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기구

농기구

[ 農器具 ]

농사를 짓는 데 쓰이는 도구로, 한국에서 농경이 시작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이다. 처음에는 간단한 도구를 이용하다가 점차로 다양한 농기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돌이나 뼈로 만든 선사시대 농기구는 철제농기구와는 달리 형태만으로 정확한 용도를 추정하기 곤란하고 또한 여러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도 많기 때문에 정확한 기능과 명칭을 부여하기 어렵다.

신석기시대 농기구로는 뒤지개(掘棒), 돌(뿔)괭이, 돌삽(石揷), 돌보습(石참), 곰배괭이 등의 굴지경작구(掘地耕作具)와 돌낫(石鎌),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등의 수확구(收穫具), 갈판(碾石), 갈돌(石棒), 공이(杵) 등의 제분구(製粉具)가 알려져 있다. 뒤지개나 뿔괭이는 뾰족한 끝을 이용하여 땅 속의 식물이나 그 뿌리를 캐고 씨앗구멍을 내는데 사용했다. 돌괭이, 돌보습, 돌삽 등은 명칭과 기능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므로 석제 굴지구로 명칭을 통일하거나, 아니면 굴봉 또는 뒤지개의 발전적 형태인 (외날)따비(따비)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주로 동북지방에서 유행하는 곰배괭이는 어깨가 뚜렷하고 날 폭이 넓은 괭이형 석기를 지칭하는데 자루를 묶는 방법에 따라 호미·괭이, 또는 따비·삽의 용도로 이용될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는 석제 굴지구가 급격히 줄어들지만 자귀(手斧), 대패날(刃), 돌끌(石鑿) 등 목제 가공용 도구의 종류와 수량이 크게 늘어나는 점으로 미루어 많은 농기구가 나무로 만들어진 것 같다. 실제로 금릉 송죽리 유적에서 나무괭이(木곽)가 출토되었고, 시대는 떨어지지만 B.C. 1세기대의 신창동 유적에서 각종 목제 농기구가 출토된 바 있다. 전(傳) 대전 출토 농경문청동기(農耕文靑銅器)에는 쌍날따비(兩刃뢰사)로 밭고랑을 만들고 괭이를 쳐들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쌍날따비의 끝 부분에 쇠날을 끼웠다는 견해도 있으나 이 청동기가 만들어진 B.C. 4-3세기대는 아직 철기가 보급되기 전이며 새겨진 형태로 보아서도 전체가 나무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따비와 괭이는 선사시대 갈이 연장을 대표하며 청동기시대에는 쌍날따비가 출현하였음을 농경문청동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돌낫(石鎌)은 신석기시대부터 출토되어 청동기시대까지 계속된다. 신석기시대의 돌낫은 등과 날이 같은 방향으로 약간 휜 장방형이 주로 나타나며 청동기시대의 낫은 요즘 낫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신석기시대에는 뼈로 만든 낫도 나타난다. 청동기시대에는 이삭을 따서 수확하는 반달돌칼이 성행하며 돌낫은 출토 빈도가 적어 수확구보다는 잡초를 베거나 잔가지를 치는 일반적인 낫의 용도가 더 컸을 것이다. 갈판(碾石)과 갈돌(石棒)은 나무열매나 곡물의 껍질을 벗기고 가루로 만드는데 사용한 원시적 방아연장이다.

신석기시대의 갈판과 갈돌은 도토리 같은 야생견과류의 집중적 이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후 농경이 시작되면서 곡물 가공에도 이용되지만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차츰 줄어들다가 철기시대에는 거의 자취를 감춘다. 갈판과 갈돌의 소멸은 돌확, 절구와 시루의 출현에서 비롯된다. 청동기시대부터는 나무로 만든 절구와 공이가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철기시대에는 청천강 이북과 요동지역에서는 농기구가 완전히 철기화되지만 청천강 이남에서는 철제 농기구의 종류는 한정되고 여전히 목제 농기구가 주류를 이룬다. 예를 들어 B.C. 1세기대의 광주 신창동 저습지유적에서는 직병(直柄)의 나무괭이와 직병(直柄)·곡병(曲柄)의 쇠스랑형 나무괭이 등의 갈이 연장과 절구공이, 낫자루, 도끼 및 자귀 자루 등 많은 목제 도구들이 다양한 종류의 목제 생활용구와 함께 출토되었다. 나무괭이와 나무 쇠스랑(鐵搭)은 논에서 흙덩이를 부수거나 점성이 강한 땅을 고르는데 이용되었으며 철제 농기구가 보급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와 같은 지형에서는 목제 농기구가 사용되었다. 나무괭이는 날이 넓은 형식이 주로 발견되어 당시 저습지에서 점성이 강한 흙은 간단한 목제 농기구로 기경, 쇄토하는 작업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천강 이남에서도 B.C. 2세기 이후부터는 쌍날따비의 날부분에 주조철부(鑄造鐵斧)나 철착(鐵鑿)을 끼워 사용하기도 하였다. 주조철부는 ‘주조괭이’라고도 불리는데 날의 마모상태나 재질의 취약성, 그리고 항상 2점이 쌍으로 공반되는 점을 고려하면 공구보다는 나무자루의 장착방법에 따라 쌍날따비나 쌍날괭이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에서도 이러한 기능의 다양성을 고려하여 이 철기를 ‘곽(곽)’으로 호칭한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는 점차 수확구가 쇠낫으로 전환되며 남부지방에서는 외날따비도 드디어 철기화된다. 외날따비(單刃뢰사)는 몸통의 길이에 비해 폭이 좁게 생긴 형태로서 단면은 마름모꼴에 가깝고 몸체와 투겁부분의 각도가 120-170˚정도인 것이 많다. 외날따비는 흙을 깊이 파서 뒤집어엎기는 곤란하지만 파종구를 만들고 땅을 가는 데에 사용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외날따비는 철기시대 무덤유적에서 주로 출토되며 재래농구인 주걱형따비의 시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철기시대의 농경구도 따비와 괭이가 중심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U자형삽날(U字形揷刃)은 평면형태가 ‘U’자형을 나타내어 붙여진 이름인데 목제 농구의 날 끝에 쇠날을 끼워 사용한 갈이연장이다. 날과 나무자루가 평행하게 연결되면 삽, 가래나 따비로 사용될 수 있고 날과 자루가 직각으로 연결되면 화가래나 괭이로도 사용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에 초(楚)나라에서 출현한 후 주변지역으로 전파되어 한대(漢代)에는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로 들어온다. 북한에서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출현하나 남한에서는 A.D. 3세기 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주로 4세기 대 이후 삼국시대 유적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다.

남한에서는 3-4세기경부터 수리시설이 축조되고 ‘U’자형삽날과 더불어 고무래, 쇠스랑 등의 새로운 농기구가 출현하면서 농업기술사상에서 새로운 변화가 야기된다. 고무래(팔)는 무안 양장리 유적에서 출토되었는데 몸체 중앙의 장방형 구멍을 통해 자루와 연결되고 날은 모두 29개가 촘촘히 만들어졌다. 고무래는 갈아진 논의 표면을 평탄하게 갈고 고르는 작업에 이용된 농기구이다. 쇠스랑(鐵搭)은 3개의 발이 하나의 자루에 연결되는 형태로 흙을 부수고 고르는 농기구로 사용되었다. 이전 철기시대에도 나무로 만든 쇠스랑형 괭이가 있었는데 이것이 철기화된 것이다. ‘U’자형삽날과 쇠스랑은 가벼우면서도 흙에 대한 저항력이 낮고 강인하기 때문에 밭작업 뿐만 아니라 논농사에서 작업 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4세기 이후가 되면서 점차 따비가 소멸되고 쇠호미(鐵鋤), 쇠보습날이 새로이 등장한다. 네모날 부분에 나무자루를 끼우기 위한 가늘고 긴 투겁부분이 평행하게 연결된 형태의 살포는 한강 이북의 고구려 영역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어 남부지방의 독특한 농기구로 생각된다. 살포는 물꼬를 막거나 트는 기능과 함께 고랑이나 이랑의 잡초를 전진하면서 미는데도 사용되었다고 하나 구체적인 기능에 대해서는 좀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쇠보습(鐵참)은 쟁기의 날 부분에 장착된 것이다. 고구려는 후한(後漢)대부터 중국을 통해 쟁기 기술을 도입하였고 4세기경부터는 고구려의 토양에 맞는 고구려식 보습을 제작하였다. 신라는 고구려보다 쟁기농사의 도입이 늦은 것으로 보이는데 늦어도 6세기경에는 변경지역까지도 소를 이용한 쟁기농사가 확산된다. 삼국시대의 쟁기는 재래의 극쟁이날과 비슷한 무상리(無床梨)가 유행하였다. 선사시대의 주요 농구인 따비의 전통이 삼국시대의 무상리(無床梨)로 연결된 것이다.

통일신라시대가 되면서 쟁기에 볏이 달려 깊이 갈이를 가능하게 하고, 호미도 이전의 장병서(長柄鋤)에서 오늘날의 호미와 비슷한 형태로 바뀌며, 낫도 자루까지 쇠로 제작된다. 이와 같이 통일신라시대에는 철제 농기구에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면서 이때 완비된 철제농기구의 종류와 형태가 그대로 조선시대까지 연결된다.

참고문헌

  • 새천년특별전-겨레와 함께 한 쌀-(국립중앙박물관, 2000년)
  • 철제생산력의 발전단계와 전쟁의 양상(김재홍, 백제사상의 전쟁, 서경문화사, 2000년)
  • 한국 고대의 생산과 교역(이현혜, 일조각, 1998년)
  • 신라시대의 농기구(김광언, 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 1987년)
  • 한반도 선사시대 출토 곡류와 농구(지건길·안승모, 한국의 농경문화, 경기대학교박물관, 198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