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복

의복

다른 표기 언어 dress , 衣服

요약 몸을 가리거나 외모를 꾸미기 위해 입는 물건의 총칭.

목차

펼치기
  1. 서양의 의복
    1. 개요
    2. 고대
    3. 비잔틴 시대
    4. 중세 전기(8~11세기)
    5. 중세 후기(12~14세기)
    6. 근세
    7. 근대
    8. 현대
  2. 동양의 의복
    1. 개요
    2. 중국
    3. 일본
    4. 남아시아
  3. 한국의 의복
    1. 개요
    2. 상대복식
    3. 삼국시대
    4. 통일신라시대
    5. 고려시대
    6. 조선시대

성별, 문화, 지리적 위치,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데 언제, 어떻게, 왜 이것을 착용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사람이 의복을 착용하게 된 동기로는 신체보호·장식·정숙성 등 3가지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이 3가지 동기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먼저이며, 가장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가장 오래된 의복의 증거는 러시아에서 발견되었으며, 약 2만 5,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모스크바 북쪽에서 발견된 여러 무덤들에서는 인체의 뼈대가 포유동물의 상아 구슬 수천 개에 의해 덮여져 있었는데, 이 구슬은 가죽옷에 달려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의 동굴에서 뼈로 만든 바늘이 발견되어 바늘 없이는 만들 수 없는 가죽옷의 존재를 추정케 하고 있다. 초기의 의복은 주로 동물가죽 같은 유기물이 중심이었다.

서양의 의복

개요

의복은 그 시대의 정신과 예술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 면에 의해 영향을 주고받는다.

19세기초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이기 위한 일러스트가 고안되어 새로운 착상들이 빨리 전달될 수 있었고 이는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복식사를 볼 때 어떤 스타일은 사라져버리는 반면, 어떤 스타일은 계속해서 다시 유행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16세기 파딩게일로 대표되는 버팀살을 넣어 퍼지게 한 스커트는 18세기초에 다시 나타났고, 1850년대에 크리놀린으로 잠시 유행했다.

1920년대의 허리선이 내려간 짧은 스커트는 1960년대에 다시 유행했다. 복식이란 용어는 흔히 생각되는 셔츠·스커트·바지·재킷·코트 뿐만 아니라 모자·잠옷·운동복·코르셋·장갑·신발류도 포함한다. 그외에 각 시대마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머리형·턱수염·콧수염·가발 및 화장품과 보석도 복식 유행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의 의복구성과 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주는 복식사를 이해하는 것은 미래의 의복을 예견하는 데 도움을 준다.

고대

서양 의복의 역사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는데 BC 3500~2000년에 메소포타미아의 남자와 여자는 랩 스커트(wrapped skirt)와 숄, 또는 술이 달린 옷을 주로 입었다.

랩 스커트(wrapped skirt)
랩 스커트(wrapped skirt)

BC 800~600년에 아시리아의 남녀는 재단하여 바느질한 튜닉을 술이 달린 과 함께 착용했다.

고대 지중해 연안의 다른 문명발생지보다 이집트 복식에 대한 정보는 비교적 풍부하다. 같은 시기의 메소포타미아인·이집트인·크레타인은 상호간의 복식 스타일에 있어서 영향을 별로 주고 받지 않았다. 고왕국과 중왕국시대에 이집트 남자들은 다양한 길이와 스타일의 랩 스커트를 입은 반면, 여자들은 시스 가운(sheath gown)을 입었다.

신왕국시대에는 얇은 주름을 많이 잡은 형태의 옷을 남녀가 같이 입었다. 대부분의 의복은 흰 리넨으로 만들었고, 다양한 모양과 색채장신구를 사용했다. 남녀 모두 가발, 접은 머리헝겊, 구슬로 만든 칼라를 착용했다.

크레타와 미케네 문명에서는 재단하여 바느질한 복잡한 의복을 입었다. 여성의 의복은 다른 고대의 복식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상의는 화려하게 장식하여 유방이 노출되도록 했고 허리는 넓은 벨트로 졸라맸다. 하의는 폭이 넓어지는 주름 잡힌 스커트를 착용했다. 남자들은 흔히 군장을 하고 가죽옷을 입었으며 전시에는 사람의 이와 털로 장식한 헬멧을 썼다. 이러한 군장은 그리스·로마에 계승되어 발전했다(미노아 문명, 에게 문명).

그리스의 의복은 육체의 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드레이프와 부드러운 천의 주름이 율동감과 리듬감을 주고, 옷을 입는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화를 준 데 특색이 있다.

그리스인의 공통되고 주된 의복은 리넨이나 모직으로 만든 키톤으로, 이것은 솔기가 없는 직4각형의 천을 어깨에 두르고 피불라(fibula)로 각 어깨를 고정시킨 것이다(키톤). 그 위에 벨트를 매기도 했다. 겉옷으로는 남녀 모두가 히마티온을 입거나 짧은 망토 같은 클라미스를 입었다(헬레니즘 시대).

로마인의 복식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반도문화를 선도한 에트루리아인의 복장을 알아야 한다.

이들 의복의 기본은 소아시아계의 튜닉과 그리스계의 키톤 및 숄이었다. 그리스 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숄형의 망토나 반월형의 케이프식 망토는 에트루리아인 고유의 조형감각 건축에 있어서도 아치형과 같은 새로운 형태를 창조했다. 이러한 에트루리아의 경향은 로마의 의복에 영향을 주었다.

로마 의복의 큰 특징은 사회적·직업적 신분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로마의 시민복인 토가는 그리스의 키톤에 해당되는 것으로 에트루리아인에 의해 이탈리아에 소개되었다(토가). 이것은 남녀가 모두 입었으며, BC 2세기경부터 발달하여 안에 받쳐 입던 튜니카를 완전히 둘러쌀 정도로 커졌다. 또한 옷의 색상과 가장자리에 대는 장식도 감는 방법과 착용자의 직위에 따라 달랐다.

일반인들은 간단한 흰색 토가를 입었고, 황제 또는 상류계급 사람들은 클라부스(clavus)라는 자주색 띠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토가를 착용했다. 토가의 크기가 너무 커지면서 평상복으로 입기에는 불편하여 의식 때만 입고, 대신 토가 밑에 입던 튜니카를 평상복으로 입게 되었다. 튜니카는 그리스의 도리스식 키톤이 변형·발달된 것으로 원피스 형태이다. 그리스의 히마티온이 계승된 것으로 여자가 입는 것을 팔라(palla)라고 했고, 남자가 입는 것을 팔리움이라고 했는데, 그리스의 것이 직4각형인 데 비해 로마의 것은 반원형이었다(팔리움). 이것은 히마티온보다 훨씬 크고, 장식이 육중하고 복잡하며 모직물로 만들어서 왼쪽 어깨에 걸침으로써 오른팔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했다.

그리스의 키톤을 로마에서는 스톨라라고 했다. 남자들이 주로 튜니카를 많이 입었던 반면, 여자들은 튜니카보다 넓은 스톨라를 입었다. 로마 시대에 주로 사용된 옷감은 모직물·리넨·견직물 등이었다. 신발은 계급에 따라 차이가 있었으며, 주로 샌들을 신었다 .

비잔틴 시대

비잔틴 시대의 의복은 유럽과 동방의 영향이 융합되어 독특했으며, 남녀 모두 긴 소매가 달린 로마 스타일의 튜닉과 그 위에 팔루다멘툼이라는 반원형의 망토를 입었다.

이 망토는 오른쪽 어깨를 보석으로 고정했고, 앞면에는 권위를 상징하는 클라부스를 댔다. 성직자가 입던 달마티카는 십자형의 천 가운데에 구멍을 내어 머리가 들어갈 수 있게 하고, 소매 밑과 양옆을 꿰맨 형태였다.

직물은 동양에서 들여온 견이나 리넨을 사용하고, 다마스크·브로케이드 등과 함께 자수 및 보석(특히 진주)을 많이 썼다. 이 시대에는 그리스도교의 금욕적이고 권위적인 영향으로 몸을 노출시키지 않았으나, 그후의 서양 의복은 점차 몸을 노출시키거나 몸매를 강조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중세 전기(8~11세기)

이 시기의 기본 의복은 튜닉·맨틀·양말·베일·모자였다.

남녀 모두 속에는 언더튜닉, 겉에는 튜닉을 입었으며 그 위에 맨틀을 걸쳤다. 남자는 하의로 속바지와 겉바지를 입고 긴 양말·삭스·페둘(양말과 부츠의 결합물)을 신거나 레그밴드를 착용했다. 10세기의 남자옷은 몸에 꼭 맞게 재단되기 시작하여 12세기에는 몸의 선을 강조하는 스타일로 변했다.

11세기초에는 상체가 꼭 맞고 소매끝이 넓으며, 스커트 부분이 길고 넓은 블리오라는 튜닉을 입기 시작했다.

중세 후기(12~14세기)

중세 후기의 유럽은 약 200년간에 걸친 십자군 원정의 결과 전환기를 맞이했다.

12세기에 유행한 것은 로마네스크 스타일로서 얇고 부드러운 직물의 스커트 부분은 화사한 드레이퍼리의 미를 살렸다. 그러나 12세기초에는 전(前) 세기에 대한 반동과 흑사병의 재난으로 인해 의복이 소박하고 헐렁했다. 그후 13세기 후반에는 다시 인체의 윤곽을 드러내는 옷을 입게 되었다. 13세기의 새로운 옷으로는 서코트를 들 수 있다. 14세기에는 색이 다른 옷과 문장복이 유행했으며, 15세기에는 남녀 모두 우플랑드(소매와 폭이 훌렁훌렁하고 두꺼운 나사 외투)를 입었다(르네상스).

서코트
서코트
근세

16세기 의복의 특징은 슬릿(소매·옆구리 등의 튼 곳), 날개 모양의 어깨장식, 퍼프(puff) 장식 등이다.

또한 지금까지 길이를 강조하던 유행이 부피로 옮겨져, 옆으로 벌어지고 당당한 위엄을 보여주는 로브(robe)를 입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여성들은 파딩게일을 입어 스커트를 부풀렸다(후프 스커트). 17세기에는 바로크 스타일이 유행하여 보다 부드럽고 넉넉한 복장이 등장했다.

이 시대 여성복의 종류로는 드레스와 페티코트, 그 속에 입는 슈미즈, 몸매를 다듬기 위한 코르피크(corps-pique) 등이 있다. 여성의 의복에 부드러움이 강조되다가 17세기 후반에 다시 꼭 끼는 형이 유행한 반면, 남성의 의복은 계속 기능적으로 간편해졌다. 18세기에 루이 15세의 정부 퐁파두르와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유행의 선두주자로서 그들의 복장은 프랑스를 거쳐 유럽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로코코 스타일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복식은 여성적인 우아한 요소가 가미되어 허리는 코르셋으로 건강을 해칠 정도로 조이고, 스커트는 파니에(panier)라는 버팀대를 사용하여 넓게 했으며, 머리는 크고 높게 장식했다.

이때는 특히 흰색이나 회색으로 분칠한 머리가 유행했다. 기본적인 남성복 형태는 17, 18세기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으나 시대의 취향이 반영되어 여성복처럼 허리가 약간 들어가고 밑단으로 가면서 퍼져나가는 실루엣으로 변했다. 한편 영국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의복은 그 형태가 간단해져 기능성이 강조되었으며, 여성의 경우 잠옷 같은 것이 집에서 착용되었다.

근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의복은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이제까지의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귀족풍의 의상이 매우 간소한 복장으로 대치되기 시작했다. 이때 최상의 이상적 복식으로 등장한 것이 고대 그리스풍의 복식이었다. 이 시대에 여성복에서 귀족의상의 주요소이던 가는 허리, 부풀린 스커트, 높은 머리형은 유행에서 사라지고 하이웨이스트와 규칙적인 주름에 의해 전체적으로 길고 날씬하게 만든 엠파이어 스타일이 유행했다. 남성복의 특징은 색상이나 감에서 나타나 검은색이 유행했고, 18세기에는 짧고 꼭 끼는 퀼로트(culotte) 바지가 길고 헐렁한 판탈롱으로 바뀌었다.

이어서 왕정복고시대에는 로맨틱 스타일이 유행하여 다시 가는 허리와 부풀린 스커트·소매 등이 나타났다. 1830년대 여성복의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오랫동안 남자전용으로만 생각되어왔던 바지가 스포츠의 영향으로 여성들 사이에서 착용되었다는 점이다. 1848년 이후에는 크리놀린 스타일이 등장하여 옷의 형태를 부풀렸고, 이것은 다시 버슬 스타일과 S자 스타일로 변했다.

버슬 스타일은 엉덩이 뒤를 부풀린 것으로 스커트 버팀대를 엉덩이 쪽에 대어 돌출시킨 것이다. S자 스타일은 미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강한 코르셋으로 허리에서 엉덩이에 걸쳐 S자형이 되도록 압박한 것이다.

19세기말 의복의 특징은 대량생산과 형태의 규격화에 있다. 이 기성복의 발전에는 이미 출현한 재봉틀 및 패턴(pattern:재단용 종이옷본)이 크게 작용했다.

현대

20세기에 고도로 기계화된 방적업과 발달된 염색법, 그리고 화학섬유의 발달로 복식에 큰 변화를 보였다.

2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의복이 합리적·활동적으로 변화했고, 더불어 자본주의 이념에 따른 상업적인 이윤 증대를 위해 유행이 빨리 변하게 되었으며, 기업화된 생산체계 속에서 전문 디자이너가 큰 활약을 하게 되었다. 서유럽의 복식유행은 세계 각국으로 빨리 파급되었는데, 이는 방송통신매체와 사진의 확산, 영화의 출현 등에 의한 것이다.

20세기초에 선구적 역할을 한 디자이너는 폴 푸아레와 마들렌 비오네로 그들은 호블 스커트, 하렘 스타일, 미나레트튜닉 스타일, 기모노 스타일 등 새로운 모드를 많이 발표했다.

또한 여성의 사회진출이 증대됨에 따라 더블 칼라의 재킷과 롱 스커트를 함께 입는 테일러드 슈트(tailored suit)가 애용되어 여성 상의가 남성 상의와 비슷해졌다. 활동적인 스포츠 웨어로 바지도 여성들에게 애용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로 웨이스트 실루엣이 유행하다가 그 추세가 더욱 강해져 가슴을 평평하게 하고 허리곡선을 완화시킨 튜뷸러 실루엣(tubular silhouette)인 보이시 스타일(boyish style)이 등장했다.

1925년경에는 주름이나 리본, 짧게 너풀거리는 스커트 등 여성복의 특징을 살린 가르손 스타일이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밀리터리 룩(military look)이라는 군대복장 스타일이 유행했고, 전쟁중 나일론의 공업화가 진척되어 가볍고 손쉬운 세탁 등 의복에 있어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45년 파리에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고급 의상점'이라는 뜻)가 생겨 1년에 2회씩 정기적으로 의상발표를 하면서 세계 유행의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왔다.

밀리터리 룩(military look)
밀리터리 룩(military look)

또한 프레타포르테(Prêt-à-porter:'고급 기성복'이라는 뜻)가 나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착용되었다.

1947년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뉴 룩(new look)의 발표를 시작으로 하여 A라인·H라인·Y라인·F라인 등을 선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여성복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바지착용이 일반화되었다는 점이며, 바지는 정장 슈트의 감각으로까지 애용되었다.

1960년대에는 기성복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1965년 미니스커트의 출현과 더불어 남녀 공용의 블루진이 유행했다. 20세기초의 남성복은 형식적인 스타일에서 조금씩 벗어나 프록 코트는 자취를 감추었고 넓은 바지가 유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좁은 바지의 유행, 넥타이를 매지 않고 입는 셔츠, 다양한 스웨터 등이 등장했다.

동양의 의복

개요

서양식 의복은 사실상 전세계적으로 착용되고 있지만, 일본이나 한국을 포함한 동양문화권에서는 다른 형태의 의복도 꾸준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한국이나 일본의 전통의복은 중국의 영향이 크나, 그들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발전했다.

중국

BC 2000년 이전에 중국인들은 견직물을 사용했고, (漢)나라(BC 206~AD 200) 때의 그림과 조각을 통해 파오라고 불리는 소매가 넓은 옷이 착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1644년까지 계속되었고, 8세기에는 일본에 소개되어 일본의 기모노에 영향을 주었다. 1644년 이후에는 만주족에 의해 챠우푸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관복이 도입되었다. 이것은 길고 좁은 소매를 가진 형태로 색깔이나 도안에 의해 입는 사람의 신분을 상징적으로 나타냈으며, 높은 신분의 여성만이 챠우푸를 착용할 수 있었다. 이 밖에 높은 신분의 남녀는 일반 관복으로서 치푸(용파우, dragon robes)와 겉옷으로 푸푸를 착용했다.

한편 창푸는 모든 신분의 사람이 착용했는데, 이것은 후에 현대 중국인의 옷으로 발전했다.

일본

초기 일본의 의복은 3~5세기의 묘지에서 발견된 조각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투피스 형태였다.

남성은 엉덩이 길이까지 오면서 퍼지는 형태의 상의인 기누와, 발목을 묶는 넓은 형태의 바지인 하카마를 착용했다. 여성들은 같은 스타일의 상의에 '모'라고 불리는 주름 잡힌 스커트를 입었다. 일본은 나라 시대(710~784)에 이르러 중국의 관복인 파오를 받아들였다.

12세기에 다른 형태의 의복으로서 나타난 것이 관인의 일상복인 '노시'와 '가리기누'(사냥복)이다.

이것은 풍성한 상의와 더불어 헐렁한 바지를 발목에 묶어 착용했다. 나라 시대 일본 여성에 의해 착용된 기모노는 당나라의 여성들이 입던 파오와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기모노가 일본인의 의복으로 정착한 것은 17, 18세기에 염색과 디자인이 두드러지게 발달하면서부터이다. 현대의 넓은 오비는 18세기초에 처음 등장했고, 이때 여성들은 짧은 '하오리'를 입기 시작했다.

면으로 만든 기모노인 '유카타'는 원래 목욕 후 실내에서 입었던 것으로 후에는 거리에서도 착용했다.

남아시아

남아시아의 힌두교도는 약 2,000카스트(계급)를 포함하며, 각 카스트마다 의상이나 장식품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의상은 매우 복잡하다.

현대 인도의 남성은 도티, 여성은 사리를 입는데 이것의 기원은 BC 2세기 정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대에는 남녀 모두 긴 천을 가지고 엉덩이 주위를 감아 다리 사이로 늘어뜨렸고, 상의는 남녀 모두 입지 않았다.

남성은 커다란 터번을 썼고 여성은 긴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길게 늘어뜨렸으며, 많은 양의 보석장식품을 달았다. 이러한 스타일은 12세기에 이슬람교도가 북부와 중부를 지배하면서 될 수 있는 한 온 몸을 천으로 가리는 변화를 가져왔다. 한편 남부 인도는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아 도티와 사리를 계속해서 착용했고, 여기에 약간의 변화를 주어 여성의 경우 사리와 함께 짧은 콜리 스타일 재킷이나 허리길이의 상의를 입었다. 남성은 흰 바지 위에 길고 넓은 스커트 형태의 옷을 흰색 면으로 만들어 입었다.

한국의 의복

개요

한국 민족은 만주와 한반도에 자리를 잡았다.

따라서 의복은 추위를 견디고 수렵과 유목에 적합한 것으로 이루어졌다. 농경생활이 시작되고 인접국가와의 교류로 문화를 흡수하면서 풍요로워졌으나 고유복식의 기본형에는 변화가 없었다.

상대복식

한국 민족 고유복식의 기본형은 유(襦)·고(袴)·상(裳)·포(袍)를 중심으로 관모(冠帽)·대(帶)·화(靴)가 첨부되었다.

는 상의이며 는 바지, 은 치마이며, 여기에 관모를 쓰고 허리에는 대를 띠고, 발에는 화를 신어 의복의 형태를 갖추었고, 그 위에 두루마기인 를 더하여 한대성기후에 적합한 의복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삼국시대

삼국시대 이전에는 옷의 재료들과 우리나라 고유복식의 기본형이 마련되고 정제되었으며, 장식(裝飾)과 의장(意匠)도 풍부해지고 있었다.

삼국은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찬란한 민족문화를 이룩한 시대로 복식문화도 현란하게 발달했다. 이때의 직조기술의 발달은 견(絹)·포(布)·모직물(毛織物)까지 생산하여 염색술의 발달과 더불어 괄목할 만한 것이었으며, 출토된 금동관·금관·귀걸이·목걸이·팔찌·요패(腰佩)·이(履) 등 수많은 유물은 당시의 풍요롭고 호화스럽던 생활상을 보여준다.

통일신라시대

신라는 제29대 무열왕, 제30대 문무왕 때에 삼국을 통일했다.

통일 후 문화의 황금기를 맞아서 신라는 고유문화를 보존하고 외래문화를 융합하여 찬란한 민족문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문화의 난숙기에 접어들자 도덕이 해이해지고 복식 또한 문란해져서 제42대 흥덕왕은 복식금제(服飾禁制)를 명하게 되었다. 일찍이 김춘추는 중국에서 복두와 단령(團領)으로 된 공복(公服)을 도입하여 관리들에게 입게 했고, 문무왕은 관리의 부인에게 중국의 복식제도를 따르도록 했다.

따라서 복식금제에 나타난 20여 종의 복식 중에는 중국의 것도 포함되어 있다. 즉 복두·여관(女冠:花冠)·반비(半臂)·배당(褙當)·포(袍)·육합화(六合靴) 등이 그것이다.

고려시대

고려는 신라의 문화를 토대로 개방적인 정책을 펴서 생활문화의 폭을 넓혔다.

즉 거란인·여진인·몽골인·중국인·일본인·서역인 등의 귀화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복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고려 초기에는 신라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다가 이를 제도화했다. 제18대 의종 때는 고금(古今)의 예를 참작하여 관복(官服)을 상세히 제정했는데 이에는 대례복(大禮服) 겸 제복(制服)으로서의 면복(冕服)이 있었다.

면복은 이미 거란주·원주·금주로부터 보내온 바 있어 왕이 착용했음은 입증되나 이후의 내우외환으로 신하들까지 착용했는지는 의심스럽다. 일반복식은 한국 고유복식의 기본형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으며 큰 변화는 없었다. 왕도 편전(便殿)에서 쉴 때는 조건(早巾)과 백저포(白紵袍)를 착용하여 서민과 다름이 없었다.

여자의 복식은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의하면 남자와 같은 백저포를 입었으며 감란늑직을 매고 비단치마 속에는 선군(旋裙)을 더했으며, 바지만 입을 때는 무늬 있는 비단관고를 입고 머리에는 몽수를 쓰고 있었다.

이무렵부터는 유에 선(繏)이 없어졌는데 이 선은 조선시대의 여자저고리의 회장에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고려 후기 원(元)의 영향을 받아 남자 머리 모양인 체두변발(剃頭辨髮)을 비롯한 몽골풍이 지배계급 내에서 유행했다. 이러한 가운데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소매통도 좁아져갔으며 대신 옷고름이 생기게 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족두리는 몽골의 고고관(顧姑冠)이 변용된 것이다.

조선시대
의복
의복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다가 점차로 독자적인 체제를 마련했는데, 이는 제9대 성종(成宗) 5년 〈경국대전〉의 반포로써 일단락을 짓는다.

이에 의하면 어의(御衣)는 대례복이자 제복으로 구류면관(九旒冕冠)과 구장복(九章服)이 있었고, 조복(朝服)으로는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를 착용하고, 상복(常服)으로는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착용했다. 관리의 복식은 양관(梁冠)에 의상(衣裳)으로 된 조복(朝服)과 제복(祭服)이 있다.

공복으로는 복두에 단령을 착용했고, 평상복으로는 사모(紗帽)를 쓰고 단령에 흉배(胸背)를 가식했고, 흉배가 없는 시복(時服), 유사시에 착용하는 융복(戎服)은 입(笠)과 첩리(帖裏)와 전립(氈笠)과 답호의 전복(戰服)이 있었다.

전복은 뒤에 구군복(具軍服)이라고 불렸다.

조선시대 중엽에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 난을 겪으면서 복식에 있어서도 다양한 발전을 했다. 이러한 양상은 편복(便服)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양반계급에서는 예의지국의 면목(面目)을 의관(衣冠)으로 표시하여 집에 있을 때도 을 쓰고 포를 입음으로써 선비의 몸가짐으로 삼았다.

외출시에는 흑립(黑笠)을 착용했다. 관은 방관(方冠)·정자관(丁字冠)·동파관(東坡冠)·탕건(宕巾)·복건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흑립은 평량자(平凉子)·초립(草笠)을 거쳐 정립되었으며, 이밖에 방한용 모(帽)의 종류도 다양하다. 는 첩리(帖裏)·답호·심의(深衣)·직령(直領)·도포(道袍)·대창의(大氅衣)·소창의(小氅衣)·중치막(中致莫) 등이 있다.

특히 직령·도포·창의는 한국 고유의 것으로 후기에는 도포·창의가 편복포의 주류를 이루었다. 상민계급에서는 바지·저고리가 고작이었으며 까다로운 금제가 있어 비단이나 염색한 옷은 입지 못했고, 멀리 갈 때는 평량자(平凉子), 즉 패랭이를 착용했다.

여자복식은 초기에는 왕비의 대삼(大衫), 친잠복(親蠶服)인 국의(鞠衣), 일반 예복인 노의(露衣)·장삼(長衫)이던 것이, 왕비는 치적의를 제도화하고 일반예복은 원삼(圓衫)·활옷·당의(唐衣)로 집약되었다.

예복으로 성장할 때는 회장저고리에 스란 또는 대란치마를 입고 치마 안에는 무지기와 대슘치마를 입었다. 평상복으로는 저고리와 치마가 주축을 이루었고 저고리 길이는 더욱 짧아졌다. 나들이를 할 때는 너울·쓰개치마·장옷·천의(薦衣)·전립·삿갓 등으로 얼굴을 가렸다.

너울은 상류층에서, 쓰개치마는 양반계급이, 장옷·천의·삿갓은 서민들이, 전립은 기녀들이 주로 썼다. 속옷은 삼복더위에도 적삼 밑에 속적삼을 받쳐 입었고, 겨울에는 속저고리를 입고 저고리를 입었으며 아래에는 다리속곳·속속곳·바지·단속곳을 입었다.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허리띠를 둘러서 살을 가리며 방한(防寒)을 겸했다.

머리는 전기에는 가체를 하여 얹은 머리가 성행했으나 후기에는 쪽 진 머리로 바뀌어갔다.

개화기 이후 남자복식은 공·사복이 간소화되어 관리들은 관복을 사모에 착수단령(窄袖團領)과 품대(品帶)로 하고, 평복은 흑립·답호·사대로 하며, 사서인(士庶人)의 복장은 흑립·주의·사대로 하게 되었다. 이후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양복과 병용이 되고 상민도 흑립 착용이 허용되었다.

이어서 주의(周衣)가 일상복이 되면서 마고자·조끼가 등장했다. 그리고 양말과 구두, 고무신 등을 신게 되었다. 여자복식에는 통치마가 등장했고 저고리 길이가 다소 길어지며 두루마기를 입고, 양말과 구두를 신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