 구덩이 안에 금과 은으로 만든 고좌(高座)가 있고 그 위에 사리가 든 유리병을 봉안해 두었었다. 그 물건은 불가사의한데 다만 날짜와 사유를 적은 것이 없었다. 25일에 본래대로 해두고 다시 사리 백 개와 법사리 두 가지를 봉안하였다. (왕이) 사유를 적고 창건한 근원과 고쳐 세운 연고를 간단히 기록하게 하여, 만겁이 지나도록 후세의 사람들에게 드러나도록 하였다.”에서 신라 하대 경문왕이 재위 11년(871)에 황룡사 9층탑의 보수라는 대규모의 국가적인 사업을 통해 왕권강화를 꾀했음을 알 수 있다.(채상식, 2001)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高宗) 25년(1238)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버리고, 현재 초석과 대좌만이 남아있는데, 그 터는 사적 제6호로 지정되었다. 1976년 6월부터 1983년 12월까지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창건이후 3차에 걸쳐 가람배치의 변화가 있었음이 밝혀졌으며, 황룡사 담장 내 면적은 동서 288m, 남북 281m의 8만928㎡으로 당초 늪지를 매립하여 대지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찰의 건물배치는 중문(中門)·탑(塔)·금당(金堂)·강당(講堂)이 남북으로 배치된, 이른바 1탑식가람배치(一塔式伽藍配置)를 기본으로 하고, 탑의 전방으로 좌우에 대칭되게 건물을 세워 종루(鐘樓)·경루(經樓)를 마련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4만여점에 달하며,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와전류(瓦塼類), 금동제불상·풍탁(風鐸)·금동제귀걸이·청동거울, 백자 항아리, 치미(鴟尾) 등이 수습되었다.(문화재관리국, 1984)

참고문헌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84, 『皇龍寺址 遺蹟發掘調査報告書』.
이기백, 1986, 『新羅思想史硏究』, 일조각.
김영태, 1992, 『佛敎思想史論』, 민족사.
신종원, 1992, 『新羅初期佛敎史硏究』, 민족사.
김리나, 1997, 『韓國古代佛敎彫刻史硏究』, 일조각.
김상현, 1999, 『新羅의 思想과 文化』, 일지사.
노중국, 2000, 「新羅와 百濟의 交涉과 交流」『新羅文化』 17·18합.
남동신, 2001, 「新羅 中古期 佛敎治國策과 皇龍寺」『皇龍寺의 綜合的』(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 論文集 22).
신동하, 2001, 「新羅 佛國土思想과 皇龍寺」『皇龍寺의 綜合的 考察』(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 論文集 22).
채상식, 2001, 「新羅史에 있어서 皇龍寺의 位相과 그 推移」『皇龍寺의 綜合的 考察』(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 論文集 22).
양정석, 2004, 『皇龍寺의 造營과 王權』, 서경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
新羅始祖 赫居世王
辰韓之地 古有六村 一曰 閼川楊山村 南今曇嚴寺 長曰謁平 初降于瓢嵒峰 是爲及梁部李氏祖[弩禮王九年置 名及梁部 本朝太祖天福五年庚子 改名中興部 波替東山彼上東村屬焉] 二曰 突山高墟村 長曰蘇伐都利 初降于兄山 是爲沙梁部[梁讀云道 或作涿 亦音道]鄭氏祖 今曰南山部 仇良伐麻等烏道北廻德等 南村屬焉[稱今曰者 太祖所致也 下例<如>] 三曰 茂山大樹村 長曰俱[一作仇]禮馬 初降于伊山[一作皆比山] 是爲漸梁[一作涿]部 又牟梁部孫氏之祖 今云長福部 朴谷村等 西村屬焉 四曰 觜山珍支村[一作賓之 又賓子 又<氷>之] 長曰智伯虎,初降于花山 是爲本彼部崔氏祖 今曰通仙部 柴巴等 東南村屬焉 致遠乃本彼部人也 今皇龍寺南味呑寺南 有古墟云是崔侯古宅也 殆明矣 五曰 金山加利村[今金剛山栢栗寺之北山也] 長曰祗沱[一作只他] 初降于明活山 是爲漢歧部又作韓歧部裵氏祖 今云加德部 上下西知乃兒等 東村屬焉 六曰 明<活>山高耶村 長曰虎珍 初降于金剛山 是爲習比部薛氏祖 今臨川部勿伊村仍仇旀村閼谷[一作葛谷]等 東北村屬焉 按上文 此六部之祖 似皆從天而降 弩禮王九年 始改六部名 又賜六姓 <今>俗中興部爲母 長福部爲父 臨川部爲子 加德部爲女 其實未詳 …
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 赫居世王)
진한의 땅에는 옛날에 6촌(六村)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인데,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은 알평(謁平)이다. 처음에 표암봉(瓢嵓峰)으로 내려오니,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弩禮王) 9년(32)에 두어져, 급량부(及梁部)라고 하였는데, 본조(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 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속한다.]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인데,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으로 내려오니, 사량부(沙梁部)[량(梁)은 도(道)라고 읽는다. 혹은 탁(涿)이라고 쓰는데, 역시 도(道)라고 읽는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고 하는데, 구량벌(仇良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때 설치한 것이다. 아래의 예도 이와 같다.] 셋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인데, (촌)장은 구례마(俱禮馬)이다.[구(仇)라고도 쓴다.] 처음에 이산(伊山)으로 내려오니[계비산(皆比山)이라도 한다.], 점량(漸梁)[탁(涿)이라도 한다.]부(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는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 넷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빈지(賓之) 또는 빈자(賓子) 또는 빙지(氷之)라도 쓴다.]인데, (촌)장은 지백호(智伯虎)이다. 처음에 화산(花山)으로 내려오니,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하는데,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致遠)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 황룡사(皇龍寺) 남쪽에 있는 미탄사(味呑寺)남쪽에 옛 터가 있는데, 이것이 최후(崔侯, 최치원)의 옛 집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다섯째 금산(金山) 가리촌(加里村)「지금 금강산(金剛山) 백률사(栢栗寺)의 북쪽 산이다.]인데, (촌)장은 기타(祗沱)[지타(只他)라도 한다.]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으로 내려오니,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하서지(下西知)․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인데,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처음에 금상산(金剛山)으로 내려오니,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임천부(臨川部)인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旀村)․궐곡(闕谷)[갈곡(葛谷)이라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이 육부(六部)의 조상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9년(32)에 비로소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한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는 중흥부를 어머니, 장복부를 아버지, 임천부를 아들, 가덕부를 딸이라고 하는데, 실상은 상세하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