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성대

점성대

분류 문학 > 건축 >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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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신라의 천문 관측 구조물

지정명: 경주첨성대(慶州瞻星臺)
지정번호: 국보 제31호
위치: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

일반정보

신라시대에 천문을 관찰하기 위해 높이 쌓은 대(臺)로 선덕여왕대(632~646)에 축조되었다. “첨성대(瞻星臺)”라고도 하며 현재 경주시 인왕동에 실물이 전한다. 외형은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 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를 얹은 모습이다.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긴 하나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첨성대(점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여겨진다.

전문정보

신라의 첨성대 축조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전하지 않고, 『삼국유사』 권1 기이1 선덕여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조에 “별기에 이르기를 이 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고 한다(別記云 是王代 鍊石築瞻星臺)”라 하여 매우 소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첨성대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 지리지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도 전하는데, 이 중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당 태종 정관(貞觀) 7년(633)에 첨성대가 축조되었다고 하였고, 『증보문헌비고』에는 선덕여왕 16년(647)에 만들었다고 되어 있으나 모두 전거를 알 수 없는 기록이므로 첨성대의 정확한 축조연대는 불분명하다.

경주첨성대의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긴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 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사람이 가운데를 통해 오르내리게 되어있다(人由中而上下)”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첨성대의 기능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별을 관측하는 천문 관측대였다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 첨성대조에는 “사람이 가운데를 통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하였다.(人由中而上下 以候天文)”고 하고 이어서 첨성대가 천문을 관측하는 일과 관련 있음을 짐작케 하는 고려말 안축(安軸)과 조선초 조위(曺偉)의 시를 싣고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첨성대를 천문 관측대로 여기고 있었고, 20세기 초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면서 첨성대를 조사했던 와다유지(和田雄治), 루퍼스(W.C.Rufus) 등의 외국인들도 첨성대가 천문 관측대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해방 후 1960년대 경주박물관에 의해 첨성대에 대한 실측이 이루어진 후에도 첨성대는 천문 관측대라는 이해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홍사준, 1967) 그러나 첨성대가 천문관측과 관련 있기는 하지만, 첨성대의 내부가 일상적인 관측에 불편하고 첨성대 윗부분에 목조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도 희박하므로, 첨성대는 계절에 따라 변하는 해그림자 길이를 측정하는데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제기되었다.(전상운, 1964)

한편 첨성대가 천문 관측대가 아니라 신라의 천문학 수준을 과시하기 위한 상징적인 건축물 또는 종교적 상징물이나 별에 제사를 지내는 초성대(醮星臺)였다는 의견도 있다. 즉 신라 천문학자들이 스스로의 천문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신라의 천문대 안에 상징적인 부속 건축물로 첨성대를 만들었을 것이라 추측하거나(김용운, 1974), 첨성대가 불교적 우주관인 수미산(須彌山)을 연상케하며 그 정상부에는 불상과 같은 종교적 상징물이 안치되어 있었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이용범, 1974)

그러나 첨성대는 천문대로서의 기능과 함께 상징성과 종교성 등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천문학은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 부분이 많이 섞여 있었으며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었고 따라서 정치와도 관련이 깊었다. 그러므로 삼국시대 천문을 관측하는 일은 신성한 일로 여겨졌을 것이며 첨성대의 건축에는 이러한 면이 반영되었을 것이다.(이문규, 2004)

참고문헌

전상운, 1964, 「三國 및 統一新羅時代의 天文儀器」『古文化』3.
홍사준, 1967, 「瞻星臺」『考古美術資料』12.
김용운, 1974, 「瞻星臺小考」『歷史學報』64.
이용범, 1974, 「瞻星臺存疑」『震檀學報』38.
이문규, 2004, 「첨성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첨성대 해석의 역사와 신라시대의 천문관」 『한국과학사학회지』제26권제1호.

관련원문 및 해석

第十七 奈勿麻立干 [一作□□王 金氏 父仇道葛文王 一作未召王之弟(末仇)角干 母(休禮夫人)金氏 丙辰立 理四十六年 陵在占星臺西南]
제17 나물마립간 [혹은 □□왕이라고도 하며 김씨이다. 아버지는 구도갈문왕 혹은 미소왕의 동생 말구각간이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휴례부인 김씨이다. 병진에 즉위하여 46년간 다스렸다. 능은 점성대의 서남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