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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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서아시아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지역 일대를 가리키는 명칭.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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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대 메소포타미아
  2. 선사시대의 메소포타미아
  3.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의 셈족의 활약
  4. 고대 카시트족, 후르리족, 아람족
  5.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 시대
  6. 셀레우코스 왕조의 메소포타미아 지배
  7. 파르티아와 로마
  8.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메소포타미아 지배
  9. 아랍의 메소포타미아 정복과 칼리프 국가
  10. 몽골의 메소포타미아 침입
  11. 오스만 제국의 메소포타미아 지배

넓은 뜻으로 쓰이는 메소포타미아라는 지명은 터키 산악지대에서 페르시아 만에 걸친 지역으로, 터키 남동부의 평원과 이라크 전역도 포함한다. 가장 넓은 뜻으로 쓸 때 메소포타미아는 북쪽은 터키의 산악지대, 남동쪽은 페르시아 만, 동쪽은 티그리스 강을 건너 이란과의 경계인 자그로스 산맥, 서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시리아 사막에까지 이른다.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로마인이 쓴 좁은 뜻의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의 유역만을 뜻한다. 이 항목에서 메소포타미아는 중세와 근대, 현대사 부분, 특히 오스만 제국 시대 말기에 이라크로 된 지역에서는 넓은 뜻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고대사 부분에서는 좁은 뜻으로 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결정한 큰 정치세력은 남부에 있는 바빌로니아와 북부에 있던 아시리아였다. 그러므로 메소포타미아 역사자료의 대부분은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중심부에서 발견된다.

선사시대의 메소포타미아

BC 3000년대에는 하수나 시대와 텔할라프 시대에 해당하는 촌락문화가 메소포타미아 북부 전역에 퍼져 있었다. 이 문화는 바그다드의 북쪽 티그리스 강가에 있는 사마라(Samarra)를 대표적인 유적으로 하므로 사마라 문화라고 부른다. 사마라 문화는 하수나 시대와 텔할라프 시대에 걸쳐 있었으며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중류 지대에서만 발전했다.

사마라 문화와 텔할라프 문화는 모두 채색토기가 탁월하게 발달했다.

BC 3000년대 후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바빌로니아처럼 우바이드 문화가 꽃피었고, 모술 부근의 테페 가우라에서는 신전이 발굴되었다. BC 3000년대말 수메르인은 바빌로니아의 촌락문화를 더욱 고도로 발전시켰으나(이 시기를 원문자시대라고 부름), 이 시기의 메소포타미아 북부 문화는 큰 변화가 없었다.

하수나·사마라·텔할라프·우바이드의 각 시기에 해당하는 선사문화의 민족적 기반은 분명하지 않다. 시리아 사막에 개방되어 있는 메소포타미아는 초기 역사시대에 아라비아 반도로부터 셈 언어권 유목민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마리(유프라테스 강 중류에 있는 지금의 텔엘하리리)에서는 셈어 계통의 아카드어로 쓴 가장 오래된 비문이 발견되었다. 이 비문은 왕조 초기(BC 2000년대 중반)에 속한다. 같은 시기 셈족은 바빌로니아에 아카드 왕조를 건설했다(BC 2350경).

이후 BC 1000년대 초반에는 가나안인이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살았고 BC 12세기에는 아람인이, BC 9세기에는 아랍인이 메소포타미아에 나타났다. 지금의 모술 지역 주변을 중심으로 모여 산 아시리아인은 아카드어의 방언을 썼다. 이들은 고도로 발전한 바빌로니아의 문명을 공유했다.

BC 2000년대 후반부터 BC 1000년대 중반까지 메소포타미아에 살았던 비(非)셈계 후르리족의 언어는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언어와도 관계가 없다. BC 1500년경 아리아족의 왕조를 이은 후르리족은 북메소포타미아 각지에 미탄니 왕국을 비롯한 여러 왕국을 건설했다.

BC 1200년 이후 후르리족은 아람인에 흡수되거나 아르메니아 산지로 쫓겨들어갔다. 당시 아르메니아 산지에는 후르리어와 닮은 말을 쓰는 우라르투 왕국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수메르 왕 루갈자게시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지중해까지 진군해 최초의 제국을 건설했다고 한다. 이 제국은 BC 2350년경 아카드의 사르곤에게 정복되었다. 우르 제3왕조(BC 2130~2030경)는 아시리아까지 차지했으나 우르 제국이 붕괴할 때 아시리아는 독립한 듯하다. 아시리아 왕조 초기는 대체로 이신·라르사 왕조시대의 중기(BC 1900년경)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의 셈족의 활약

아시리아는 BC 1800년 이전에 쇠퇴했는데 그즈음 서(西)셈어족에 속하는 민족이 유프라테스 강 중류 유역에 정착했다. 이 민족에 관한 많은 사료가 마리에서 나왔다. 또 이보다 좀 일찍(BC 1900경) 같은 민족이 바빌로니아로 들어가 이신·라르사 왕조를 타도하고 바빌론 제1왕조를 창건했다. BC 1820년경에는 샴시 아다드라는 서(西)셈족 출신의 인물이 메소포타미아에 큰 왕국을 건설했다.

샴시 아다드는 이어 북으로 향해 아슈르를 정복하고 왕위에 올랐으며 마리에는 둘째아들 야스마크 아다드를 부왕으로 앉혔다. 샴시 아다드의 만년 10년은 바빌론의 함무라비에게는 최초의 10년에 해당한다. 함무라비는 샴시 아다드가 죽자 곧바로 북쪽으로 영토확대를 개시했으며, BC 1770년경 마리를 정복했다. 마리에서 나온 문서의 주요부분은 함무라비 정복 바로 이전 시대의 것이다.

마리의 사료는 바빌론의 함무라비, 아슈르의 이슈메 다간 등과 함께 메소포타미아의 소국왕까지 언급하고 있다. 자세하지는 않지만 이슈메 다간은 결국 함무라비에게 예속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함무라비는 치세말에 바빌로니아 본토 전체뿐 아니라 유프라테스 강 중류 유역과 아시리아까지 차지했다.

고대 카시트족, 후르리족, 아람족

함무라비의 후계자들은 재위 기간 동안 바빌로니아 왕의 권력과 영토를 많이 잃었다. 아시리아는 다시 독립왕국이 되었고 새로이 등장한 카시트족이 바빌론 제1왕조의 붕괴 뒤 바빌로니아 본토에서 권력을 잡았다(BC 1600경). 바빌론 함락(BC 1650경) 전 약 60년 동안 후르리족은 안티오키아 평원이나 북시리아 각지에 살았다. 바빌론 함락에 이은 암흑시대가 지나간 뒤 후르리족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전역으로 흩어졌다.

이무렵(BC 1500경) 소수의 아리아족이 후르리족에게 협력했다. 이 아리아족은 고대 인도에서 알려진 언어를 썼고 베다에서 볼 수 있는 신들(인드라·바루나·미트라·나사티아 등)을 숭배했던 점에서 나중에 인도에 정착한 아리아족의 일파로 볼 수 있으며, 아마 이동 도중에 부족에서 떨어져나와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한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은 곧 후르리족을 지배하는 계급이 되었으며 여러 소왕국을 건설했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왕국이 미탄니이다.

미탄니는 BC 1500~1360년경 존속했고 북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 강 중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왕국으로서, 서쪽으로 지중해부터 동쪽으로 누지(지금의 키루쿠크)까지 이르렀다. 미탄니 왕국은 봉건제를 토대로 조직되었고 전차를 모는 전사인 귀족계급과 봉신이 있었다. 미탄니에서 가장 뛰어난 지배자는 사우샤타르(샤우슈샤타르:BC 1480경)였다. 이집트 왕 투트모세 3세의 시리아 원정은 사우샤타르 치세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뒤 두 나라의 우호관계는 여러 명의 미탄니 왕녀가 이집트 왕들과 결혼한 데서 입증된다. 이른바 텔엘아마르나 문서에 따르면 이크나톤의 왕비 네페르티티도 미탄니 왕가 출신이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그뒤 히타이트 왕 수필룰리우마스는 후르리 왕 아르타타마와 동맹하고 카불 지역으로 남하해서 미탄니의 수도 와슈슈칸니를 약탈했다.

미탄니 왕 투슈라타가 그의 아들에게 살해당하자 후르리와 미탄니의 싸움은 얼마 동안 계속되었다. 투슈라타의 아들 마티와자는 수필룰리우마스의 딸과 결혼해 미탄니의 통치자가 되는 동시에 히타이트의 봉신이 되었고, 이후 미탄니는 히타이트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뒤 부상한 아시리아는 히타이트의 위험한 인접국이 되었으며, 아시리아 왕 샬마네세르 1세(BC 1275경~1245 재위)는 유프라테스 강 동쪽 전역을 정복했다. 그의 아들 투쿨티 니누르타 1세(BC 1245~1208 재위) 때에도 메소포타미아는 아시리아 제국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투쿨티 니누르타 이후 아시리아는 쇠퇴했고 메소포타미아에는 아람인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티글라트 필레세르 1세(BC 1116~1076 재위)는 세력을 만회해 메소포타미아의 아람 부족 몇을 격파하고 터키 남동부에서 지중해까지 군사행동을 확대했다. 그러나 티글라트의 통치 뒤에 아시리아는 다시 쇠퇴했다. 아람인은 이 시기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일부에서 세력을 확립했고, BC 10세기 동안 시리아에 있던 과거의 많은 히타이트 도시들을 점거했다.

BC 900년경 아시리아의 여러 왕은 새로 영토 확대를 시작해 아시리아 서쪽 경계와 유프라테스 강 중류 유역에서 아람인과 싸웠고 아람인의 여러 왕국을 손에 넣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 시대

메소포타미아는 아시리아 제국 멸망 때까지 아시리아의 영토였는데, 아시리아는 정복지역의 모든 주민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원래 주민들이 있던 곳에는 다른 나라의 주민을 이주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메소포타미아와 근동의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 틀림없다.

BC 626년 신바빌로니아 왕국을 건설한 아람인의 한 부족 칼데아인이 융성하자 아시리아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BC 612년 바빌로니아의 나보폴라사르와 메디아의 키악사레스는 니네베를 점령했다. 나보폴라사르의 아들 네부카드네자르는 이집트의 왕 네코 2세를 카르케미시 전투(BC 605)에서 격파해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이집트의 야심을 물리쳤다. 아시리아는 메디아와 바빌로니아로 분할되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에서 두 왕국 사이의 정확한 경계선은 알려져 있지 않다.

BC 539년 페르시아 왕 키루스 2세(대왕)가 바빌론을 정복해 신바빌로니아 왕국 전토를 획득한 이후 메소포타미아는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때까지 존속했다. 알렉산드로스는 BC 331년 가우가멜라에서 다리우스 3세를 무찔러 메소포타미아를 점령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동부 정벌에 나섰다가 바빌론으로 돌아왔으나 BC 323년에 죽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메소포타미아 지배

메소포타미아를 마케도니아가 식민화시킨 것은 아마 알렉산드로스 통치 당시에 시작된 듯하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여러 왕들이 다스리는 동안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지역에 많은 도시가 건설되었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정치적 목적으로 메소포타미아에 헬레니즘 문화를 장려한 것이 분명하다.

메소포타미아는 시리아와 함께 셀레우코스 왕조의 심장부를 이루었고 티그리스 강 동쪽 여러 도시를 상대로 하는 교역의 요충지였다. 신흥도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도시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동쪽 수도가 된 티그리스 강가의 셀레우키아였고, 몇몇 지방이나 도시에는 마케도니아 본국에서 딴 이름을 붙였다. 남부 바빌로니아에는 마케도니아 정복 전부터 이미 도시가 밀집해 있었으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인 셀레우코스와 안티고노스의 전쟁(BC 312~302)으로 바빌론 시가 크게 파괴되었으므로 대신 셀레우키아가 행정상 수도이자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BC 141년 또는 BC 140년에는 미트라다테스 1세(BC 171경~138/137 재위)가 통치하는 파르티아가 바빌로니아와 메소포타미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고 메소포타미아 북부만 셀레우코스 왕조에 남았다. BC 140년경과 130년경 셀레우코스 왕조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와 바빌로니아를 잠시 탈환했지만 그뒤 셀레우코스 왕조의 여러 왕들은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손에 넣은 파르티아와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 약했다.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은 파르티아의 여러 왕과 교섭하게 되었고 주변의 사막에서 정착지대로 이동하는 아랍인이 점점 많아져 그리스인이나 원주민과의 혼혈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리스 도시는 그리스 고유의 성격을 그리스도교 시대까지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셀레우코스 제국
셀레우코스 제국

파르티아와 로마

미트라다테스 2세(BC 124경~87경 재위) 때 메소포타미아는 확고한 파르티아 영토였으며, 로마의 루쿨루스와 폼페이우스의 조약(BC 66)에 따라 메소포타미아는 파르티아령으로서 인정받았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에서 시리아로 종단하는 로마군이 몇 차례에 걸쳐 이 땅을 통과하자 파르티아는 아르메니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결국 로마도 말려들게 되었다.

미트라다테스 2세(Mithridates II)
미트라다테스 2세(Mithridates II)

로마 장군 가비니우스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넜지만(BC 54) 크라수스는 카라 전투(BC 53)에서 파르티아에게 패배했고, BC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의 암살로 로마의 대원정군은 메소포타미아에서 퇴각했다. BC 36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를 지나 파르티아 왕 프라테스 4세(BC 38경~32 재위)와 싸우려한 원정 계획은 비참한 결과로 끝났다. 그러나 AD 62년 볼로게세스 1세의 로마 공격도 니시비스(니시빈) 서쪽에는 이르지 못했고, 이듬해 63년 평화협약을 맺었다.

115년에는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가 북방에서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메소포타미아로 진입해 메소포타미아는 싱가라까지 로마의 속령이 되었다. 이듬해 트라야누스는 티그리스 강을 건너 니시비스와 에데사를 점령했으나 하트라는 포위 속에서 저항해 트라야누스의 공격은 실패했다.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는 메소포타미아를 포기하고 유프라테스 강을 국경으로 삼았다. 그뒤 파르티아 왕 볼로게세스 3세는 로마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죽음을 기회삼아 아르메니아에 침입했으나 실패해 메소포타미아 서부는 다시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콤모두스 황제가 죽자 194년에 하트라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 맞섰고 니시비스는 파르티아 군에 포위되었다. 그러나 195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친히 로마 군을 이끌고 그들을 진압했다. 그는 니시비스를 주요식민도시의 지위로 끌어올렸고 이미 예멘의 아랍인이 들어와 정착해 있던 신자르 지역을 병합했다. 셉티미우스가 철수하자 형세는 나빠졌으나 198년 그가 다시 나타나자 파르티아인은 철수했다.

그뒤 평화가 지속되다가 216년 카라칼라 황제가 파르티아에 싸움을 걸었다. 217년 카라칼라가 카라 근처에서 암살된 뒤 후계자 마크리누스는 니시비스 근처에서 파르티아에 패하고 평화조약을 맺어야 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는 계속 로마 영토로 남았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메소포타미아 지배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누스가 224년 죽자 파르스 지방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아르다시르 1세는 자기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계승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메소포타미아를 침략해 니시비스와 카라를 점령했다(233).

243년 로마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는 메소포타미아로 진입해 카라와 니시비스를 회복했다. 그러나 258년 샤푸르는 로마 제국 내의 분쟁을 틈타 메소포타미아로 쳐들어와 니시비스와 카르하이를 공격하고 에데사를 포위했으며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260). 그뒤에도 메소포타미아를 둘러싼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로마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298년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니시비스로 진출해 평화조약을 맺었고 메소포타미아의 일부는 로마로 넘어갔다. 약 40년간의 평화 뒤에 샤푸르 2세가 전투를 재개했다. 363년 율리아누스 황제가 전사했고 뒤를 이은 요비아누스 황제는 싱가라와 니시비스를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동부 전지역을 페르시아에 넘겨주고 평화조약을 맺었다.

여러 해 동안 로마의 영토였던 니시비스를 포기하자 그리스도교도들은 크게 놀랐다. 니시비스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네스토리우스를 탄핵한 뒤로 네스토리우스 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에데사의 그리스도교도들은 단성론(Monophysitism)을 탄핵한 451년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에 따르지 않았고, 니시비스는 네스토리우스파·야고브파·멜키트파의 세 파가 모이는 곳이 되었다.

6세기초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새로운 격전이 벌어졌다. 카바드 1세가 지휘하는 페르시아군이 시리아로 침입했다. 동로마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페르시아의 공격을 물리쳤지만 칼리니쿰에서는 패했다(531). 호스로 1세의 평화(532)도 오래 가지 못했고 로마령 메소포타미아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호스로 2세 전후의 혼란기에 로마는 다시 과거의 국경을 회복했다(591).

동로마 황제 포카스의 즉위(602)와 더불어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에는 큰 전쟁이 일어나 호스로 2세는 로마 제국 안으로 깊숙이 진군했으나 호스로의 아들 카바드 2세는 메소포타미아 정복을 단념했다. 시리아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페르시아 군주의 지배에서 풀려났다고 기뻐했으나 곧 동로마의 무자비한 성직자들이 펼치는 압정에 시달리게 되었다. 호스로 2세와 헤라클리우스가 사투를 계속하는 동안 아라비아에서는 새로운 세력이 자라나고 있었다.

아랍의 메소포타미아 정복과 칼리프 국가

메소포타미아는 예언자 마호메트 시대 이전에도 부분적으로는 아랍화해 있었지만 634년 아랍 정복군에게 점령된 이후 이슬람 제국 내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650~750년의 100년간은 메소포타미아 문화·사회의 변혁기였다. 750년 아바스 왕조의 창건은 메소포타미아에 가장 위대한 시대가 시작됨을 알렸다.

아바스 왕조는 역대 칼리프 왕조의 전통을 지키고, 약 5세기 동안 독특한 반(半)종교적 위엄을 유지했으며, '아랍 문명'이라고 칭할 학술·문화·문학의 꽃을 피웠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정치력·군사력의 행사는 항상 칼리프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실제로는 각 지방의 독립정권이 정치 군사력을 행사했다. 10세기의 알레포와 모술을 중심으로 한 함단 왕조, 11세기의 우카일 왕조, 12세기 전반 중부 이라크의 마지아드 왕조 등이 이런 예이다.

이들 여러 왕조의 통치는 기간도 짧고 거칠었지만 이슬람 역사상 큰 이름을 남겼고 문화수준을 높였으며 물질면에서도 발전을 보였다.

몽골의 메소포타미아 침입

1258년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의 침략으로 바그다드와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관개시설이 파괴당함에 따라 이 지역은 긴 암흑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도시가 붕괴했고 농업이 쇠퇴한 데다가 파괴적인 사막 민족의 대규모 침입이 거듭되어 1258~1534년의 3세기 동안 메소포타미아 역사는 가장 단조롭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처음 80년 사이는 몽골족이 세운 일 한국의 총독들이 메소포타미아를 다스렸으나, 이들 중 일 한국의 황금시대를 쌓은 가잔 칸(1295~1304 재위) 이외에는 모두 행정에 무능했고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는 데에만 급급했다. 1336~39년의 내전 뒤에 하산 젤라이르가 패권을 쥐었다. 하산은 1340년 바그다드를 점령했고 젤라이르 왕조를 세운 다음 수도를 타브리즈에 정하고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했다. 그러나 1401년 몽골의 티무르는 훌라구보다 더욱 심한 파괴를 자행했다.

몽골이 물러간 뒤 이란 북부에서 새로 일어난 투르크멘족의 카라 코윤루('검은 양'이라는 뜻) 왕조가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했다. 약 60년간 계속된 이들의 지배는 훗날 아크 코윤루('흰 양'이라는 뜻) 왕조를 이루는 같은 투르크멘족의 다른 세력에게 넘어갔다. 아크 코윤루 왕조의 지배 영토는 급속히 발흥한 페르시아의 지배자로 사파위 왕조를 창시한 이스마일 1세에게 넘어갔다.

오스만 제국의 메소포타미아 지배

사파위 왕조의 지배는 도시 지역의 치안은 급속히 회복시켰지만 야산 지대까지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페르시아가 통치한 26년간은 메소포타미아에는 불안한 시대였다.

오스만 제국의 동방진출은 사파위 왕조 페르시아의 변경 지대에 있는 쿠르드족과 자지라인(人)의 여러 도시의 지지를 얻었으므로 술탄 술레이만 1세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바그다드로 진격했다. 1534년에는 메소포타미아 전역이 오스만 제국에 귀속되어 이후 약 4세기에 걸쳐 투르크의 한 지방이 되었다. 군사국가의 색채를 띠고 도시 지역에만 세력을 미쳤던 오스만 제국의 통치의 처음 90년간은 1623년 사파위 왕조 페르시아의 아바스 1세가 이 지역을 재탈환함으로써 일단 끝났다.

페르시아 재통치시대가 15년 계속된 뒤 술탄 무라드 4세는 다시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했다(1638). 부패하고 쇠약해진 모술·바그다드·바스라 3개주의 통치자들은 매우 작은 지역의 치안 유지만을 맡았고 임무도 별로 없었지만 적어도 약 1세기에 걸쳐 외국세력의 침입을 막고 중요 지역의 질서를 유지시켰다.

18세기에도 이런 상태는 계속되었지만 한쪽에서는 새로운 변화도 일어났다.

오스만 정부의 내부에서는 문관이 늘어났고 그의 기능도 분화되었다. 또 군대의 세력 증대가 두드러졌으며 술탄의 영향력은 떨어졌다. 메소포타미아에는 유럽인 상인·영사·사절 등이 나타났고 쿠르드 지방과 모술에는 지방정권이 탄생했다. 나디르 샤가 이끄는 페르시아가 다시 침략을 개시한 일, 여러 번의 싸움, 바그다드의 파샤(아메드 파샤와 하산 파샤)가 이끈 저항과 반격, 바그다드와 모술의 포위전도 18세기의 일이었다. 내정개혁 전 오스만 제국의 통치는 권력쟁탈전의 연속이었다. 개혁 이후 메소포타미아에서 오스만 제국 지배의 마지막 1세기(1831~1914)는 불완전하고 적용 불가능한 개혁이 오스만 제국의 여러 주 가운데 가장 멀리 떨어지고 낙후한 이 지역에까지 미친 시기였다.

동시에 이 지방이 인도로 통하는 육로의 입구에 해당하며 고고학상 또 성서 연구상 매혹적인 땅으로 유럽인에게 알려진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영국인이 관심을 보여 영국 영사들은 절대적인 힘과 특권으로 이 지방 경영에 나섰다. 19세기 중반 이래 메소포타미아의 중부와 남부는 영국의 세력권에 들어간 것과 다름없었고, 한편 북부의 모술은 프랑스의 영향하에 있었다.

영국이 전보·우편사업을 비롯해 도로·다리 등의 건설을 시작해 이곳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메소포타미아는 페르시아 변경 지대의 불안정(1912까지 정식 국경이 결정되지 않았음)이나 아라비아 반도 내 유목민(오스만 제국은는 이름뿐이기는 하나 이 땅을 자신의 영토에 포함했음)의 침입을 제외하고는 그밖의 모든 위협에서 벗어나 있었다. 근대화한 군대는 모술·바그다드·바스라를 통치하는 사람(파샤)의 정책을 지지했다.

각 지역 통치자 가운데는 청렴하고 현실주의적인 지성을 겸비한 사람들도 약간 있었다. 이들은 알리 리다 파샤(1831~42 재위), 나지브 파샤(1842~52 재위), 모하메드 라시드(1853~58 재위), 나미크 파샤(1853~60 재위), 미드하트 파샤(1869~72 재위), 나딤 파샤(1911~12 재위) 등인데, 이들은 충성하지 않는 부족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질서있는 시책을 폈고, 또 국민이 요구하는 정부 기능을 발휘하기 위한 준비나 능동적인 정부기구 정비에 노력했다.

각 지역 통치자들의 이런 노력은 근대적인 법제를 바탕으로 했고, 아랍인이 가능한 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을 실행에 옮겼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몇 십 년 사이에 정부의 기능이 강해졌고 정부와 대중, 부족민과 도시인, 종교와 사회의 관계는 서서히 개선되었다. 19세기는 특기할 만한 일은 적었지만 진보의 싹이라고 볼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담고, 다가올 이라크 국왕 파이잘 1세(1921~33 재위)의 정부에 대해 많은 조건을 준비한 형성기였다.

술탄 칼리프 제도의 권위에 바탕을 둔 오스만 제국정부는 튼튼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변동과 개혁이 퍼져갔다.

1900년 이후 소수의 지식인이 벌인 문화·정치운동으로서, 레반트 지역과 이집트에서 두드러졌던 민족주의 운동은 이라크에도 전해졌다. 이 운동은 아랍의 자아의식 회복과 자치에 대한 희망, 이방인인 투르크족의 장기간에 걸친 실정(失政)에 대한 불만을 바탕으로 한 운동이었다. 아랍 민족주의 사상은 일정한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똑같은 목표도, 효과적인 행동수단도 없었으나 1920년 이후의 군주제 이라크를 걸머질 장래의 정치가들 중 몇 명은 1914년경 이미 아랍 민족주의로 기울어져 있었다.