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장리 유적

양장리 유적

[ 務安 良將里 遺蹟 ]

지역 무안
환호집락 전경

환호집락 전경

수리시설 전경

수리시설 전경

전남 무안군 몽탄면 양장리 도림산 마을 일대에 위치한다. 이 유적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90년 목포대학교박물관 주관으로 실시한 지표조사 과정을 통해서이다. 양장리 유적은 지표조사 결과 삼국시대의 유물산포지로 성격이 알려진 이후, 유적의 범위 내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건설공사(고속도로·철도 신설)에 관련하여 그 동안 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바 있다. 발굴조사는 1994·96·98년에 각각 실시되었다.

1차 발굴조사는 서해안고속도로(무안-목포간) 공사가 착공됨에 따라 1994년도에 이루어졌다. 발굴기간은 1994년 4월 25일부터 9월 25일까지 약 5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예상치 못했던 저습지 유적이 확인됨에 따라 조사기간을 12월 16일부터 그 다음 해인 1995년 5월 16일까지 추가 연장하여 총 10개월에 걸친 기간이 소요되었다.

1차 발굴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양장리 유적의 성격을 정리하면 청동기시대로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생활유적들이 지속적으로 이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발전·소멸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A.D. 3-5세기대를 중심으로 하는 상당수의 주거지와 농경관련 수리시설 등이 어우러진 복합유적임을 알 수 있었다.

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유구는 백제시대 수혈주거지 24기, 수혈유구 8기, 환호와 같은 성격을 띠는 인공수로, 그리고 저습지에서 확인된 농경관련 수리시설 등과 통일신라시대의 지상건물지와 팔각건물지 등이 있다. 백제시대 수혈주거지는 산사면부와 곡간평지부에 고르게 분포되어 확인되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방형(方形)계통과 원형(圓形)계통으로 나누어지는데, 방형계통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주거지 내부에는 벽면 한쪽 편에 치우쳐 화덕시설을 만들었으며, 벽면 아래를 따라 도랑(壁溝) 등을 구축한 경우도 확인되었다.

양장리 주거지는 3단계의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주거구조가 변화되었다. 제1단계는 네 벽면 아래에 벽구를 두른 방형계통의 주거지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반면, 제2단계에 접어들어서는 네 벽면 가운데 일부 벽면 아래에만 벽구시설을 갖추거나, 벽구시설을 갖추지 않는 방형계통과 원형계통의 주거구조가 등장한다. 이후 3단계에 이르러서는 벽 모서리 부분에 배수로를 만든 방형계통의 주거구조가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은 주거구조의 변화는 유물상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3단계에 가까워질수록 각 주거지에서 소유하는 토기의 기종이나 수량 등이 점차 증가한다는 점이다. 특히 3단계에 들어서 주목되는 것은 94-9호 주거지의 규모나 구조가 동일한 단계에 속하는 주거지들에 비해 차별화되어, 당시 사회구조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주거지 출토유물은 바리모양(鉢形)토기, 긴독모양토기, 시루, 항아리모양토기 등이 대부분이나 구멍뚫린입큰항아리, 뚜껑접시 등도 함께 수습되었다. 한편 주거지에 인접되어 확인된 인공수로는 그 성격이 환호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 곡간평지부에서 확인되고 있는 주거지 주변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수로는 처음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되었으나 이후 인위적으로 개축되어 주거생활 등에 이용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그 기능 가운데 하나는 저습지 지역으로부터 역류해 들어올 수 있는 물로부터 주거공간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수로 내부에서는 100개체 이상의 토기류와 함께 석기, 목기 등이 출토되었으며, 말목구조물 등이 확인되었다.

저습지는 가지구 산사면부의 경사변환 지점에서 조사되었다. 저습지 범위는 약 280㎡로 이제까지 발굴조사된 저습지 관련 유적 가운데에서는 최대 범위로 알려져 있다. 저습지 조사에서는 농경활동과 관련된 둑보강 말목열을 비롯한 목열구조물들이 확인되었고 농구를 비롯한 생활용구와 건축부재 등의 목제유물이 약 200여 점 이상 출토되었으며, 토기편과 석기 등도 일부 수습되었다. 또한 저습지에서는 볍씨를 비롯한 복숭아씨, 박씨 등의 식용식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유구로는 지상건물지와 팔각건물지를 들 수 있다. 지상건물지는 백제시대 수혈주거지가 조사된 지역과는 일정한 공간을 두고 떨어져 형성된 채 군집을 이루고 있다. 팔각건물지는 적심석을 평면 팔각형으로 놓은 형태로서 규모는 직경 5.6m 정도이다. 출토유물은 고배를 비롯한 뚜껑, 접시, 기와류 등이 있다.

2차 발굴조사는 1차 발굴조사에서 가지구로 명명되었던 속칭 ‘검(수)등’의 산사면부가 토지변경 공사로 인해 훼손됨에 따라 1996년 2월 10일부터 2월 24일까지 약 15일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지역은 1차 발굴조사 과정에서 백제시대 수혈주거지 4기와 수혈유구 1기가 조사되었던 곳으로 1차 조사과정에서 확인된 유구와는 북서쪽으로 약 85m 정도 떨어져 있다. 2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구는 백제시대 수혈주거지 13기, 수혈유구 5기이다. 1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수혈주거지와 거의 동일한 시기에 축조된 주거지에서는 대체적으로 1차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과 동일한 양상을 보여주었으며, 박자(拍子)와 같은 토기제작 도구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3차 발굴조사는 철도 복선화(무안-일로간) 공사가 착공됨에 따라 1998년도에 이루어졌다. 발굴기간은 1998년 7월 7일부터 10월 14일까지 약 3개월에 걸쳐 실시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에 해당하는 수혈주거지 34기를 비롯하여, 창고용 부속시설과 폐기용 구덩이 등으로 파악되는 수혈유구 5기가 확인되었다. 수혈주거지는 1·2차 조사에서 확인된 수혈주거지들과 구조면에서나 출토유물상에서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축조시기 또한 거의 일치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3차 발굴조사에서는 주거지 내부에서 다량의 탄화미들이 수습되었다. 그밖에 저습지역이 다시 추가 확인됨에 따라 양장리 일대의 저습지 분포범위를 파악하게 되었다.

이제까지 3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발굴조사를 토대로 살펴볼 때 양장리 유적은 청동기시대로부터 일정 규모의 생활유적들이 유적 주변부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으며, 특히 A.D. 3-5세기대에 이르러서는 주거지 주변으로 인공수로가 둘러진 대규모 취락지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토기를 자체 제작하여 사용하였으며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한 후 주변 지역과 교류활동을 전개하는 생활상을 지닌 집단임을 알 수 있었다.

참고문헌

  • 務安 良將里遺蹟 發掘中間報告(木浦大博物館, 1998년)
  • 務安 良將里 遺蹟(李榮文 外, 木浦大博物館, 199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