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시대 무덤

철기시대 무덤

[ 鐵器時代 墓 ]

철기시대는 한반도 서북부에 한(漢)의 변군인 낙랑군이 자리잡고 있고, 그 이북에는 고구려가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 중에 있었다. 또 한반도 동북에는 예인(예人)들의 소국이 있었고 한강 이남지역에는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 등 삼한의 소국들이 산재해 있었던 시기이다. 낙랑지역에는 한(漢)의 덧널무덤(木槨墓) 계통이 이 지역 토착묘제인 널무덤(木棺墓)과 결합되거나, 아니면 중국식 덧널무덤(木槨墳)이나 벽돌무덤(塼築墳)이 이식되어 성행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고구려를 포함하여 한강유역에 이르기까지 예맥(濊貊)의 땅에는 중국식 묘제의 영향을 받지 않고 토착묘제인 돌무지무덤이나 널무덤이 무덤양식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한반도 남부의 삼한지역에서도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움무덤(土壙墓)이 돌돌린움무덤(圍石土壙墓), 돌무지움무덤(積石土壙墓), 널무덤(木棺墓) 등으로 원삼국시대 초기까지 그 형태에 있어서 다양한 변형을 보이지만, 이후에는 점차적으로 낙랑지역 덧널무덤의 형식을 수용하는 경향이다. 대개 진·변한지역에서는 수장들의 권력이 성장하면서 껴묻거리(副葬品)의 양이 늘어나고 무덤의 규모도 확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됨으로써 낙랑식 덧널무덤이 채용된다. 그래서 초기형의 덧널무덤은 대형무덤에만 사용되고 소형무덤은 여전히 널무덤이 사용되는 경향을 보여주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형묘들도 덧널무덤를 모방하게 된다.

마한지역에서도 원삼국시대 전기에는 널무덤 계통이 주된 무덤양식이다. 진·변한지역에서처럼 덧널무덤으로의 전환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마한지역의 특징이다. 즉 천안 화성리 고분군과 같이 널무덤이 4세기대까지 주묘제로 사용되기도 하고 청당동(淸堂洞) 고분군에서는 널무덤이 서서히 발전하여 덧널무덤으로 변화되어가는 양상을 보인다.

마한지역 원삼국시대 무덤 중에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묘제가 나타나 그 전통이 삼국시대 이후까지 지속되기도 하는데 이른바 주구묘(周溝墓)나 분구묘(墳丘墓)와 같은 것이 그 예이다. 주구묘란 청당동 고분군에서 보는 것 같이 매장시설을 중심으로 봉분 가장자리에 일종의 배수시설과 같은 도랑을 돌린 것이다. 그리고 분구묘는 매장시설을 만들고 봉분을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일정한 형태의 성토(盛土)를 하여 봉분을 조성하고 그 안에 매장시설을 만드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독특한 무덤 축조방법은 서로 결합되기도 하면서 한강유역으로부터 전라도 지방에 이르기까지 마한의 영역에 넓게 퍼져 있었던 것 같다.

참고문헌

  • 韓國考古學槪說 -第三版-(金元龍, 一志社, 198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