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사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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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오대산 문수사의 뜰에 있던 영험한 신라시대 석탑

일반정보

오대산 문수사의 뜰에 있던 영험한 신라시대 석탑으로, 현재 오대산 상원사 영산전 앞에 있는 석탑으로 보기도 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3 탑상4 오대산문수사석탑기(五臺山文殊寺石塔記)조에는 오대산 문수사의 뜰에 매우 영험이 있는 신라시대의 석탑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옛 노인의 말을 인용한 것에 의하면, 옛날 연곡현(連谷縣) 사람들이 배를 타고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탑 하나가 나타나서 배를 따라와 모든 물속의 동물들이 그 그림자를 보고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고 한다. 이 때문에 어부들은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고, 분함을 참지 못하고 그림자를 찾아가보니 이 탑이 있어 함께 도끼를 휘둘러 그 탑을 쳐부수고 가버렸으니, 지금 이 탑의 네 귀퉁이가 모두 떨어진 것은 이 까닭이라고 하였다. 또한, 정륭(正隆) 원년(1156) 병자 10월 일(日)에 백운자(白雲子)가 기록한 현판의 내용을 인용한 것에 의하면, 비구(比丘) 처현(處玄)이 일찍이 이 절에 있으면서 문득 탑을 뜰 한 가운데로 옮겼더니 20여 년 동안 잠잠하여 아무런 영험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자(日者)가 터를 구하여 이곳까지 와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뜰 가운데는 탑을 안치할 곳이 아닌데 어째서 동쪽으로 옮기지 않습니까?”라고 하였고, 이에 여러 스님들이 깨닫고 다시 옛 자리로 옮겼으니 지금 서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조에 의하면, 보천이 죽기 전에 불사(佛事)를 통해 국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기록하면서 오대산의 동대, 서대, 남대, 북대, 중대의 각 대마다 상주하고 있는 부처・보살을 위해 암자를 짓고, 각 암자마다 신앙결사를 두어 불공을 드릴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총괄하는 또 하나의 결사인 법륜사(法輪社)를 두고 이들 6개 결사의 도회(都會)로 하원(下院)의 문수갑사(文殊岬寺)를 열어 복전승 7명에게 밤낮으로 항상 화엄신중예참(華嚴神衆禮懺)을 행하게 할 것을 제시하였다. 이 기록에 등장하는 문수갑사(文殊岬寺)와 오대산문수사석탑기(五臺山文殊寺石塔記)의 문수사(文殊寺)는 동일한 절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삼국유사』 외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는 오대산에 위치한 문수사는 보이지 않고, 강릉부 동쪽 해안에 위치한 문수사가 보이고 있을 뿐이다. 곧,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강원도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불우(佛宇)조에 의하면, “문수사(文殊寺)는 부 동쪽 해안(海岸)에 있다. 이곡(李穀)의「동유기(東遊記)」에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문수(文殊)와 보현(普賢) 두 석상(石像)은 땅에서 솟아나온 곳이라 하며, 동쪽에 사선비(四仙碑)가 있었는데, 호종조(胡宗朝)가 물에 빠뜨려 오직 귀부(龜趺)만이 남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오대산 문수사 석탑기에 나오는 신라시대의 석탑을 지금의 상원사에 있는 석탑으로 보고, 문수사를 바로 상원사로 보는 견해가 있다.(권상로, 1979) 현재 상원사 영산전 앞에 있는 석탑은 영산전 옆에서 출토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고,(한국불교연구원, 1977) 본래 지금의 자리에 있던 것이 아니라 계곡에 있던 폐탑을 옮겨 놓은 것이라고도 한다.(박용수, 1996)

상원사 영산전 앞 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세운 5층 석탑으로 추정되나, 석재가 많이 파손되었다. 1개의 판석으로 이루어진 하대석에는 20엽(葉)의 복련(覆蓮)이 조각되어 있고 갑석(甲石)에도 복련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부는 사방에 삼존불을 비롯한 불보살을 가득 새겨 매우 호화로우며, 비록 파손된 탑이긴 하나 전성기 상원사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중요한 탑이다. 옥개(屋蓋)에 층급을 나타내지 않고 낙수면에는 연화(蓮花)를 조각하였다. 조형상으로 세조(世祖)의 상원사 비호에 따른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한국불교연구원, 1977)

그런데 1984년 7월에 조선전기의 불상인 오대산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에서 성화(成化) 2년(1466) 조성발원문과 만력(萬曆) 기해년(1599)의 중수발원문 및 조선 전기의 복식, 전적류 등 23점의 복장유물이 발견되어, 상원사와 문수사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성화(成化) 2년(1466)에 작성된 조성발원문은 조선 세조(世祖) 12년(1466)에 세조의 외동딸인 의숙공주(懿淑公主)와 남편 정현조(鄭顯祖)가 주상전하(主上殿下)와 왕비전하(王妃殿下)를 위하고, 자기들의 득남(得男)을 위하여 문수보살상 등 8구의 불·보살상과 16구의 나한상, 천제석상(天帝釋像)을 조성하여 오대산 문수사(文殊寺)에 봉안했다는 내용이다.

이 성화(成化) 2년(1466) 조성발원문은 문수동자상의 조성 사실을 밝혀주는 자료로 생각되면서, 문수동자상이 1466년에 조선 세조(世祖)를 위해 상원사에 조성된 증거로 사용되고 있다.(홍윤식, 1984)

그러나 이 조상발원문이 상원사에 있는 문수동자상에서 나왔지만, 조성발원문에는 문수동자상에 대한 조성 기록이 아니라 문수보살상 등을 조성하였다는 내용만 있으며, 봉안된 사찰도 상원사가 아닌 오대산 문수사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수동자상이 세조를 위해서 1466년에 상원사에서 조성한 발원문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있다. 이에 의하면,『삼국유사』가 편찬된 고려시대 당시에도 상원사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는데, 하필 이 석탑기만을 문수사로 하였을 리가 없고, 『세조실록』에 의하면 조성발원문이 작성된 조선 세조 당시에도 계속 상원사로 불리워졌다는 점에서, 문수사가 상원사의 옛 이름이라 볼 수 없다고 한다. 특히 오대산 문수사는 『삼국유사』에 석탑기가 실려 있을 정도로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고찰이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편찬(1481)하기 불과 15년 전인 1466년에 세조의 딸에 의하여 불·보살상이 조성된 사찰인데, 이때 벌써 폐사되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편찬 때 누락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삼국유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연곡현 사람이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다가 문수사 석탑의 그림자 때문에 물고기를 잡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문수사를 해안에 위치한 사찰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문수사는 비록 오대산과 멀리 떨어진 강릉부 동쪽 해안에 위치했지만, 오대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있던 사찰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기된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박상국, 1984)

고려말 이곡(李穀)의 『가정집(稼亭集)』 권5 기(記) 동유기(東遊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강성(江城, 강릉)으로 나가 문수당(文殊堂)을 관람하였는데,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의 두 석상이 여기 땅속에서 위로 솟아나왔다고 한다. 그 동쪽에 사선(四仙)의 비석이 있었으나 호종단(胡宗旦)에 의해 물속에 가라앉았고 오직 귀부(龜趺)만 남아 있었다. 한송정(寒松亭)에서 전별주를 마셨다. 이 정자 역시 사선이 노닐었던 곳인데, 유람객이 많이 찾아오는 것을 고을 사람들이 싫어하여 건물을 철거하였으며, 소나무도 들불에 연소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오직 석조(石竈)와 석지(石池)와 두 개의 석정(石井)이 그 옆에 남아 있는데, 이것 역시 사선이 차를 달일 때 썼던 것들이라고 전해진다.”

이에 의하면 당시 한송정(寒松亭) 옆의 절 이름이 문수당(文殊堂)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불우(佛宇)조에는 문수사(文殊寺)가 부(府) 동쪽 해안에 있다고 하면서 이곡의 문장을 인용하였다. 이후 정조 23년(1799)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현재의 한송사라는 절 이름이 나와 있으니, 문수사에서 한송사로의 변환은 현 한송사지 근처에 위치한 한송정 때문으로 생각된다. 한송정은 옛 다구(茶具) 유적이 있던 곳으로 유명한 정자였으며, 문수사가 폐사되면서 사찰의 본래 이름보다 한송정 근처의 폐사지로 인식되어 한송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권보경, 2006)

현재 강원도 강릉시 남항진동에 위치한 한송사지 부근에는 작은 암자가 들어서 있으며, 탑재, 장대석, 추정 기단면석이 남아 있다. 유물로는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제124호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과 강릉시립박물관에 소장된 보물 제 81호 한송사지석불상이 있다. 이들 두 보살상은 지금은 없어진 중앙의 본존상과 함께 삼존불의 좌우 협시였거나, 적어도 같은 법당(法堂) 내에 함께 봉안되었던 보살상이라고 생각되는데,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에 나타난 문수와 보현일 가능성이 크다.(최성은, 1980)

참고문헌

한국불교연구원, 1977, 『月精寺 [附]上院寺』, 一志社.
권상로, 1979, 『韓國寺刹全書』 上卷, 동국대학교출판부.
최성은, 1980, 「溟州地方의 高麗時代 石造菩薩像에 대한 硏究」『佛敎美術』 5.
박상국, 1984, 「上院寺 文殊童子像 腹藏發願文과 腹藏典籍에 대해서」『韓國佛敎學』 9-1.
홍윤식, 1984, 「朝鮮初期 上院寺文殊童子像에 대하여」『考古美術』 164.
박용수, 1996, 『오대산』, 대원사.
권보경, 2006, 「고려전기 강릉일대 석조보살상 연구」『史林』 25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
臺山五萬眞身
<按>山中古傳 此山之署名 眞聖住處者 始自慈藏法師 初法師欲見中國五臺山文殊眞身 以善德王代 貞觀十年丙申[唐僧傳云十二年 今從三國本史]入唐 初至中國太和池邊 石文殊處 虔祈七日 忽夢大聖授四句偈 覺而記憶 然皆梵語 罔然不解 明旦忽有一僧 將緋羅金點袈<裟>一領 佛鉢一具 佛頭骨一片 到于師邊 問何以無聊 師答 以夢所受四句偈 梵音不解爲辭 僧譯之云 呵囉婆佐曩 是曰了知一切法 達imagefont哆佉嘢 云自性無所有 曩伽呬伽曩 云如是解法性 達imagefont盧舍那 云卽見盧舍那 仍以所將袈裟等 付而囑云 此是本師釋迦尊之道具也 汝善護持 又曰 汝本國艮方溟州界有五臺山 一萬文殊常住在彼 汝往見之 言已不現 遍尋靈迹 將欲東還 太和池龍現身請齋 供養七日 乃告云 昔之傳偈老僧 是眞文殊也 亦有叮囑創寺立塔之事 具載別傳 師以貞觀十七年 來到此山 欲覩眞身 三日晦陰 不果而還 復住元寧寺乃見 文殊云 至葛蟠處 今淨嵓寺是[亦載別傳] 後有頭陁信義 乃梵日之門人也 來尋藏師憩息之地 創庵而居 信義旣卒 庵亦久廢 有水多寺長老有緣 重創而居 今月精寺是也 藏師之返 新羅 淨神大王太子 寶川孝明二昆弟[按國史 新羅無淨神寶川孝明三父子明文 然此記下文云 神龍元年開土立寺 則神龍乃聖德王卽位四年乙巳也 王名興光 本名隆基 神文之第二子也 聖德之兄孝照名理恭 一作洪 亦神文之子 神文政明字日照 則淨神恐政明神文之訛也 孝明乃孝照一作昭之訛也 記云 孝明卽位 而神龍年開土立寺云者 亦不細詳言之爾 神龍年立寺者乃聖德王也] 到河西府[亦今溟州及有河西郡是也 一作河曲縣 今蔚州非是也] 世獻角干之家留一宿 翌日過大嶺 各領千徒 到省烏坪 遊覽累日 忽一夕昆弟二人 密約方外之志 不令人知 逃隱入五臺山[古記云 太和元年戊申八月初 王隱山中 恐此文大誤 <按>孝照一作昭 以天授三年壬辰卽位 時年十六 長安二年壬寅崩 壽二十六 聖德以是年卽位 年二十二 若曰太和元年戊申 則先於孝照卽位<壬>辰 已過四十五歲 乃太宗文武王之世也 以此知此文爲誤 故不取之] 侍衛不知所歸 於是還國 二太子到山中 靑蓮忽開地上 兄太子結庵而止住 是<曰>寶川庵 向東北行六百餘步 北臺南麓亦有靑蓮開處 弟太子孝明又結庵而止 各懃修業 一日同上五峰瞻禮次 東臺滿月山 有一萬觀音眞身現在 南臺麒麟山 八大菩薩爲首一萬地藏 西臺長嶺山 無量壽如來爲首一萬大勢至 北臺象王山 釋迦如來爲首五百大阿羅漢 中臺風盧山亦名地盧山 毗盧遮那爲首一萬文殊 如是五萬眞身一一瞻禮 每日寅朝 文殊大聖到眞如院 今上院 變現三十六種形 或時現佛面形 或作寶珠形 或作佛眼形 或作佛手形 或作寶塔形 或萬佛頭形 或作萬燈形 或作金<橋>形 或作金鼓形 或作金鐘形 或作神通形 或作金樓形 或作金輪形 或作金剛<杵>形 或作金甕形 或作金鈿形 或五色光明形 或五色圓光形 或吉祥草形 或靑蓮花形 或作金田形 或作銀田形 或作佛足形 或作雷電形 或(如)來湧出形 或地神湧出形 或作金鳳形 或作金烏形 或馬産師子形 或雞産鳳形 或作靑龍形 或作白象形 或作鵲鳥形 或牛産師子形 或作遊猪形 或作靑蛇形 二公每汲洞中水 煎茶獻供 至夜各庵修道 淨神王之弟與王爭位 國人廢之 遣將軍四人到山迎之 先到孝明庵前呼萬歲 時有五色雲 七日垂覆 國人尋雲而畢至 排列鹵簿 將邀兩太子而歸 寶川哭泣以辭 乃奉孝明歸卽位 理國有年[記云 在位二十餘年 盖崩年壽二十六之訛也 在位但十年爾 又神文之弟爭位事國史無文 未詳] 以神龍元年[乃唐中宗復位之年 聖德王卽位四年也]乙巳三月初四日始改創眞如院 大王親率百寮到山 營搆殿堂 幷塑泥像文殊大聖安于堂中 以知識靈卞等五員 長轉華嚴經 仍結爲華嚴社 長年供費 每歲春秋 各給近山州縣倉租一百石 淨油一石 以爲恒規 自院西行六千步 至牟尼岾古伊峴外 柴地十五結 栗枝六結 坐位二結 創置莊舍焉 寶川常汲服其靈洞之水 故晩年肉身飛空 到流沙江外 蔚珍國掌天窟停止 誦隨求陁羅尼 日夕爲課 窟神現身白云 我爲窟神已二千年 今日始聞隨求眞詮 請受菩薩戒 旣受已 翌日窟亦無形 寶川驚異 留二十日乃還五臺山神聖窟 又修眞五十年 忉利天神三時聽法 淨居天衆烹茶供獻 四十聖騰空十尺 常時護衛 所持錫杖 一日三時作聲 遶房三匝 用此爲鐘磬 隨時修業 文殊或灌水寶川頂 爲授成道記莂 川將圓寂之日 留記後來山中所行輔益邦家之事云 此山乃白頭山之大脈 各臺眞身常住之地 靑在東臺北角下 北臺南麓之末 宜置觀音房 安圓像觀音 及靑地畫一萬觀音像 福田五員 晝讀八卷金經仁王般若千手呪 夜念觀音禮懺 稱名圓通社 赤任南臺南面 置地藏房 安圓像地藏 及赤地畫八大菩薩爲首一萬地藏像 福田五員 晝讀地藏經金剛般若 夜(占)察禮懺 稱金剛社 <白>方西臺南面 置彌陁房 安圓像無量壽 <及>白地畫無量壽如來爲首一萬大勢至 福田五員 晝讀八卷法華 夜念彌陁禮懺 稱水精社 黑地北臺南面 置羅漢堂 安圓像釋迦 及黑地畫釋迦如來爲首五百羅漢 福田五員 晝讀佛報恩經涅槃經 夜念涅槃禮懺 稱白蓮社 黃處中臺<眞>(如)院中 安泥像文殊不動 後壁安黃地畫毗盧遮那爲首三十六化形 福田五員 晝讀華嚴經六百般若 夜念文殊禮懺 稱華嚴社 寶川庵改創華藏寺 安圓像毗盧遮那三尊及大藏經 福田五員 長<閱>藏經 夜念華嚴神衆 每年設華嚴會一百日 稱名法輪社 以此華藏寺爲五臺社之本寺 堅固護持 命淨行福田 鎭長香火 則國王千秋 人民安泰 文<武>和平 百穀豊穰矣 又加排下院文殊岬寺爲社之都會 福田七員 晝夜常行華嚴神衆禮懺 上件三十七員齋料衣費 以河西府道內八州之稅 充爲四事之資 代代君王 不忘遵行幸矣

(오)대산의 5만 진신(眞身)
산 중의 고전(古傳)을 살펴보면, 이 산을 참다운 성인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자장법사(慈藏法師)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 법사가 중국 오대산(五臺山)의 문수보살 진신(眞身)을 뵙고자 하여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 때인 정관 10년 병신(636)에[『당승전(唐僧傳)』에는 12년(638)이라고 했으나 여기서는 삼국본사(三國本史)를 따른다.] 당(唐)에 들어갔다. 먼저 중국 태화지(太和池)가의 문수보살 석상이 있는 곳에 이르러 7일 동안 정성스럽게 기도하였더니, 꿈에서 홀연히 대성(大聖)이 네 구절의 게(偈)를 주었다. 꿈을 깨니 기억은 하겠으나 모두 범어(梵語)라 망연하여 이해하지 못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갑자기 한 승려가 붉은 비단에 금점(金點)이 찍힌 가사(袈裟) 한 벌과 부처의 바리때 한 개,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의 곁에 와서는 어찌하여 근심하는지를 물었다. 법사가 답하기를, “꿈에 받은 네 구절의 게(偈)가 범어라 이해할 수 없어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승려가 그것을 풀이하여 말하기를, “‘가라파좌낭(呵囉婆佐曩)’은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는 말이요, ‘달예치구야(達imagefont哆佉嘢)’는 자성(自性)은 정해진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낭가사가낭(曩伽呬伽曩)’은 이와 같이 법성(法性)을 이해한다는 말이고, ‘달예노사나(達imagefont盧舍那)’는 곧 노사나불을 뵌다는 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가지고 온 가사 등을 맡기면서 부탁하기를, “이것들은 본사(本師)이신 석가세존의 도구인데, 그대가 잘 간직하시오.”라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그대의 본국(本國) 동북방 명주(溟州) 내에 오대산이 있는데, 1만의 문수보살께서 항상 거기에 머무르고 계시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라고 하고는 곧 사라졌다. (법사는) 영험한 유적들을 두루 찾아본 뒤 신라로 돌아오려 하였는데, 태화지의 용이 나타나 재(齋) 지내주기를 청하므로 7일 동안 공양하였다. 이에 (용이) 고하여 말하기를, “예전에 게(偈)를 풀이해 준 노승이 바로 진짜 문수보살이셨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절을 짓고 탑을 세우는 것을 간곡히 부탁한 일은 별전(別傳, 『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률조를 가리킴)에 자세히 실려 있다. 법사는 정관 17년(643) 이 산(오대산)에 이르러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뵈려고 하였으나 3일 동안 날씨가 어두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가, 다시 원령사(元寧寺)에 살면서 그때서야 비로소 (문수보살을) 뵈었다. 문수보살이 이르기를, “칡덩굴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하였으니, 지금의 정암사가 이곳이다.[역시 별전(『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률)에 실려 있다.] 후에 두타(頭陁) 신의(信義)는 범일(梵日)의 문인이었는데, 와서 자장법사가 쉬었던 자리를 찾아 암자를 짓고 거처하였다. 신의가 죽은 뒤 암자 역시 오래도록 폐하였다가 수다사(水多寺)의 장로인 유연(有緣)이 다시 짓고 거처하였는데, 지금의 월정사(月精寺)가 이것이다. 자장법사가 신라에 돌아왔을 때 정신대왕(淨神大王)의 태자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형제가[『국사(國史)』를 살펴보면 신라에는 정신․보천․효명 세 부자에 대한 글이 없다. 그러나 이 기록의 다음 글에서는 신룡(神龍) 원년(705)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하였는데, 신룡은 곧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즉위한지 4년(705)인 을사(乙巳)이다. 왕의 이름은 흥광(興光)이고 본명은 융기(隆基)이며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의 둘째 아들이다. 성덕왕의 형인 효조왕(孝照王, 재위 692-702)의 이름은 이공(理恭), 또는 이홍(理洪)이라고도 하는데, 역시 신문왕의 아들이다. 신문왕 정명(政明)의 자(字)는 일조(日照)이니 곧 “정신”은 아마도 신문왕 ‘정명’의 와전인 듯하다. “효명”은 곧 “효조” 또는 “효소(孝昭)”의 와전이다. 기록에서 효명이 즉위하였다고는 하였으나, 신룡 연간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한 것은 또한 자세한 말이 아니니, 신룡 연간에 절을 세운 사람은 성덕왕이었다.] 하서부(河西府)[또한 지금의 명주(溟州)에 하서군(河西郡)이 있으니 이것이다. 혹은 하곡현(河曲縣)이라고도 쓰는데, 지금의 울주(蔚州)는 이곳이 아니다.]에 이르러 세헌(世獻) 각간(角干)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이튿날 대령(大嶺)를 지나 각각 천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이르러 여러 날을 유람하였다. 어느 날 저녁 갑자기 두 형제는 속세를 떠나 불문에 들어갈 것을 몰래 약속하고는 아무도 모르게 도망하여 오대산에 들어가 숨었고,[고기(古記, 『삼국유사』 권3 탑상4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에는 “태화(太和) 원년(647) 무신 8월 초에 왕이 산속으로 숨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이 글이 크게 잘못된 듯하다. 살피건데, 효조왕 또는 효소왕은 천수(天授) 3년 임진(692)에 즉위하였는데, 그 해 나이가 16세였고, 장안(長安) 2년 임인(702)에 죽었으니 나이가 26세였다. 성덕왕은 이 해에 즉위하였으니 22세였다. 만약 태화 원년 무신이라고 말한다면 효조왕이 즉위한 임진년보다 빠른 것이니 이미 45년이나 지난 것으로, 곧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치세였다. 이로써 이 글이 잘못된 것을 알았으니 취하지 않는다.] 시위(侍衛)하던 자들은 따를 곳을 알지 못하여 이에 서울로 돌아갔다. 두 태자가 산속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푸른 연꽃이 땅 위에 피어나니, 형 태자가 (그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이를 보천암(寶川菴)이라고 하였다. 동북쪽으로 600여 보 가니 북대(北臺) 남쪽 기슭에도 역시 푸른 연꽃이 피어난 곳이 있어 아우 태자 효명도 (그곳에) 암자를 짓고 머무르며 각각 부지런히 불법을 닦았다. 하루는 함께 다섯 봉우리에 올라가 예불을 올리려고 하였는데, 동대(東臺)인 만월산(滿月山)에는 1만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진신(眞身)이 나타나 있었고, 남대(南臺)인 기린산(麒麟山)에는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地藏菩薩), 서대(西臺)인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북대(北臺)인 상왕산(象王山)에는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5백 대아라한(大阿羅漢), 중대(中臺)인 풍로산(風盧山), 다른 이름으로 지로산(地盧山)에는 비로자나(毗盧遮那)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文殊菩薩) 진신(眞身) 등이 나타나 있었다. 이와 같은 5만의 진신(眞身)에게 일일이 예불을 올리니 매일 아침 인시(寅時, 3시 30분-4시30분)에 문수보살이 진여원(眞如院), 지금의 상원(上院, 상원사)에 이르러서는 36가지의 형태로 변신하여 나타났는데, 어떤 때는 부처의 얼굴 형태로 나타나고, 혹은 보주(寶珠)의 형태, 혹은 부처의 눈 형태, 혹은 부처의 손 형태, 혹은 보탑(寶塔)의 형태, 혹은 만불(萬佛)의 머리 형태, 혹은 만등(萬燈)의 형태, 혹은 금교(金橋)의 형태, 혹은 금고(金鼓)의 형태, 혹은 금종(金鐘)의 형태, 혹은 신통(神通) 형태, 혹은 금루(金樓)의 형태, 혹은 금륜(金輪)의 형태, 혹은 금강저(金剛杵)의 형태, 혹은 금옹(金甕)의 형태, 혹은 금비녀의 형태, 혹은 오색광명(五色光明)의 형태, 혹은 오색원광(五色圓光)의 형태, 혹은 길상초(吉祥草)의 형태, 혹은 푸른 연꽃의 형태, 혹은 금전(金田)의 형태, 혹은 은전(銀田)의 형태, 혹은 부처의 발 형태, 혹은 뇌전(雷電)의 형태, 혹은 여래(如來)가 솟아나는 형태, 혹은 지신(地神)이 솟아나는 형태, 혹은 금봉황의 형태, 혹은 금까마귀 형태, 혹은 말이 사자를 낳는 형태, 혹은 닭이 봉황을 낳는 형태, 혹은 푸른 용의 형태, 혹은 흰 코끼리의 형태, 혹은 까치의 형태, 혹은 소가 사자를 낳는 형태, 혹은 노는 멧돼지의 형태, 혹은 푸른 뱀의 형태 등이었다. 두 태자는 매번 골짜기의 물을 길어와 차를 다려 공양하고, 밤이 되면 각각의 암자에서 도를 닦았다. 정신왕의 아우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투자 국인(國人)들이 그를 폐하고, 장군 넷을 산으로 보내 두 태자를 맞이하게 하였다. 먼저 효명암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니 이때 오색의 구름이 7일 동안 드리워져 덮었다. 국인들은 구름을 좇아 모두 이르러서는 의장을 벌여 열을 짓고 장차 두 태자를 맞이하여 돌아가고자 하였다. 보천은 소리내 울면서 사양하므로 이내 효명을 받들어 돌아와 즉위하게 하였다. 나라를 다스린 지 몇 해가 지나[기록에서 재위 20여 년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죽었을 때 나이인 스물여섯이 와전되어서일 것이다. 재위는 단 10년 뿐이었다. 또한 신문왕의 동생이 왕위를 다툰 일은 『국사(國史)』에 기록이 없으므로 알 수 없다.] 신룡 원년[곧 당(唐) 중종(中宗)이 복위한 해로, 성덕왕이 즉위한지 4년(705) 되는 해이다.] 을사 3월 초4일에 처음으로 진여원(眞如院)을 개창하였다. 대왕께서 친히 백료들을 거느리고 산에 이르러 전당(殿堂)을 만들어 열고, 아울러 문수보살상을 흙으로 빚어 건물 안에 안치하였다. 지식(知識) 영변(靈卞) 등 다섯 명으로 하여금 『화엄경(華嚴經)』을 매일 읽도록 하고, 이로 인하여 화엄사(華嚴社)를 결성하도록 하였다. 오래토록 공양할 비용은 매 해 봄․가을에 산에서 가까운 주․현의 창(倉)에서 조(租) 100석과 정유(淨油) 1석씩을 공급하도록 하여 항상 규칙으로 삼았고, 진여원에서 서쪽으로 6천보 떨어진 곳으로부터 모니점(牟尼岾)과 고이현(古伊縣) 바깥에 이르기까지의 시지(柴地) 15결과 밤나무 숲 6결, 좌위(座位, 전답) 2결로써 장사(莊舍)를 세우도록 하였다. 보천은 항상 그 신령스러운 골짜기의 물을 길어 마셨으므로 만년에 육신이 허공을 날아 유사강(流沙江) 밖 울진국(蔚珍國) 장천굴(掌天窟)에서 멈췄다. 수구다라니(隨求陁羅尼) 외기를 밤낮의 과업으로 삼았더니 굴의 신(神)이 몸을 드러내 말하기를, “나는 굴의 신이 된지 2천년이 되었지만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수구다라니의 참 도리를 들었으니 보살계(菩薩戒) 받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보살계를) 받고 난 다음날 굴 또한 형체가 없어지니, 보천이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20일을 머물고 난 뒤, 이내 오대산 신성굴(神聖窟)로 돌아왔다. 다시 도를 닦던 50년 동안 도리천(忉利天)의 신이 (하루에) 세 번 법을 들었고, 정거천(淨居天)의 무리들이 차를 다려 공양하였으며, 40명의 성중이 공중을 10척이나 날아 항상 호위하였다. 지니고 있던 석장(錫杖)은 하루에 세 번 소리를 내며 방을 세 바퀴 도니 이것으로 종(鐘)과 경(磬)을 삼아 때를 좇아 수행하였고, 때로는 문수보살이 보천의 이마에 물을 붓고 성도(成道)의 기별(記莂, 약속)을 주기도 하였다. 보천이 장차 입적하려고 하던 날, 뒷날 산중에서 행하는 것으로 나라에 도움을 주는 일들을 기록하여 남겼다. (기록에) 이르기를, “이 산은 곧 백두산의 큰 줄기로 각 대(臺)에는 (불보살들의) 진신(眞身)이 항상 거주하는 땅이다. 청색의 방위인 동대(東臺)의 북쪽 귀퉁이 아래, 북대(北臺) 남쪽 기슭 끝에는 마땅히 관음방(觀音房)을 두고, 원상(圓像)의 관음보살과 푸른 바탕에 1만의 관음보살상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으로는 5명을 두어, 낮에는 8권의 『금광명경(金光明經)』․『인왕경(仁王經)』․『반야경(般若經)』․『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를 읽게 하고, 밤으로는 관음예참(觀音禮懺)을 염송케 하며, 이름은 원통사(圓通社)라고 칭하도록 하여라. 적색의 방위인 남대(南臺)의 남쪽 면에는 지장방(地藏房)을 두고, 원상의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에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상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에는 『지장경(地藏經)』․『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읽게 하고, 밤에는 점찰예참(占察禮懺)을 염송하게 하며, 금강사(金剛社)라 칭하게 하여라. 백색의 방위인 서대(西臺)의 남쪽 면에는 미타방(彌陀房)을 두고, 원상의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와 흰색 바탕에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으로는 8권의 『법화경(法華經)』을 읽게 하고, 밤으로는 미타예참(彌陀禮懺)을 염송하게 하며, 수정사(水精社)라 칭하게 하여라. 흑색의 방위에 해당하는 땅인 북대(北臺)의 남쪽 면에는 나한당(羅漢堂)을 두고, 원상의 석가여래와 검은 바탕에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나한(五百羅漢)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에는 『불보은경(佛報恩經)』․『열반경(涅槃經)』을 읽게 하고, 밤에는 열반예참(涅槃禮懺)을 염송하게 하며, 백련사(白蓮社)라 칭하게 하여라. 황색의 방위에 위치한 중대(中臺)의 진여원 안에는 흙으로 빚은 문수부동(文殊不動)을 안치하고, 뒷벽에는 황색 바탕에 비로자나불을 우두머리로 한 36가지의 형태를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으로는 『화엄경(華嚴經)』․『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읽게 하고, 밤으로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염송하게 하며, 화엄사(華嚴社)라 칭하여라. 보천암은 화장사(華藏寺)로 개창하고 원상의 비로자나 삼존불과 『대장경(大藏經)』을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항상 『대장경』을 열람하게 하고, 밤으로는 화엄신중(華嚴神衆)을 염송하게 하여라. 매년 화엄회(華嚴會)를 100일 동안 베풀고, 이름을 법륜사(法輪社)라 칭하여라. 이 화장사를 오대사(五臺社)의 본사(本社)로 삼아 굳게 보호하고 지키며 행실이 정결한 복전승들에게 명하여 오래토록 향화를 받들게 하면, 국왕이 천추를 누리고 백성이 평안하며 문무가 화평하고 백곡이 풍요로울 것이다. 또한 더하여 하원(下院)의 문수갑사(文殊岬寺)를 열어 결사의 도회(都會)로 삼고 복전승 7명에게 밤낮으로 항상 화엄신중예참(華嚴神衆禮懺)을 행하게 하여라. 이상 37명의 재(齋)에 필요한 재료들과 의복의 비용은 하서부(河西府)의 도(道)에 속한 여덟 주(州)의 세금으로써 네 가지 일에 드는 비용으로 충당하여라. 대대로 군왕들이 잊지 않고 받들어 행한다면 다행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오대산문수사석탑기)
五臺山文殊寺石塔記
庭畔石塔 蓋新羅人所立也 制作雖淳朴不巧 然甚有靈響 不可勝記 就中一事 聞之諸古老云 昔連谷縣人 具舡沿海而漁 忽見一塔隨逐舟楫 凡水族見其影者 皆逆散四走 以故漁人一無所得 不堪憤恚 尋影而至 蓋此塔也 於是共揮斤斫之而去 今此塔四隅皆缺者以此也 予驚嘆無已 然怪其置塔 稍東而不中 於是仰見一懸板云 比丘處玄 曾住此院 輒移置庭心 則二十餘年間 寂無靈應 及日者求基抵此 乃嘆曰 是中庭地 非安塔之所 胡不移東乎 於是衆僧乃悟 復移舊處 今所立者是也 余非好怪者 然見其佛之威神 其急於現迹利物如此 爲佛子者 詎可黙而無言耶 時正<隆>元年丙子十月日 白雲子記

오대산 문수사석탑기
뜰 가의 석탑은 아마 신라 사람이 세운 것 같다. 제작은 비록 순박하여 정교하지는 못하나 매우 영험이 있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그중에서도 한 가지 일을 여러 옛 노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옛날 연곡현(連谷縣) 사람들이 배를 타고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탑 하나가 나타나서 배를 따라오는데 모든 물속의 동물들이 그 그림자를 보고 모두 흩어져 달아나니, 이 때문에 어부들은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어부들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그림자를 찾아가보니 이 탑이었다. 그래서 함께 도끼를 휘둘러 그 탑을 쳐부수고 가버렸는데, 지금 이 탑의 네 귀퉁이가 모두 떨어진 것은 이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 말에) 놀라고 감탄해 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탑의 위치가 조금 동쪽에 있고 중앙에 있지 않음을 괴이하게 여겨, 이에 현판 하나를 쳐다보니 거기에 이르길, “비구(比丘) 처현(處玄)이 일찍이 이 절에 있으면서 문득 탑을 뜰 한 가운데로 옮겼더니 (그 후) 20여년 동안 잠잠하여 아무런 영험이 없었다. 일자(日者)가 터를 구하여 이곳까지 와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뜰 가운데는 탑을 안치할 곳이 아닌데 어째서 동쪽으로 옮기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스님들이 깨닫고 다시 옛 자리로 옮겼으니 지금 서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나는 괴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나, 부처님의 신령한 위엄을 보건대 그 자취를 나타내어 만물을 이롭게 함이 이와 같이 빠르니, 불자(佛子)된 사람으로서 어찌 잠자코 말하지 않겠는가? 때는 정륭(正隆) 원년(1156) 병자 10월 일(日)에 백운자(白雲子)가 기록한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